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인 동시에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는 교통 대란의 기간이기도 하다. 그 까닭은 햇곡으로 음식을 만들어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선조들의 묘를 찾아 성묘를 하는 풍습이 우리 민족의 정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 대열에 끼어 지루한 고향 방문길에 나섰다. 조상의 산소를 찾아 성묘도 할 겸 어린 날의 향수도 느껴 볼 기회가 아니겠는가. 물론 이제껏 작은 형님이 고향을 지키고 계시니 겸사겸사 찾아뵙는 도리와 그리고 또 하나 나를 반갑게 맞아 줄 녀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기조차 했다.
전쟁터에서 사선을 뚫고 적진의 고지를 탈환하듯 고향 마을에 도착해 형님 댁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버릇처럼 먼저 닭장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지난번 방문 때까지 있었던 기골이 장대한 장닭이 눈에 띄지 않고 빈 닭장의 썰렁한 분위기가 나를 무심히 맞이해 주었다.
어차피 닭이란 인간의 식생활을 위해 태어났다가 죽는다는 것을 내가 모를 리 없지만 그래도 텅 빈 닭장을 보고 서운한 마음이 그리 쉽게 가시지 않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3년 전 일이었다. IMF라는 경제위기가 시작되던 다음 해 늦봄이었다. 잠결의 나를 아내가 급히 흔들어 깨웠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병아리 비명 소리에 깨어나 부엌으로 나가 보니 고양이가 웬 조그만 병아리를 물고 와 산 채로 톡톡 치며 놀리고 있는 것을 빼앗아 상자 안에 담아 놓았다는 것이다. 나는 급히 마루로 나가 상자 안의 병아리 상태를 살폈다. 갓 태어난 병아리를 물고 와 쥐 잡듯 다그쳤으니 그 모양새가 오죽했으랴,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향하여 맨 처음 시작했던 영농일이 양계업이었기 때문에 나는 금새 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그 병아리에게 가장 시급한 건 어미의 품 속 같은 포근한 온도였다. 백열등 전구를 상자 안에 켜 놓아 보온을 해 주는 작업을 하고 그 날 밤은 일단 그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디서 물고 왔을까? 주인을 찾아 줘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찾아 줄 방법이 없다. 시골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동네방네 방을 붙일 수도 없고 또 값나가는 물건도 아닌데 더구나 살아 있는 병아리를 습득물이라 하여 파출소에 신고할 수도 없는 처지가 아닌가. 하지만 엄격히 따지고 보면 고양이가 훔쳐 온 장물을 보관하고 있으니 나 또한 장물아비인 게 분명하다.
어찌한담? 아내와 상의를 해 봐도 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냥 죽이지 않고 잘 길러 주는 게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우리 내외는 결론을 내렸다.
바쁜 일상사에 일거리가 하나 더 생긴 꼴이다. 하지만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옛날의 나로 다시 돌아온 것 같아 오히려 행복감이 더해 왔다. 그렇지만 어떤 어린 학생이 귀여운 병아리를 길러 보고 싶어 용돈을 아껴 구입했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간밤에 감쪽같이 사라져 얼마나 많이 상심해 있을까 생각하니 나 또한 꺼림칙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이건 되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니 어찌하겠는가.
다음 날 아침 동네 시장에 가서 병아리 사료를 한 되 사 왔다. 작은 공기를 장만해 물과 사료를 넣어 주었다. 그리고 야채를 송송 썰어 사료에 섞어 주었다. 생기를 되찾은 병아리는 먹이와 물을 맛있다는 듯 옹알대며 먹는다. 갓 난 병아리는 식구들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나날이 다르게 원기를 회복했다. 원기를 회복한 병아리는 나를 제 어미로 착각했던지 상자 밖에 내놓으면 내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먹이를 달라고 삐약삐약 울어댄다. 이 때만은 모든 세상만사의 번뇌에서 벗어나 한 순간의 행복감에 젖기도 한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집에서 기를 수는 없다. 더구나 우리 집에는 천적인 고양이가 들끓고 있지 않은가.
그 후 깊은 밤 병아리 비명 소리에 놀란 나는 한달음에 병아리를 가두었던 창고로 달려갔다. 고양이가 병아리 상자를 덮쳤고, 이에 놀란 병아리가 비명을 지른 것이다. 나는 주춤해 있는 고양이를 야단쳤다. 그 때 고양이의 눈을 보니 제가 가져온 것이니 도로 달라는 표정이었다. 식용으로 태어난 병아리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앞으로 병아리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 주려면 새로운 주인을 찾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앞 집 어린 학생에게 잘 길러 보라고 병아리를 먹이와 함께 주었다. 하지만 며칠도 안 돼 도저히 냄새 때문에 못 기르겠다며 도로 가져왔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짐승은 태어나면 시골로 보내라.’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그 후 날을 잡아 병아리와 사료를 한 포대 사서 차에 싣고 고향인 평택 형님 댁으로 내려갔다. 그간 병아리에 얽힌 자세한 사연을 말씀드리고 길러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형님은 쾌히 승낙하셨다.
그 일로 하여 이제껏 뜸했던 형제간에 잦은 왕래의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 뒤 형님 댁에 들를 적마다 자연스레 형님과 같이 우리 안의 장닭을 바라보며 지나간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 때마다 형님은 유별나게 사납고 덩치가 큰 장닭이 홰를 치며 새벽을 알리는 울음이 너무나 아름다워 이제껏 기르고 있다고 자랑을 하셨다.
그러시면서 그 옛날 시골의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향수를 느낄 수 있어서 더더욱 정이 들었다며 장닭에 대한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시다. 장닭은 보라는 듯 날갯죽지를 벌려 빳빳이 힘을 주고 형님 둘레를 빙빙 돌며 우람찬 소리로 ‘꾸꾸꾸’ 하며 기세를 부린다. 이제 장닭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지만 멀기만 했던 형제의 정을 이 같이 돈독히 이어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보이지 않는 영특한 고양이의 예지 때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