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9일, 수교전 입국자 관련 법무부의 정책이 나오자 추방 위기에 놓인 ‘수교전 입국자’ 동포들은 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 모여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기자의 취재에 의하면, 그들은 거의가 삼십대 중반에 입국해서 17년간 체류하다보니 지금은 오십대 초반, 혹은 중반이 되었다. 그들은 거의가 중국에 삶의 기반이 없고, 귀국한다고 해도 새로 기반 닦을 능력과 힘도 없으며, 가정이 깨져 집에 반겨줄 사람이 없고, 죽도록 돈을 벌었지만 수중에 돈이 없고, 모국이 이미 제2의 고향이 되었기에 또다시 제3의 고향을 찾으라고 강박한다면 여기서 죽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편집자주]
“불법이다 보니 악순환이 계속 되는데…그래도 못 나가요”
허연단은 중국 흑룡강성 동포이다. 1992년 7월에 아는 분이 초청허가서를 해주어 5살 나는 아들을 떼놓고 입국하였다. 입국 후 안산공단에서 2년간 일했지만 한국인과의 임금 격차가 2배 이상이 나자 너무 억울해서 나왔다고 한다. 한국 사람과 같이 일하면 번마다 일찍 일어나서 저녁 늦게 까지 일을 해도 욕을 먹기 일쑤였다. 그후 그녀는 목욕탕에 들어가 떼밀이를 하면서 맛사지를 배웠다. 한 번은 평소 잘 지내던 단골아줌마들이 저들끼리 “저 아줌마는 교포래, 저런 교포들 때문에 한국 사람들 일자리가 잠식되지”하고 쑥닥거렸다. 그 말을 듣고 그녀는 이튿날 자리를 뜨고 말았다. 신고가 겁나서였다.
17년이면 돈 많이 벌었지 않았느냐, 고 기자가 물었다.
“다들 그렇게 말해요. 그러나 주위를 살펴보면 돈 번 사람은 없어요. 일하러 나가면 한국사람 눈치만 보면서 가슴 졸이지요. 교포라고 눈치 채고 신고할까봐 겁이 나서, 그러니 때론 한 달에 2번 이상 일자리를 옮겨 다녀야 해요. 일거리가 또 쉽게 나지나요, 때론 보름 넘게 놀 때가 많습니다. 단속에 들어갔다 하면 몇 달씩 집에 박혀 꼼작 않고 있지요. 게다가 애들 공부 시킨다, 시부모와나 친청부모 생활비 부쳐 보낸다, 셋집 잡아 집세 내고, 머 그렇게 2중 3중 생활을 하다보면 돈이 어디간지 없어요. 또 중국에서 친척이 온다하면 초청비 대주고, 오면 뒤를 봐줘야 하니 돈이 남겠어요?”
“게다가 임금체불이나 사기도 숱해 당했어요. 제만해도 그래요. 저의 단골손님중에 한 여사장님이 저와 각별히 친했는데 말 한마디라도 넘 고맙게 해줬어요. 한 번은 급하다면서 돈 20만원을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꽃가게도 있고 아파트도 있고 하니 저는 의심하지 않고 빌려줬지요. 그런데 후에도 김치공장 한다 80만, 식당 낸다 100만, 또 머 한다고 해서 꿔주었더니 나중에는 880만이나 빌려갔어요. 믿었기에 차용증도 안 썼어요. 그제야 이게 아니다, 싶어 저는 중국 들어간다는 이유로 차용증이라도 써달라고 했지요. 그리고 동생한테 차용증을 주며 돈을 받아오라고 했더니 그 사장은 입 싹 씻고 돈을 안 주겠다고 떼질 쓰는 것이었지요. 결국, 성남경찰서에 신고를 했지요. 그래도 사장은 ‘집에 돈이 없다’고 나누웠어요. 경찰서에서 그러더군요. 몇 억 원씩 못 받는 사람도 숱한데, 그냥 포기하는 것이 맘 편할 것이라고요. 제가 불법체류자라고 이용하는 줄 몰랐지요. 불법이다 보니 이제는 아들초청도 못해요. 불법체류자들한테 영원한 ‘이산가족’을 만드는 게 한국정부지요. 6.25때도 가족이 갈라져 생이별 하다가 2세들이 모국이라 찾아왔는데…, 요즘 남북도 이산가족 상봉이라고 1년에 두 세 번 씩 만남의 장을 갖게 하는데 우리는 이게 먼가요? 어릴 때 떼놓고 온 애들이 성장하여 결혼식 올리는 것도 못보고, 부모형제 세상 뜨는 것도 못보고, 정말 악순환에 악순환이 거듭 되네요. 내가 불법이면 나한테 죄 있지 왜 가족의 입국을 막고 있는지?”
그래도 그녀는 못 돌아간다. 돌아가면 집도 절도 없고 남편과 남남이 된지 오래다. 17년 세월이다. 무슨 사랑이 남아있을까. 그녀는 마치 자신이 빈껍데기만 남은 어미거미 같다고 한다. 죽으나 사나 여기서 살 수밖에 없다고 한다.
