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申 吉 雨
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skc663@hanmail.net
늦은 아침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밀린 글을 쓰려고 켜 보았다. 그런데, 한 시간이 넘도록 한 편도 제대로 쓰여지지가 않는다.
창밖을 바라보니 햇살이 베란다의 창턱을 타고 넘어온다. 노란 햇살 자락이 안방 유리문을 건너와 드리우고 있다. 손바닥을 펴서 대어 보니 금방 노랗게 물이 든다. 따사한 촉감이 간지럽다.
방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서니, 파란 하늘이 눈앞에 다가온다. 하얀 구름 두어 조각이 한 쪽 하늘을 헤엄쳐 간다. 바깥 창문을 여니 바람이 봄 향기를 풍기며 들어온다. 길게 들여 마시고는 천천히 내어 쉬었다. 날숨에서도 향내가 나는 것만 같다.
쫑알대는 참새 소리에 둘러보니 3층만큼 자란 목련나무 가지에서 촐랑댄다. 그 아래 화단에는 진달래가 금방이라도 피어날 듯이 봉올져 있다. 작은 나무는 가지마다 연초록빛 잎새들이 앳된 얼굴을 내밀고 바라본다. 한결 마음이 맑아지고 여유로워진다.
방안으로 되돌아오니 봄 향내가 가득하다. 열어놓은 창을 타고 어느 새 봄이 들어와 방안까지 채운 것이다. 책상 앞에 다시 앉았으나 글 쓸 마음이 안 생긴다.
“그래, 맞아. 오늘 같은 날에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지.”
혼자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드니 오디오 옆에 놓인 꽃병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이 꽃병이 꽃을 잊은 지 오래다. 선물을 받은 데다 마음에 들어 한 동안 꽃을 자주 꽂아 주었었는데…. 언제는 명절, 오늘은 누구 생일이라고, 때로는 그냥 기분이 좋아서 사다가 꽂기도 하였다.
그런데, 작년에는 별로 꽃을 꽂은 기억이 없다. 숙소를 옮기자, 혼자 사는 것이 안됐다고 꽃이라도 가끔 꽂아 놓으라고 아내가 싸 보내준 것인데 잊고 지낸 것이다.
그렇구나. 이 방안에 너와 둘이서 살면서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먼지 앉은 꽃병을 들고 나와 물로 닦으니 윤기가 난다. 잎새가 어울린 꽃무늬며 요리조리 굽은 가지들의 부조가 도자기 표면에 생생하게 살아난다.
“닦아만 놓아도 이렇게 좋은 걸….”
미안한 마음에 혼자 중얼거렸다.
이 꽃병이 연구실에 있었을 때에는 호강도 했었지. 졸업식이나 입학식에, 가끔은 행사 때에 학생들이 와서 꽃을 꽂기도 하고, 스승의 날에는 꽃바구니에 치이면서도 작은 카네이션이나 천으로 생화처럼 만든 무궁화 꽃송이들이 꽂혀 각각의 정성을 뽐내기도 하였지. 어느 때는, 차를 마시다가 빈 꽃병을 본 여학생이 ‘외롭겠다’며 꽃을 갖다 꽂아 주기도 하고, 등교 길에 길가의 개나리를 몇 가지 꺾어다가는 “교수님은 저와 공범(共犯)이에요” 하며 꽂기도 하였지. 여름이면 여름 꽃이, 가을이면 가을꽃이 철따라 꽂혔던 꽃병이다. 그러고 보니, 잊혀진 연인처럼 내가 너무 무정했었나 보다.
하지만, 이 꽃병에 누가 꽃을 꽂을까? 자기가 보내주었으니 아내가 와서 꽂아 놓을까? 아니면, 인정 많은 딸애가 혼자 지내는 아빠가 보고 싶다고 내려오다가 꽃을 들고 올지도 모르고, 어쩌면 받기는 좋아하면서도 줄 줄은 잘 모르는 막내 녀석이 장미꽃 한 송이라도 자랑스럽게 들고 올는지도 모르지. 공연한 생각을 하며 꽃병을 닦으니, 닦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겁다.
꽃병은 꽃을 꽂는 병이다. 그러므로, 꽃병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아름다운 것이다. 그 모양이 예쁘고, 무늬와 조각이랑 패이고 도드라진 모습이며 빛깔과 광도(光度)가 보기가 좋다. 꽃병을 만든 사람이 아름다운 꽃이 꽂힐 것을 기대하며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인가 보다.
하지만, 꽃병은 꽃이 꽂혀 있어야 제격이다. 꽃이 있어도 없어도 꽃병은 꽃병으로 맵시가 있지만, 꽃병은 확실히 꽃이 꽂혀 있을 때에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설령 조화(造花)라도 꽂혀 있어야 꽃병은 꽃병답게 된다.
그런데, 꽃병이 가장 아름다운 경우는 꽃과 함께 꽃병에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을 때이다. 꽃을 꽂은 사람의 정성과 축복이 꽃과 함께 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미 없이 담긴 꽃은 비록 그것이 아름다울지라도 맛은 훨씬 떨어진다. 마치 미인을 보고서 사랑스러운 마음은 생기지만, 애인처럼 그를 소중하게 여기거나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꽃병, 확실히 그것은 보기 좋은 모습이다. 거기에 꽃이 꽂혀 있을 때 꽃병은 더욱 아름답다. 그리고 다시 사랑과 축하의 정성이 함께 담겨 있을 때 꽃병은 비로소 최고의 아름다운 걸작품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래서, 꽃이 꽂혀 있는 꽃병을 보게 되면 나는 세 가지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곤 한다. 예쁜 꽃이 꽂혀지기를 바란 꽃병을 만든 사람의 아름다운 뜻과, 조물주가 주신 최고의 선물인 꽃의 아름다운 모습, 그리고 거기에 무엇인가를 축하하고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꽃을 꽂은 이의 아름다운 마음씨, 이 세 가지이다. 꽃병의 희망과 꽃의 현실과 꽂은 마음, 이 세 아름다움이 함께 어울려 피어나고 있는 것이 바로 꽃병이다. 삼위일체의 미, 아니 삼색이 조화된 아름다움을 꽃이 꽂혀 있는 꽃병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꽃병에 꽃을 꽂자. 그리고 우리들의 따뜻한 마음을 함께 담자. 꽂아서 주고, 바라보면서 거기에 담긴 마음을 읽어보자.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꽃병을 마른걸레질을 하며 나도 모르게 잠시 행복에 겨워 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