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와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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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와 용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9.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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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길우의 수필 134>

 

申 吉 雨

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skc663@hanmail.net

 

나의 연구실 컴퓨터 책상 앞 벽에는 하나의 사진틀이 걸려 있다. 그 속에는 한 장의 바위 사진이 들어 있다. 몇 년 전에 우리 한반도의 남쪽 끝이라는 땅끝[土末]이란 곳에 갔다가 바닷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찍어 온 것을 표구하여 걸어 놓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 바위 사진이 조각처럼 모양이 특별하거나 예술성이 뛰어나서 걸어 놓은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의 작품 사진으로서의 품격이나 풍미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빛깔이 특이한 것도 아니다. 깊은 곳은 검고 앞의 겉쪽은 하얀 흑백이 주조를 이룬 바위 색 그대로이다. 그냥 어느 바닷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울퉁불퉁하고 패이고 틈도 많은 평범한 바위의 한 부분일 뿐이다. 또한 자신이나 누구의 멋진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그런데, 이 바위 사진을 연구실에까지 걸어 놓게 된 데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여행을 다니면서 나는 사물을 가끔 근접 촬영해 보곤 한다. 이 사진의 경우도 그렇게 찍은 몇 장의 바위 사진들 중 하나이다. 찾아온 여행 사진들을 가족들과 함께 보다가 이 사진을 보고 큰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이 사진은 용(龍) 같은데요.”

“그래? 어디 보자.”

그러고 보니 그렇게 보였다. 길쭉한 입은 벌리지를 않았을 뿐이고, 바라보는 두 눈과 양쪽으로 뻗은 큰 뿔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정수리 부근에 안테나처럼 똑바로 선 작은 뿔과 그 뒤로 중간 크기의 두 뿔은 양쪽으로 균형을 잡으며 멋지게 나 있다. 주름진 기다란 목 부분과 덜미를 따라 늘어선 갈기며 떡 벌어진 앞가슴까지도 용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좀 어색하기는 하였지만 떡 버티고 선 두 앞다리도 그런 대로 갖추고 있다. 그 뒤부터 꼬리까지는 보다 검은 앞쪽 바위에 걸려 가려진 모습이다. 따라서, 완연한 한 마리의 용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어둠을 배경으로 동굴 안에서 밖을 향하여 고개를 약간 갸웃하게 하고서 내다보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한 마리의 멋진 용처럼 보였다.

“한 번 확대해 보자.”

그래서 결국에는 나의 연구실에 걸리게까지 된 것이다. 하나의 평범한 바위가 의미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변신하여 함께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동료 교수가 내 방에 왔다가 이 사진을 보고 말하였다.

“이 사진, 참 좋은데요. 무얼 찍은 겁니까?”

나는 웃으면서 그에게 도로 물었다.

“글쎄요, 무엇으로 보입니까?”

그는 되물음에 대답을 하지는 않고 한참을 사진만 보고 있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기린(麒麟) 같습니다. 기린.”

나는 의외의 답변에 ‘아, 그렇게도 보는구나.’ 하고 속으로 놀랐다. 그 교수는 내가 용의 발로는 어색하게 여긴 앞발 부분을 기린의 다리로 보고, 가려진 부분을 더 많이 추상해서 한 마리의 기린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발과 몸통의 상상으로는 기린이 보다 그럴듯하게도 여겨졌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한 동안은 내 연구실에 누가 오면 나는 꼭 이 바위 사진을 보라 하고,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묻곤 하였다. 많은 사람은 그냥 ‘바위’라고 대답하였다. 가끔은 ‘나무’를 찍은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어떤 모습으로 보이느냐?’고 다시 물으면 아무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간혹 ‘사슴’이나 ‘말’ 같이 보인다고 대답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용’이나 ‘용마’로도 보고, 심지어는 ‘해골’이나 ‘귀신’으로까지 대답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이런 여러 가지의 대답을 들으면서, 그 다양함에 먼저 놀랐다. 똑같은 형상을 본 인식과 느낌의 내용이 사람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하나의 바위 사진을 놓고서 있는 그대로의 바위 형체로만 보기도 하고, 나무나 사슴․말․용․해골․귀신 등으로 생각하는 그 다양성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각각의 생각들은 왜 생기는 것이며,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곤 하였다.

이런 놀라움과 의문 속에서 나는 이런 말이 떠올랐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도둑놈 눈에는 무엇만 보인다.”

그렇다. 평범한 바위 사진 한 장에서도 마음의 바탕과 마음가짐에 따라 용이나 기린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해골이나 귀신 같은 것을 연상할 수도 있다. 사슴이나 말 같은 짐승이나 나무로도 느끼고, 그냥 그대로 순수하게 바위로 보기도 한다. 그것은 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마음바탕과 마음가짐에서 오는 것이다. 사람의 본심과 마음가짐에 따라 같은 물체를 보고도 달리 보게 된다. 이는 사람이나 일에 대한 생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어찌 이 바위 사진에만 국한되는 것이겠는가.

사람이나 사물을 대할 때에는 진실로 마음바탕과 마음가짐부터 바로 하고 볼 일이다. 바른 마음으로 보지 않고서 어찌 그 참된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더구나 비틀어진 마음으로야 부처님을 만난들 보일 것이며, 꽃을 마주하고도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도 책상머리에 그 사진을 걸어 놓은 채 가끔씩 바라본다. 그러고는 무엇으로 보이는가 생각해 보곤 한다. 바위에서 기린이나 용 같은 신성한 것을 발견할 수는 없을지라도, 해골이나 귀신 같이 흉측한 것으로 보이는 일은 생기지 않도록 내 마음부터 가다듬고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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