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튿날부터 나한테는 하나의 일과가 주어졌다. 불쌍한 친구를 관찰하고 체크하기였다. 새벽 여섯시 날이 희붐히 밝으면 남수는 일어났다. 뒤뜨락에서 밭고랑이나 김을 매지 않으면 이랑을 지었다. 아줌마들처럼 일년감이며 고추이며 가지들의 순도 잡아주고 오이나 줄당콩도 따서 부엌으로 갖고들어갔다. 이일저일 잡히는대로 하며 복선녀네 집의 동정을 살폈다. 아침 여섯시 사십분쯤, 그는 집에 들어가 밥을 먹고는 다시 나타나 뒤뜰을 한바퀴 돌고서 일터로 나간다.
저녁을 먹고는 옷을 갈아입고 뒤뜰에 쪽걸상을 갖다놓고 한 사오십분쯤 앉아있는다. 책을 펼쳐놓고 읽지 않으면 입에 하모니카를 물었다. 그의 연주수준은 아마추어나 열성만은 프로였다. 그래도 복선녀네 뜨락에서 반응이 생기지 않자 이번에는 뚱딴지같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낮고 웅얼거려서 무슨 노래인지 판별이 가지 않았다.
나는 인애나 선화란 끈을 리용했다. 말수 적은 복선화를 부려먹기가 더 편했다. 자꾸 캐묻는 인애는 좀 시끄러운 편이였다.
“선화야, 남수오빠가 무슨 노래를 하는가 듣고 올래? 래일 널 데리고 고기잡으러 갈께. 남수오빠한테 이렇게 물어봐라. 오빠, 요즘 무슨 노래를 자꾸 흥얼거려요? 하고.”
“킥, 오빤 정말 나빠요.”
“요눔 계집애, 내가 나쁘다구?∼ 왜서?”
“그냥∼ 생각해보면 알게 아닌가요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내리까는 계집애의 눈이 싫었다. 공부는 하지 않고 엉뚱한 궁리만 하는것 같았다. 단단히 혼을 내주고싶다. 복선녀는 내가 너무 민감하다고 눈을 흘겼다. 아직도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인데 뭘 그러냐? 제발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이윽고 선화가 가만히 붙어왔다. 쓸개빠진듯 한참 실실거렸다.
“그 오빤 전혀 노래를 부를줄 모르는가봐, 어른들이 얘기하는것처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요. 뚱딴지같이 무슨 <대해항행은 키잡에 의거하고>를 하다가도 <도라지>를 부르고, 또 금방 <싸아띵죄에신 부파씨썽(결심을 내리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는데, 난 뭐가뭔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런 노래들도 있어요? 아마 머리가 좀∼ 히히, 안 그래요?”
“옳거니, 그래 고게 잘못된것 같구나, 허헛, 수고했다.”
“그 오빤 노래가사 하나 제대로 기억못하는것 같아요. 어쨌든 고기잡으러 갈 때 정말 데려가야 해, 거짓말하면 안돼요?”
“요, 요정같은것. 그래, 약속은 지켜주마.”
“오빤 좀 그렇다. 난 오빠 맘 다 알거든, 헤헤.”
계집애가 비실거리며 물러갔다. 얼굴에 겁기가 아닌 홍운이 비껴있다. 머리에 연분홍댕기를 매고 옆머리에 삔까지 꽂아 이마가 반듯하게 드러났다. 제법 은은한 수태까지 머금고있다. 웃음이 터질것 같은데 나오지 않고 마음만 야릇해졌다. 저눔 계집애는 요정이야, 애를 저 지경으로 만들다니? 쯧쯧! 나는 진수형의 소행을 나무람했다.
꽃잠자리떼가 춤추는 골목길에 급기야 기막힌 락조가 마지막 화려한 빛을 던져왔다. 집집의 굴뚝들에서 저녁연기가 그림같이 피어나고있다. 광막한 평원의 어디에서 연연한 저녁바람은 달과 별무리들을 씻어와서 우리의 머리우를 장식해놓을것이다. 나는 갑자기 몸이 떨려왔다. 추워서 그런가 싶었는데 아니였다. 맥이 빠져나가고있다. 한오리 힘마저 없어졌다. 주저앉을듯 무릎을 휘청거렸다. 가슴속에 어두움이 거미줄을 쳐왔다. 독스런 거미가 희미하게 거기에 매달려있다. 그놈이 너무 고독해보였다. 그것이 병적인 현상인지 아닌지 지금도 모르겠다. 후에도 가끔씩은 그랬다. 맥이 싹 빠져나가면 희미한 거미줄이며 독거미의 잔영에 대한 환각이 까닭없이 나를 불안케 했다.
남수의 의포단장에도 변화가 생겼다. 저녁이면 흰와이셔츠에 그때 청년들이 잘 입고다니던 곤색디칠량(데트론)양복을 빼입고다녔다. 코수염을 기르고 머리도 3.8선에서 가리마를 반듯이 내 빗어넘겼다. 촌구락부에 가보면 음치인 주제에 춤만은 기막히게 잘췄다. 처녀애들의 손을 잡고 사교무를 하는데 물 만난 물고기가 헤염치듯 자유자재로 리드를 해갔다. 나는 자신이 미안했다. 시대와 멀어지는 자기모습이 보였다.
