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明珠, 상해로 가다 <이정숙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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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明珠, 상해로 가다 <이정숙 탐방기>
  • 이정숙
  • 승인 2009.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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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폭의 그림같은 상해 푸둥 전경
8월 21일 11시 55분, L140次 열차는 선전에서 상해를 바라고 서서히 떠났다. 자식 많은 부모는 매일 오늘은 어느 구름장에서 비가 떨어질가 걱정한단다. 딸이 어엿한 성인이 됐어도 어미는 마음을 졸이며 산다. 공기오염이 심각하고, 기후도, 음식도 영 아닌 선전에서 어떻게 살아 갈가 마음이 아파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선전특구와 혜주의 널려진 공업촌들을 뒤로 하고, 큰역, 작은역에서 대부분 정차하면서 열차는 북으로, 북으로 달려, 항주를 거쳐 25시간 넘어서야 상해南역에 이르렀다.

컴의 세상에서 흰판, 검은 글자로 도착지점과 교통수단을 똑바로 주고 받아야 되는데 전화로 하다나니 어긋났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해도 되는데 택시에 앉다보니 마음을 졸이면서도 요금이 50여원이 나왔다.

역시 상해였다. 포동민박주인을 따라 들어가면서 웬 호텔로 들어가지 하고 생각 하였다. 으리으리한 로비를 지나, 3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식물원같은 정원이 앞에 펼쳐졌다. 杜鵑閣에 가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15층 민박에 들어서니 내 생각의 민박이란 개념이 뒤집어졌다. 두개 층으로 되었는데 100평도 훨씬 넘는 구전한 호텔식이었다. 몇년 전에 70~80만 위안 주고 산 집인데 인젠 130만 위안을 훌쩍 넘긴단다.

샤워하고나서 , 이틀간의 숙박비 200원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왔다. 한시 바삐 豫園방향에 가고픈 마음에 택시에 앉았다. 끝없는 공예품의 천국에서 이리저리 헤매이면서 廟前廣場도 보고, 한국에도 “있는” 城隍廟 " 문어귀에 가서 가만히 합장기도도 했다. 이름뿐인 上海灘을 거쳐 外灘(외탄)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도히 흐르는 황포강을 보는 순간, “네가 있어 상해가 있구나!”하고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선전의 24시간 내내 거무칙칙한 하늘 아래에 있다 오니, 상하이의 하늘은 푸른보석처럼 빛났다. 햇솜 같은 구름은 손만 내밀면 잡힐 것 같이 느껴졌다. 강 건너 포동엔 동방명주, 썅거리라, 오로라, 찐모우, 등 거대한 건물들이 황포강을 따라서 들어 앉았는데 반시간 지나보니 마지막 저녁빛의 작간에 이상하게 우중충하니 가라앉아 보였다.

外灘(외탄)을 거닐고나서 길 건너편의 유명한 남경로로 갔다. 그제나, 이제나 네온싸인으로 환한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보니 끝이 있을것 같지 않아서 아예 2원을 주고 남경로 보행거리 관광버스에 앉아 거리 끝까지 둘러 보았다. 짧고, 가느다란 건물의 기둥에 습관됐는데 상하이의 발달한 기둥건물에 확 끌렸다. 빌딩들의 거대한 기둥, 교각들을 정신없이 쳐다 보았다.

상하이에서도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고국-한국의 이름으로 지어진 빌딩과 로고들을 보면서 가슴이 뿌듯해 났다.

인민광장에 들렸다가 이리저리 거니고 보니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민박주인이 시키던대로 지하철을 타고 東昌路역에서 내렸다. 역광장에선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중로년들이 한창 무도를 추고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길을 물어 가다보니 또 노천에서 경쾌한 중국음악에 맞춰 양걸을 추고 있었다. 끼어들고 싶은 마음을 달래고, 아쉬운대로 내가 기억한 陸家嘴花園을 물어서 가는데 갈수록 심산이다.

늦은 밤이라 행인은 많지 않고, 모두들 무슨路인가만 물어보는데 급한 마음에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허둥대면서 길을 찾는데 멀리서 아까 길을 가르쳐 주시던 중년부부가 나한테로 다시 찾아와서 자세히 물어 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일본인으로 보였는지 중어를 참 잘한단다. 물론 조선족임을 밝혔다. 그들은 택시를 불러 운전기사에게 내가 가야할 곳을 상해방언으로 자세히 설명해 주고는 대략 나올 택시비까지 나에게 귀뜸해 주셨다. 허리굽혀 감사를 드리고 택시에 앉았다.