“17년간 영주권 바라고 기다렸는데…여기 사람 다 됐는데…”
이금순은 55세인데 중국 심양사람이다. 1991년 11월 14일에 친척초청을 받고 한국에 왔다. 2006년에 간병인으로 있다가 같은 병실 간병인 한국 아줌마의 신고로 잡혔다. 주인한테 600만 임금체불을 당해 소송 중에 있었기에 1첨만의 보증금을 내고 풀려나왔다. 5월 13일까지 체류 만료일이 되어 연장하러 갔다가 연장 못하고 돌아왔다. 이날은 마침 일본에 있다가 입국한 딸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어서 기분이, 좀 그랬다. 법무부에서 새로 문건이 내려왔다고 해서 연장하러 갔거나 호적신청을 하러 갔던 중국동포 여러 명이 감방에 들어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사과에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다음 월요일까지 집에 가라. 들어올 때 규제 안 하고 무연고동포 입국절차에 따라 시험 쳐서 들어오게 한다. 만약 잡으려면 우리는 핸드폰 위치 추적해서 한 두 시간에 잡을 수 있으니까.”하고 엄포를 놓았다.
간병하면서 임금은 자꾸 체불 당했다. 그래서 간병 못하겠다고 나누우니 주인양반이 “아줌마가 안 하면 우리 엄마(할머니)는 어쩌겠냐?”고 사정사정 했다. 체불임금도 200만원씩 넣어주었다. 그래도, 밀린 돈이 자꾸 불어나 600만원이 넘었다. 차용증이라도 써야 했다. 그런데 주인양반은 차용증을 쓸 때 이름은 자기 이름, 주소는 자기 아버지 주소를 써넣어 문제의 소지를 남겼다. 변호사한테 가니 불법체류자이기에 100% 돈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한다. 주인양반은 법원에 가서 거짓말을 했다. 자기가 그 돈을 갚으려고 몇 번이나 연락을 했는데 아줌마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고. 결국은 주인양반은 무죄가 되고, 주소를 써넣은 주인양반의 아버지가 유죄라는 판결을 했다고 한다. 그후, 또 그 집까지 찾아가 돈을 받으려고 하자 주인양반이 경찰을 부르겠다고 해서 불법체류라 도망 나왔고, 한 달 연장을 하고 또 찾아갔더니 할머니는 갖은 욕을 다하고 주인양반은 물건을 들어 머리 겨냥해 내리치려고 했다. 그래서 병신 되는 것보다 돈 안 받는 게 낫지 싶어, 또 변호사도 다시 상소해도 꼭 돈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해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당하면서 왜 돌아 안 가요?”하고 기자가 물었다.
“어떻게 가요? 개뿔이나 쥔 게 있나요? 이리 당하고 저리 쫓기고, 17년 동안 가슴 두근두근 거리며 산데다가 중국에 돈 다 부쳐 보내고, 때때로 일당 나가 몇 푼씩 벌어 들어오면 방세도 내기 힘든 상황이에요. 그래도 가정은 가정대로 다 깨지고, 거기 가면 내가 할 일이 먼 데요? 어떻게 살아요?…제가 공부 마치고 사회에 나온 시간이 34년인데 15년은 중국에서 보냈고 17년은 한국서 보냈어요. 삶의 기반이 여기에 있는데, 이제는 여기 사람 다 됐는데 쫓아내겠다고요?…5년 지나면 영주권을 준다는 소문 있더니, 또 10년 지나면 꼭 영주권을 준다고 해서, 속 타게 17년을 기다렸더니 이 꼴이네요. 이명박 정부 너무한 게 아닌가요? 중국동포 그리 미운가요?”하고 억울함을 발설한다.
“신랑은 종적 감춘지 오래고, 애들도 제 마끔 흩어져 살아요…”
중국 흑룡강의 목단강에서 살던 채순은 올해 쉰여섯이다. 1991년 10월에 친척초청을 받고 입국해 지금까지 건설현장에서 뛰었다.
그녀가 집을 떠날 때 큰애가 13살, 작은 애가 10살이었다. 또 삼촌이 일찍 돌아가 출생 5개월 나는 삼촌네 애도 키워야 했다. 그렇게 먹고 살기 힘들어 한국행을 택한 것이다. 정말 무지무지 힘든 세월이었다. 현장일은 너무너무 힘들고, 친척집에는 낯설어 갈 수 없고, 친구도 없고, 여자 한 몸으로 살다보니 이런저런 서러움 다 당하게 된다. 몇해 는 애들 생각나서 죽을 것만 같다. 그래서 시간당 5천원씩 하는 노래방에 찾아들어가 노래 크게 띠워놓고 엉엉 울며 직성을 풀고 나왔다.
2002년 그녀는 아파트 건설현장 6층에서 미장 데모도를 하다가 아스발이 무너져 추락변고를 당했다. 갈비뼈가 끊어지고 온몸이 성한 데가 없이 다쳤다. 회사에서 당시 입원치료비는 대주었지만 불법체류라는 이유로 기타 보상은 일절 해주지 않았다. 병원에서 혼자 침대 양 켠에 끈을 매고 겨우 일어나는 연습을 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운명을 탓했다. 후유증으로 몸에 담이 생겨 허리 다리 어디가 아프지 않는 데가 없었고, 당뇨병이 와서 눈이 어두워났다. 이제 성장한 애들도 제 마끔 중국 위해요, 해남도로 뿔뿔이 헤어졌고, 신랑은 종적을 감춘지가 오래다. 다행히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국에 나와 합법체류 하면서, 그녀를 도와주고 있어 위안이 좀 된다. 그런데 “이 몸을 해가지고 어떻게 살라고 중국에 돌아가라고 하는가?”고 그녀는 눈물을 훔쳤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