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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 吉 雨
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skc663@hanmail.net
가까이 지내던 한 친구가 한창의 나이에 갑자기 입원을 하였다. 심장을 움직이는 관상동맥에 이상이 생겨 일어난 심장병이란다. 그는 대용 혈관을 넣어 잇는 큰 수술을 하였다. 다행히도 수술 경과는 좋았다.
그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을 때 병문안을 갔다. 그는 나에게 빙긋이 웃으면서 푸념처럼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고기도 안 먹고 살았는데 이런 병이 걸렸어.”
실제로 그 친구는 평소에 여간해서는 고기 한 점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였다. 담배는 아예 안 피웠고, 술도 별로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혈관에 기름기가 끼어 혈액이 원활하게 흐르지 않아서 생기는 혈관 협착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의사가 그러는데, 혈관에 기름기가 끼는 것은 고기를 먹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래. 나물만 먹어도 생기는 사람은 생기는 거라더군.”
나는 그의 두 가지 말속에 각기 다른 두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첫 번째의 것은 자신의 삶으로 보아 원망(怨望)의 뜻이 담긴 것이고, 다음의 것은 대수술 뒤 회복되고 있는 현실에서 갖는 수용(受容)의 심정이다. 실제로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채식만 한 그로서는 이런 심장병에 걸린 것이 억울하다고 여길 수가 있다. 하지만 고매한 인품과 온아 인자한 그의 성격으로 “채식만 하는 사람도 걸릴 수 있다”는 수용의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 뒤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오페라 ‘토스카(Tosca)’를 텔레비전을 통해 보게 되었다. 비록 녹화로 보이는 심야방송이었지만 고교생 시절에 감명 깊게 들었던 음악 중의 하나였기에 무심히 시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까맣게 잊고 있었던 ‘토스카(Tosca)’의 노래 가사가 자막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여주인공 토스카가 사랑하는 애인이 교수대로 끌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애절하게 부른 노래이다.
“노래 위해 살고 사랑 위해 살았네.
남 몰래 불쌍한 사람도 도왔지.
제단 위에 꽃도 바치고 신들에게 기도도 드렸지.”
그렇게 티 없이 착하게 살아왔는데도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가슴이 메어졌으면 죄 없이 살아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겠는가? 그에 대한 보상은커녕 사랑하는 애인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슬픔으로 이렇게 소리쳐 울부짖었다.
“나 고통 당할 때
신은 왜 날 버리시는가?
왜 날 버리시는 걸까?”
토스카는 괴로움으로 노래를 부르며 몸부림쳤다. 연기와 노래가 가사의 내용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풍부한 감정을 적절하게 고조시킨 푸치니(Puccini) 특유의 음악이 성량 좋은 성악가에 의해 훌륭하게 연기되고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의 노래는 음악이 아니라 절박한 상황에서 외치는 실제의 절규요 애타는 호소로 가슴에 파고 들어왔다.
‘토스카’를 처음 들었을 때는 고교생 시절이었다. 물론 그때도 감동은 컸었다. 극중의 몇 개의 명곡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감격적이지는 않았다. 자정이 넘고 음악이 끝난 뒤에도 마지막에서 나오는 ‘별이 빛나고’의 애절한 선율은 한참 동안 가슴에 여운을 남겼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갑자기 심장 수술을 했던 그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토스카를 볼 때처럼 안타깝고 애처로운 마음이 그에게서도 똑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며칠 안 되어서 그 친구의 부음(訃音)이 전해져 왔다. 한낮에 길을 가다가 심장이 멎어져 응급실에 실려 가고, 결국에는 깨어나지를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완쾌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잘 하고 있던 그였기에 뜻밖이었다.
빈소를 찾았을 때 영구 앞에는 그의 평상적인 사진이 놓여 있었다. 물론 영정 사진 같은 것을 찍어 두었을 리가 없는 그였다. 사진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사진 속의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그는 이렇게 다시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퇴원 얼마 전 병상에서 내게 했던 말이다.
“하느님은 꼭 악한 사람만 데려가는 것이 아닌 것 같아. 필요해서 세상에 내보냈듯이 필요 없으면 착한 사람도 데려가는가 봐. 다 하느님 뜻이고 부처님 마음이겠지.”
그 날에는 이 말이 그의 마지막을 알리는 말인 줄을 몰랐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는 자신이 돌아갈 것을 이미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가 보다.
병상에서 하던 그 친구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난 고기도 안 먹었는데… ” 그리고, 토스카의 노래 가사도 함께 생각이 났다. “남 몰래 불쌍한 사람도 돕고, 신들에게 기도도 드렸지.”
왜 그 순간 두 사람의 말이 동시에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둘 다 착하게 열심히 살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가끔 그 친구가 생각날 때면 토스카가 떠오른다. 그리고 토스카를 보노라면 그가 생각나기도 한다. 둘 다 내 마음에다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남기고 갔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