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가 찾아왔다. 눈길이 약간 불안스러웠다. 불도 켜지 않은 골방에 나는 팔깍지를 끼고 누워있다. 허연 달빛이 방안에 흘러들어 팬티만 입고 뒹구는 자를 허여멀쑥 빚어놓는다. 생각이랑 심보랑도 허여멀겋게 보일것이다. 흑백사이 묘한 구간을 찾아 네발 뻗고 만사태평 그짓만 생각할것이다. 매일 밥만 퍼먹고 궁싯거리기만 한다. 그놈한테는 정신도 사상도 없어보인다. 그놈의 옛날은 그놈이고 그놈의 지금과 미래도 그놈이다. 자기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무얼하려는지 조금도 알 필요가 없는 놈이다. 그놈은 그놈만으로도 생존의 충분 필요한 조건이다. 그놈은, 그냥 누워있는 그놈이다!
남수가 머리 들이밀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달빛을 등진 얼굴이나 입가에 맺힌 피냄새와 눈에 얽힌 거미줄같은 고뇌가 눈에 보이는것 같다. 나는 너무 건방져있다. 이런 달밤에는 차라리 음특한 독거미가 되여 저 자식부터 잡아먹고싶다. 비릿한것!―
“음, 뭐하고있어?”
그가 코멘소리를 해왔다.
“아무것도, 보다시피.”
별로 응대하고싶지 않았다.
“미안해.”
나는 뭐가 미안하냐고 물었다.
“그냥∼ 혹시,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탓해듣지 말라구, 우린 친구이지?>>
“자식, 알았다. 우린 영원한 불알친구이지!”
“그래, 불알친구지!”
아, 불알친구라? 가슴이 뭉클해난다. 술내가 약간 풍겨왔다.
“자, 진호형과 진수형한테서 편지가 왔더라. 이봐 선비, 부탁하나 할까? 선녀말이다, 아마 널 좋아하는것 같던데 잘 대해줘라. 흥흥, 어떤 자식은 참 좋것다, 나는 간다!”
그는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라졌다. 정말 웃기는 놈이였다.
불을 켜자 나는 진호형의 편지부터 뜯어보았다. 간단한 문안을 끝내자 이렇게 썼다.
― 진규야, 내가 집에 다녀가지 않은지도 4년이 넘는구나. 입대하고 아직 한번도 가지 않았으니까 나는 독한 놈이다. 부대가 집과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다해도 한두번쯤 얼마든지 휴가낼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구나. 솔직히 가고싶지 않았다. 그냥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정이 모자라서였겠지! 우리 집의 성분이 복잡하다는것을 너도 알거다. 나는 세 엄마의 손에서 자랐다. 그래선지 무척 외로움을 탔다. 늘 혼자라 생각했다. 그때 너희들은 너무 어렸고 나는 너희들과 어른들 사이에서 어른스러워져야 했다. 빨리 커서 집을 떠났으면 했다. 참군하는 길만이 유일한 희망이였다∼
그런데 사람 사는게 그게 아니더구나. 이곳에 오니 외려 집이 그리워졌다. 이복형제이지만, 우리의 피줄은 하나이다. 또 살아온 정이 있지 않느냐? 할매, 아버지는 말할것도 없고 성질이 괴퍅한 니네 엄마도 그만하면 날 잘 대해준셈이다. 누워서 생각하면 하나하나 그립고 애틋한것을, 그냥 혼자라고 생각했으니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용서해주겠지? 요즘 집에 한번 갔다왔으면 했는데, 또 안되겠구나. 상급의 지령을 받고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편지도 전화도 할수 없는 고장인데 몇년이 걸릴지 모른다. 그러나, 우린 언젠가는 만나겠지! 꼭 만날 날이 올것이다. 그 날을 믿자!
진규야, 부디 부모님들을 잘 모시고 할머니걱정 많이 해드려라. 우리 인애가 보고싶구나. 많이 안아줬는데∼ 어른들한테 구구히 말씀드리지 말고 문안만 전해드려라. 사진 한장 동봉한다. 이제 우리 진규도 선을 봐야지 않을까? 맘씨 좋고 고운 색시를 만나 잘 살거라. 인생은 결코 길지 않단다.
