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늦가을의 문턱을 넘고, 초겨울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산천….
각양각색으로 제 몸을 태우던 낙엽, 한 잎 두 잎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새 서로의 거래는 무의미하게 끝나고 말았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순리이리라.
낭만의 여름 바다가 좋다고, 갈매기 나는 가을 바다를 꼭 보아야겠다고, 끊임없이 밀려가는 파도에 아픔의 찌꺼기까지 송두리째 띄워 보내리라고 북적대던 동해 바닷가.
열정의 뜨거운 입김으로 다가와 가슴 가슴에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파도,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끝나고 모두 다 떠나 버린 외로운 바닷가.
그래 나는 쓸쓸하고 적막한 초겨울 바다의 품에 안기리라. 아니 외로운 너를 내 가슴에 힘껏 품어 주리라 마음먹고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던 날 차에 몸을 실었다.
봄이면 꽃 피고 새 우는 저 계곡들, 그리고 풍만한 여름의 짙은 녹음, 그러나 지금은 벌써 단풍의 요정들도 모두 다 떠나고 을씨년스러운 빈 공간에 채워진 체념의 색채, 이 얼마나 고독한 자연의 아름다움이랴. 암울한 하늘의 회색빛 구름처럼 전신을 휘어 감고 누르던 내 마음의 고독은 그만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오묘한 대자연의 품에 취하고 말았다. 짙은 운무에 가리어 점점 시야가 짧아지는 대관령을 오른다. 방황하던 구름 조각은 차창에 부딪혀 힘없이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또 소생한다. 밖엔 벌써 어둠과 운무가 한데 어우러져 차창에 묻어 내린다. 순식간에 쏟아져 내리는 어둠, 어둠 속을 질주하며 얼마를 달렸을까, 강릉을 지나 드디어 나는 목적지인 낙산 해변에 도착했다.
반겨 주는 이 없는 낙산 해변에서 여장을 풀고 그냥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고독이 무엇일까? 추억이 무엇일까? 너는 누구이며 나는 누구일까? 지금의 이 시간이 나에게 남겨 주는 건 또 무엇일까? 끝없이 이어지는 파도처럼 되뇌면서 바닷가에 나선다.
철 잃은 비, 비 내리는 밤의 겨울 바다를 걸어야지. 거친 파도가 힘차게 밀려드는 겨울밤을 혼자서 걷고 싶은 외로운 충동이 일어났다. 허공만 비추는 바닷가의 가로등. 불빛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이 힘없이 모래밭에 주저앉는다. 모래밭의 내 발자국을 지우며 아우성으로 달려드는 망망대해의 저 파도, 내 삶의 상처까지 어쩜 흔적도 없이 몽땅 지워 버릴 듯 요란스레 내 가슴 벽을 친다. 내 발자국을 적시고는 말없이 물러서는 파도, 발자국을 적시고도 모자라 마음속까지도 흠뻑 적셔 버리는 파도. 어두운 모래사장에 우뚝 선 채 나는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한없이 맞으며 밤바다 저편으로 내 마음을 띄워 보내고 있다. 돌아올 줄 모르는 내 마음. 그냥 저편에 남겨 두고 돌아선 발길. 비틀거리는 걸음은 술 탓일까? 가눌 수 없는 외로운 마음일랑 백사장에 모조리 떨쳐 버리고 돌아가야지.
밤새워 객창을 두드리던 초겨울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웬일일까? 가벼워져야 할 마음 오히려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까닭은….
귀가 길은 한계령으로 정했다. 차는 구불구불 힘겹게 비 내리는 한적한 산 계곡을 감고 오른다. 얼마쯤 올랐을까? 기온이 뚝 떨어지며 빗방울이 멈추기 시작한다. 농무가 산허리를 가로질러 산등성이를 넘고 있다. 얼마 후 앙상한 가지가 희끗희끗 흰 빛을 띠기 시작하더니 높이 오를수록 흰 빛은 더욱 더 영롱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사랑의 미로에 빨려 드는 영혼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하는 계곡, 쭉쭉 뻗은 나무에도 가느다란 가지에도 이름 모를 풀잎에도 바위에도 새하얀 꽃이 피었다.
눈꽃이다! 눈꽃이다! 저 요염한 몸짓! 저 요염한 미소! 나는 무엇엔가 홀린 듯 차를 멈추었다. 내 가슴 속 깊게 잠들었던 꽃 이파리, 그 꽃 이파리가 바로 지금 내 앞에 황홀하게 피어나고 있지 않은가. 바람은 더더욱 세차게 불어 기온은 곤두박질치고 눈꽃은 점점 찬란히 부풀어 설국을 연상케 하는 이 오묘한 자연의 현상….
아득하던 날 사랑하던 사람과 이 곳을 넘던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초봄이었다. 진달래꽃 봉오리가 방실방실 미소를 짓던 때, 숲 속엔 산새들이 지저귀고, 암벽 사이를 맑은 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멈추었다가는 또 흐르고 아쉬운 듯 그렇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때 산 벚꽃이 만발하여 드문드문 물들였던 저 가지, 지금은 제 꽃잎이 아닌 허울의 꽃으로 운무가 달라붙어 제 꽃인 양 피어 있다.
그래 바로 이 대자연의 이치가 우리들의 삶의 이치와 일치하는 것이야. 메마른 마음의 가지엔 저렇듯 내가 아닌 네가 내 가슴을 짓밟고 너의 꽃을 피운다는 것을…. 우리는 저 눈꽃을 바라보며 배우게 되는 거야.
저 현란한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아래 시를 짓게 된다.
설화(雪花)
찬 하늘 떠돌던
외로움의 넋
산허리 칭칭 감고
희열의 꽃 피웠네
구릉 너머 구릉
봉우리마다 타던 불꽃
눈꽃으로 피었네.
순간 가슴을 엄습하는 쓸쓸함이 온몸을 싸고 돈다. 나는 찬바람에 새파랗게 식어 버린 두 입술을 꼭 다물고 말없이 차에 올랐다. 그래 저 아름다운 환상은 내가 아닌 바로 너야. 내가 아닌 바로 너지. 마음속으로 몇 번인가 뇌까리면서 나는 한계령을 넘어 따스하게 나를 맞이해 줄 서울을 향해 서서히 내리는 어둠을 뚫고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