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결혼 한 중국동포 최인숙씨의 눈물어린 사연
“저는 그렇다 쳐도 박준수(박영호와 최인숙 사이에서 태여난 남자아이, 8살)는 박씨 가문의 친손자가 아닌가? 자신들의 친손자가 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아들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집(가격이 6천 5백만 원에 달하는 빌라)에서 내쫓으려 수단을 가리지 않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법원에 소송하여 1차 판결에서는 승소하였는데 웬 영문인지 2차, 3차 판결에서는 패소하였습니다. 판사도 이유 없이 시댁에 집과 남편의 퇴직금(1370만원)을 양도하라며 압력까지 가하고 있습니다. 친척, 지인도 없는 낯선 타향에서 누구한테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매일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서울조선족교회 인권센터을 찾은 최인숙씨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흐느꼈다.
최인숙(1967년생)씨는 1995년 타인의 소개로 한국인 박영호씨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고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 그녀와 남편은 열심히 일을 하여 가격이 6500만원에 나는 빌라를 사고 가장집물까지 갖추어 놓았다. 그러는 사이 그들에게는 방치같이 튼실한 아들까지 생겨나 그들 부부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행복에 겨워 기쁨을 금치 못했다. 자고로 하늘의 풍운은 측량하기 어렵고 사람의 앞길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최인숙씨는 자기 가정에 불행이 들이닥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시아버지 생일에 갔던 남편이 갑자기 영문도 모르게 쓰러졌다. 병원에 실려 간 남편은 간암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억장이 무너졌다. 결혼하여 여지껏 남편과 말다툼 한번 크게 하지 않고 아기자기하게 웃으며 살아온 그녀에게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남편이 돌아가면 자신과 아들은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녀는 남편의 침상 앞에서 하늘도 너무나 무심하다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상상 못할 일이 벌어졌다. 시댁에서 아들이 살아날 가망이 없자 그들의 집과 아들의 퇴직금에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시댁에서는 병원에서 밤낮 없이 남편의 병간호에 지친 며느리를 영문 없이 쌍욕을 퍼부으며 내쫓았다. 그리고 그녀 모르게 그들의 부동산 등기부 등록을 맏아들 박영진의 이름으로 변경시켰다. 뿐만 아니라 남편의 회사에 찾아가 퇴직금도 모조리 찾아내왔다. 남편의 병간호에 정신을 차릴 사이 없었던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알 길이 없었다. 아니, 그녀는 아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 처지에서 그들이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리라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였다. 남편이 돌아가고 이 모든 곳을 알게 된 그녀는 너무도 기가 막히고 또 치가 떨려 미칠 것만 같았다. 자신과 남편이 아껴 먹고 아껴 쓰며 한푼 두푼 모아서 산 집을 시댁에서 빼앗아 가다니? 퇴직금을 시형이 찾아갔다니 이것도 어디 될 말인가? 아무리 돈만 돈이라는 자본주의 사회라 해도 하늘 아래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단연히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법원에서는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그녀는 승소했다. 법원문을 나서며 그녀는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다 해도 법은 그래도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헌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생각은 산산 쪼각나고 말았다. 시댁에서 어떻게 작간했는지 2차, 3차 판결에서 그녀는 꼼짝달싹 못하고 패소하고 말았다. 억울해도 어디에 가 하소연 한단 말인가? 친척, 친구도 없는 낯선 타향에서 하소연 한다 한들 누가 들어주겠는가? 한국의 법은 알고도 모를 일이다.
시댁에서는 지금 그녀와 아들이 사는 집을 빼앗으려 갖은 행패를 다 부리고 있다. 현관문을 뜯어가는가 하면 낯모를 사람을 시켜 집에다 불까지 지르려 하고 있다. 그녀의 아들은 시댁편이 무서워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고 있다.
이 자신을 낳은 친 어머니와 함께 살겠다는데 이것은 해도 너무하지 않는가? 범도 제 새끼가 곱다고 애지중지 하는데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일을 처사할 수 있단 말인가?…”
최명숙씨는 "아들이 죽어서 며느리는 남이 되었다. 손쳐도 준수는 분명 당신들의 친 혈육이 아닌가?! 친 혈윤인숙씨의 억울한 사연을 들은 서울조선족교회 인권센터 김의종 목사는 격분을 금치 못하며 법원의 불공정한 판결은 나중에 꼭 공정한 판결로 처리될 것이라며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였다.
박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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