여행에서 만난 많은 고마운 분들이 떠올랐다. 계림에서 내가 아끼던 한국산 양산을 다른 유람지에서 잃은 것을 알고는, 사양하는데도 기어이 동료에게 전화해서 찾아준 가이드.... (결국은 위해에서 차에서 잊고 내렸지만) 참으로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이튿날 일찍, 민박을 나섰다. 버스정류장에서 처음으로 안내역을 자세히 보았다. 한국이나, 중국 다른 곳은 모두 일반적으로 건물, 구역이름으로 하는데 상해의 버스역이나, 지하철역은 절대 대부분이 **路, **路......였다. 이런 걸 몰랐기에 지난 밤에 진땀을 뺐다. 여러분은 꼭 나같은 실수를 하지말기 바란다. 길 찾는데만은 당당했던 나를 상하이는 고정관념이 사람을 헛고생 시킨다는 것을 알게 했다. 이후 어디로 가든지 다시는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상해 지식청년 여교원과 참으로 가까이 지낸적이 있다. 70년대에 그녀를 통해 상해사람들의 경제관념을 익히 들었었다. 한 푼이라도 계산해 쓴단다. 연변사람들은 정치에 열을 올리지만 그들은 거들떠도 안 본단다. 그래도 돈이란다. 이번에 보니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들은 올라만 갈 뿐 내려가지는 않았다. 공중장소엔 냉방이 거의 되지 않았다. 시민들이야 불편하든말든, 그들의 철저한 경제적 핵산이 엿보였다.

서울에서의 7년, 수없이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면 한번도 빠짐없이 한강을 뒤 돌아 보았고, 마음을 설레이었다. 한강에 가서 유람선도 타보고 손을 오모려 강물을 담아 보고 탁도도 측정해 보았다. 어제 저녁에 浦西에서 황포강을 보았지만 아침에 陸家嘴에서 하차한 후 이곳저곳 쏘다니다가 내 발길은 저도 몰래 또다시 浦東의 거센 황포 강물을 찾았다. 마음에 격정을 불러 일으켰다. 남경로의 시계탑에선 9시를 알리는 인공위성에서 보내는 "동방홍"의 멜로디가 강변에 울러 퍼졌다.

9시 28분에 상해의 명물이 되어버린 핑크색을 박아넣은 동방명주 텔레비탑에 올랐다. 263m의 입장권은 70원이었다. 468m의 높이인데 아시아 제일, 세계 제3 이란다. 360도 관광층에서 세계 텔레비탑 사진전을 흥미진진하게, 자세히 훓어 보았다.

탑에서 굽이굽이 흐르는 황포강, 일망무제한 평원에 수풀처럼 일떠선 고층건물들을 내려다 보았다. 사람은 개미만큼 하다. 벽돌 한 장은 티끌이다. 개미들이 티끌을 쌓아서 하늘을 찌를듯한 빌딩들을 저렇게도 많이 짓다니! 일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정녕 제일 겁나다. 누가 그들을 당할손가?!

360도 관광층엔 31개 행정자치구의 방향에 따라 명칭이 씌어 있었다. 광동성의 방향과 길림성의 방향에 따라서 내 가족과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 드렸다. 돌아 보고 있는데 열심히 이야기 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내 옆엔 주름이 깊게 패인 왜소한 바깥노인 한분이 딸로 짐작되는 분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행복한 모습이었다.

그렇잖아도 혼자 구경하기 아까워 하던 순간이라 나의 입에선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악어의 눈물"(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수분이 모자랄때, 혹은 먹이를 꿀꺽 삼킬때 짜내는 눈물이라는 설이 있다.)이 걷잡을 수 없이 흐른다. 다행히 너무도 소란스러워 들은 사람은 없었을 거다.

    상해 푸둥 야경
생각 같아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고만 싶어졌다. 우리세대들의 비애 - 부모님들에게 관광도 시켜 드리지 못하고, 임종도 지키지 못한 그 애절한 아픔이 있기에 악을 쓰고서라도 나 혼자 여행을 다닌다. 하루라도 잘 사는 모습을 보여 내 딸에겐 후회를 남기지 않으리라.

밤 늦게까지 徐家匯등을 돌아 다니다 민박으로 돌아왔다. 여기 촌도시 연길도 주요거리가 주차장이 될 때가 있는데 내가 본 상하이는 자가용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북경은 공무원들의 세상, 심천은 생산자의 세상, 가게가 많은 상해는 비즈니스맨들의 세상이 아닐가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우리 중국동포들은, 나는 무엇을 하여야 이 세상에서 一席之地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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