- 맥주나 한잔 할까!
밤은 야심한데 잠은 안 오니 까마귀는 또 술 생각이 납니다. 까마귀는 산책 겸 맥주 사러 밤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마셨고, 그저께도 마셨고, 그 그저께도 마셨습니다. 장가 못간 놈 이 하루도 빠짐 없이 마시는 술은 뭘 의미할까요?
- 장가가기 전에 몸이 망카지면 안 되는데..^^
오늘까지 마시고 내일부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술을 안 마시기로 까마귀는 단단히 맹세했습니다.
교교한 달빛 아래, 장가 못간 놈은 오늘도 맥주 사러갑니다.
죄 진 놈처럼 고개를 숙이고 터벅터벅 걸어 가는데, 오늘 따라 하늘 위에 쟁반 같은 달님은 왜 이렇게 밝을까요.
- 계집애, 누가 처녀가 아니랄까봐..^^
골목을 돌아서자 멀리 앞쪽에서 사람 그림자들이 얼른거리는데, 무슨 일인지 되게 요란스럽습니다.
이어서 욕지걸이와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웬 일인가 해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두 무리의 인간들이 십자거리에서 몽둥이를 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재미나는 구경거리가 생겼네요..^^
까마귀는 멀직이 서서 담배를 꼬나물고 무리싸움을 구경합니다. 동네 깡패들이 이권 다툼을 하는 거라 생각하며 말입니다.
-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 실큰 죽일래기 해봐라..^^
깡패들은 서로 치고 박고 비명을 지르며 한바탕 엉켜서 싸우더니, 돌연 징소리와 함께 양쪽으로 갈라지는 거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마치 요술이라도 피우듯, 두 진영의 머리 위에는 무리를 대표하는 깃발이 휘날리는 거였습니다.
안경을 춰올리고 자세히 보니 왼쪽 무리의 깃발에는 ‘연변놈’, 오른쪽 무리의 깃발에는 ‘안쪽치’라고 쓰여있었습니다.
- 대체 무슨 날인데 '놈'과 '치'가 한자리에 모였지..^^
혹시 '놈'과 '치'에 대해 궁굼하신 분들이 있으면 사전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놈’도 ‘치’도 모두 사람을 낮춰부르거나 비하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저절로 ‘놈’이요 ‘치’요 하며 깃발을 내건 거 보면, 까마귀는 이 사람들은 상당히 겸손한 분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적어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로써, 동네에서 인테리에 속하는 분들인 건 틀림이 없습니다.
근데,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 왜 싸우시는 걸까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까마귀는 날개를 펄럭이며 밤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전장과 가까운 전선줄 위에 내려앉아 싸움을 지켜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착각할가봐 미리 얘기를 드리는데, 까마귀는 이 사람들의 싸움에 끼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하늘 높이 나는 까마귀는 평화주의자에 이상주의자입니다. 말하자면 너 좋고 나 좋고 다 좋은 그런 세상을 지향하는 좋은 새입니다.
까마귀가 시시하게 세상 사람들과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을까요? 하늘 높이 나는 까마귀는 구경 좋아하는 구경꾼일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까마귀는 까마귀, 절대 박쥐가 아닙니다. 하늘 높이 나는 까마귀가 박쥐를 부러워 할 이유는 더욱 없습니다.
- 씨, 까마귀가 박쥐보다 못 생긴 것도 아니잖아..^^
시시한 얘기는 그만 하고, 우리 잠자코 계속 싸움이나 구경합시다.
‘안쪽치’의 진영에서 외칩니다.
- 연변놈들아, 우리 조선족은 개조해야 한다. 특히 연변놈들이 개조가 필요하다. 연변놈들은 각성하라.
‘연변놈’의 진영에서 외칩니다.
- 네 놈들이나 개조해라 . 우리 연변놈들은 개조가 필요 없다. 제 코도 못 닦는 주제에 어디 와서 까불대냐.
이게 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지요 ? 들으면 들을수록 까마귀는 뚱딴지 생각밖에 안 났습니다.
두 무리는 한밤중에 옥신각신하며 동네 요란하게 구는데, 까마귀의 귀만 아팠지결판이 나지 않네요.
하지만 싸움을 건 건 '안쪽치'란 생각이 듭니다. 원래 마음이 상한 쪽이 먼저 싸움을 거는 거 아닌가요?
까마귀는 정신없이 싸움을 구경합니다.
- 세상에 이렇게 재미나는 싸움이 어디 있지!
하지만 싸워봤자 그 모양이고, 결과가 안나니 영화보기 보다 못하네요.
그러자 ‘연변놈’의 무리에서 우두머리 같아 보이는 사람이 박도를 들고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외치는 거였습니다.
- 우리 이렇게 맨날 싸워봤자 끝이 없으니 한번 맞장을 뜨자. 거기 김문학이 있나, 앞으로 나와 칼을 받으라.
그러자 ‘안쪽치’의 무리에서 백면서생 같아 보이는 키 작고 얄팍한 사람이 검을 들고 진앞으로 나서는 거였습니다.
- 내가 김문학이다. 좋아, 우리 맞짱 뜨고 개고기 먹으러 가자.
(담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