너의 행복을 빈다.
큰형이.
4촌짜리 칼라사진속의 군인은 카빈총을 가슴에 들고있다. 무기창고관리소 부소장으로 부임되면서 남긴 기념사진이란다. 배구선수같은 훤칠한 키에 서글한 눈이 그윽해있다. 진호형 같으면서도 아닌것 같다. 그만큼 가까우면서도 먼것 같다. 마지막 부탁들이 너무 간절해서인지 불안스럽고 서글퍼까지 났다. 정말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해 진수형의 편지는 스타일이 틀렸다. 16절지 종이에 나의 초상까지 그려 동봉했다. 검정, 빨강, 회색들을 많이 쓴 탓에 유화는 가까이에서 보면 이색저색 짓이겨 대충 칠해놓은듯 보였다. 좀 거리를 두니 그런대로 모습이 알려왔다. 손으로 살살 지우면 원래의 모습이 드러날것 같은 착각이 생겼다. 그림이 정말 별로였다.
아래는 내가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였다.
― 잘있니? 미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모습을 떠올릴수 없구나. 너와 한집에서 자랐고 같이 놀기도 했지만 널 제대로 관찰해본것 같지 않구나. 솔직히 모르고지냈다는 편이 나았다. 마음은 선한데 주대는 별로 없다. 공부는 괜찮다. 뭐, 그런 정도 알고있었지. 네가 좀 가엽다 생각하기도 했다. 사내의 기질이 약했으니까. 심부름시키기는 좋았지. 물론 이는 옛날 인상속의 너였다. 그러니 이렇게 말한다고 탓하지 말거라. 소문 듣자니 너도 많이 변했다더라. 그래도 찌프린 인상은 변하지 않을것 같아 대충 그려보았다. 기억속의 널 찾고싶었다. 자신의 진가를 알자면 눈살을 많이 찌프려라. 그래야 세상을 바로잡고 바른 삶을 살아갈수 있다. 평생 잘먹고 잘놀고 마음 편하게 지낸다고 옳바른 인생을 사노라 말할순 없다. 하긴 그쪽 환경이 좀 그렇더라. 자연부락이 섬들처럼 단절되여있고 행정이나 문화시스템들이 약하고 제한 많이 받게 되여있더라. 그러니 생활이 무미건조할수밖에 없다.
오래간만에 보내는 편지에 훈계가 많아 미안하다. 난 교수문하에서 나왔다. 연길에서 미술부를 차릴 타산이다. 이제는 돈을 벌어야겠구나. 미술학원의 녀선생을 꼬셔놓았으니 조만간 결혼을 해야겠지. 시간이 나면 한번 찾아오너라. 술 한잔 나누자꾸나. 그래도 우린 같은 아버지를 두었으니 같은 운명의 줄을 잡고 태여난셈이다. 복선녀한테도 문안 전해라. 은근히 좋아했다는 말까지! 괜찮은 녀자니 네가 한번 잘해보거라.
그리고 이 말은 안하려 했는데 미안하다. 곁에서 선화를 많이 챙겨주거라. 걔한테 진 빚이 너무 많은것 같구나. 내가 나쁜놈인것을 그쪽 사람들은 다 안다. 예술을 하니까 그런 말도 듣나보다. 이번 편지는 어른들께 비밀로 해라. 그러는게 서로에게 편할것이다.
가까운 시일내에 만나기로 하자.
건투를 빈다.
작은형이.
나는 어리둥절해났다. 어릴 때에 따라다니며 심부름을 하면서 느꼈던 불쾌감이나 이질감같은것, 이를테면 삐뚤어져 나가도 제멋대로 버무리는 주견과 배짱, 남이 감히 어쩌지 못하는 말과 행동 따위를 서슴없이 행하는 용력같은것들에 잔뜩 위축되여온 나였다. 그를 생각만 해도 금시 힘들어지고 복잡해지고 어수선해졌다. 그런데 이제 웬 둔갑일까? 다정했고, 배려까지 베풀어주다니? 찝찝해나는 기운을 더더욱 떨쳐버리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