남수가 다가와 반색하면서 손을 끌었다.
“어이구, 선비님, 오래간만이오. 춤추러 왔나? 마침 잘왔어. 나 혼자는 힘드니 같이 배워주자. 앞으론 우리 활동에 참가해라 응? 자, 환영, 다같이 박수!∼”
다들 손바닥들을 요란히 마주쳐주었다. 남수의 순둥이같은 얼굴이 비웃듯 환해져갔다. 생김새의 순한 맛은 여전해도 어떤 교활함이 은은히 비껴있다. 내가 친구를 소박했는지 친구가 나를 따돌려왔는지 모르겠다.
이튿날, 나는 붉은목책을 준비했다. 선화는 심부름을 잘했다. 첫장에다 역시 이렇게 갈겨놓았다. 복선녀의 필치를 모방한것이다.
보고싶은 남수동무에게:
동무의 목책을 잘 받았소.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하며 글을 읽었소.. 동무가 적극적으로 당에 접근하고 입당에 힘쓰며 고향건설에 몸을 다 바쳐 싸우는것을 보고 너무 감동되였소. 뭐라 칭찬해줬으면 좋을지 모르겠소. 동무말대로 우린 영원한 전우이고 영원토록 변치않을 동무가 될것이오. 그 동무는 너무 퇴폐적이고 소극적이요. 나는 인정하오. 동무가 그립다고 하면 그 동문 뭐라하는지 아오? 사랑한다 어쩐다 막 그러지, 완전히 자본주의사상에 물젖어있소! 꽃나비 쌍쌍 춤을 추듯 남녀간에 은근한 정애가 있어야 진정한 사랑을 할수 있다나? 남자와 녀자가 어쩌구어쩌면서 찰떡궁합을 빚어가야 사랑의 참미를 맛볼수 있다고 속삭이오. 정말 퇴폐적인 냄새가 가득 풍기는 말들이오. 지린내가 너무 나 코를 다 막아야 했소. 그러니 우리는 절대 그런 사랑을 하지 말고 기대도 하지 맙시다. 애들같이 티가 없는, 영원하고 순수한 혁명적인 동지로 손을 잡고 살아갑시다!
숭고한 혁명적경의를 드리오.
선녀로부터.
그것을 보내놓고 나는 킬킬거렸다. 골방에 들어가 혼자 웃노라면 불쌍하게 신들린 자신의 령혼을 보는것 같았다. 킬킬, 쿨쿨, 껄껄 밥을 먹다가 갑자기 입안에서 밥알이 튀여나오면 할매는 저 구신(귀신)들린것 봤나? 했고 엄마는 너 돌았재에? 연변사투리를 쓴다. 아버지만은 채하겠다, 자식! 시무룩 웃으신다. 난 왜 그런 얄궂은 일을 저질렀을까?
남수가 답장을 써보낸 편지지는 부대용지였다. 퇴폐적인 말을 금지할데 관한 건의같은것을 제출해왔다. 순수한 혁명적동지란 말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자기가 말한 순수는 그런 뜻이 아니다. 보고싶다거나 그립다거나 손을 만져보고싶다는것과 관계된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손을 만지면 그게 순수해지는가? 그것이 퇴폐적인 동무의 소행과 뭐가 다른가? 뭐가뭔지 모르겠노라, 짐짓 성을 냈다. 그는 왜 모르냐? 남자와 녀자가 오손도손 살면 그게 순수가 아니냐고 한다. 나는 더더욱 성을 내는척했다. 동무는 누구보다 용속하고 엉큼하다. 우리의 관계는 순수하지 못하기에 이제 끝났다. 다신 편지를 하지 말라, 고 써보냈다. 그는 몹시 당황해했다. 미안하다. 용서해라. 나도 동무를 사랑한다, 하고 끝내는 퇴폐적인 표현을 해왔다.
나는 혼자서 배를 끌어안고 웃어제꼈다. 헉헉거리며 필을 들었다. 미안하다. 그 좋은 말을 왜 이제야 하느냐? 이미 그 말 먼저해준 사람한테 마음을 빼앗겼으니 한입으로 두 말을 할수 없게 됐다. 이제 다신 편지거래를 하지 말자. 친구의 녀자를 빼앗는자는 제일 비렬한 놈이다고 어른들이 말하더라, 하고 마침내 칼을 들이댔다.
후에 그가 몇번 더 사랑을 호소해왔으나 나는 아예 회답조차 하지 않았다. 가운데서 선화가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냈다. 계집애는 다짐을 받아두듯 바투 들이댔다. 웃음기 한오리 걸치지 않은 얼굴에 동그래진 눈이 사뭇 정색해있다.
“오빠, 내게 빚진것 알지? 꼭 갚아야 해요, 응? 아니면 일러바칠거니까.”
나는 기가 차서 이를 악물고 계집애의 머리를 쥐여박았다.
“알았다, 요 악바리, 이 불여우야!”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