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차 나이가 들면서 나이만큼 늘어나는 게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약의 가짓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약의 종류도 가지가지로 늘어간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약,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약, 쇠약해진 기능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약, 그리고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 등등이 있다. 양약뿐 아니라 한약의 종류 또한 그 가짓수도 만만치 않다.
그 옛날 현대의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한약 및 민간요법으로 질병을 치료했고 아울러 건강을 유지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폐허로 변한 나라를 재건하던 시대인 60년대를 전후해서야 비로소 간단한 가정의 상비약으로 소화제나 찰과상에 바르는 머큐롬과 삔 데 바르던 요드와 종기에 붙이던 이명래 고약 정도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살림살이로는 이런 약품의 구입조차 힘겨워, 민간요법에 의존해 질병이나 상처를 치료하던 가정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내가 어려서 학질을 앓고 있을 때 어머님이 아침 일찍 나를 데리고 뒷동산 무덤에 올라 천지신명께 자식의 질병 완쾌를 기원하며 데굴데굴 뒹굴게 하던 기억도 난다.
배가 아프면 명치 끝 둘레 배를 지극한 어머님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으며 쾌유를 빌기도 했으며 때로는 소다나 식초를 먹이기도 했다. 급체는 손끝을 바늘로 따 주었고 간혹 무지몽매한 사람들은 구충제 대신 휘발유를 한 모금 마시게도 했다. 치통을 치료하기 위해 갓난아기 변을 헝겊에 싸서 팔팔 끓는 기름에 튀겨 아픈 이를 다스렸다. 곤충에 쏘이거나 물리면 된장을 발랐고, 피부에 난 찰과상에는 마른 쑥에 불을 붙여 상처 부위를 지지기도 했다. 이름 모를 중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는 날엔 굿도 벌였다.
이런 치료 방법 중에는 의학적으로 뒷받침되는 합리적인 치료법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소름끼치는 처방을 당연시하며 받아들였던 선조들의 민도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는 아내가 약을 넣어두는 서랍을 정리하다가 ‘여보’ 하고 부른다. 그 약 서랍은 연변에서 선물로 받았던 약을 넣어 두었던 서랍이다.
중국 연변을 10여 년에 걸쳐 35회 정도 방문하여 행사를 했으니 연변엔 문인, 언론인, 학자, 교수, 출판인 등 적지 않은 수의 지인과 인연을 맺고 있던 터다. 연변에 갈 때마다 금액으로 따졌을 땐 별 것 아니지만 그래도 때마다 정성스레 선물을 챙겨 가지고 가서 인사를 했으니 한두 번도 아니고 모른 체 받고만 앉아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뿐 아니라 한국에 들렀을 때에도 많은 분들을 만나고 접대를 했으니 더욱 마음에 걸렸을 게다. 성의껏 답례를 해야 하겠는데 생활필수품이나 공산품은 우리 것만 못하여 나에게 선물하기엔 부적합하였으니, 그 곳 분들이 내게 무엇을 선물할까 고심했던 건 당연했으리라.
초창기엔 모시나 참깨, 잣, 꿀 등 곡물, 혹은 술이나 차로 선물을 했으니 극구 사양도 했거니와 입국 절차상 까다롭다는 걸 연변 분들도 알게 되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모국의 많은 분들을 접촉하면서 한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보신에 유별나게 신경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주로 약을 선물로 주기 시작하였다. 그 가짓수만도 대단하다. 웅담, 상황버섯, 뇌심사향, 안궁우황환, 육미지향환, 우황청심환, 해구신, 해구환, 백사, 장뇌삼 등 이루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내가 선물을 주면서 ‘나는 일절 받지 않겠습니다.’ 라고 거절하지만 받는 분들 입장에선 그런다고 모른 체 시침을 떼고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연변을 드나들면서 거기에서 받아 온 선물들을 필요한 분들에게 나눠주고도 남아서 보관하고 있던 서랍이다.
“여보, 이것 봐요. 이게 무슨 약이죠?”
아내는 흔히 보지 못하던 약상자를 내 앞에 내민다. 중국에서 돌아와 이것저것 확인도 하지 않고 넣어두었던 약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약인데. 글쎄, 무슨 약일까?”
그냥 지나쳐가는 말투로 대답을 했다.
“당신이 모르는 약을 왜 서랍 속에 보관을 하고 있죠?”
약상자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와 묻는다.
“정 궁금하면 당신이 꺼내 확인해 보구려.”
나는 아내의 말이 귀찮다는 듯 매몰차게 내뱉었다.
“이 약 설명서에 이게 뭐야, 뭐? 방사 30분전에 복용하라는 것 같은데, 당신이 한 번 읽어 보구려.”
순간 나는 이 약이 어디에 쓰인다는 걸 직감했다. 그래도 모르는 척 ‘어디 이리 줘 봐요.’하고 약 상자를 받아 들고 사용법을 미천한 한문 실력으로나마 읽어 봤다. 의학적인 용어의 해독(解讀) 실력이 부족하여 확실한 용도는 잘 모르겠으나, 어림짐작으로 보아도 남자들 정력제임에는 틀림없었다.
약명이 양경조발왕(陽莖早勃王)이라고 한문으로 쓰여 있어 한 자 한 자 한문 글자를 풀이해 봐도 금세 알 수 있다.
“허어, 별 약을 다 선사했네. 나는 이런 것도 모르고 ‘선물 대단히 고맙습니다, 소중하게 쓰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겠지.”
멋쩍어진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정말 당신은 그 약을 누가 주었는지도 모르고 보관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아내가 다그쳐 묻는다.
“난 정말 모른다니까.”
모른다는 말로 우물우물 그 순간을 얼버무리고 더 이상 말없이 뒤돌아서 얼른 집안을 빠져나오며 가만히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 봤다. ‘틀림없이 그 때 그 아주머니였을 거야’ 혼자 뇌까리며 얼굴이 붉어져 오는 걸 느꼈다.
연변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연변작가협회 5기 문학상 행사를 마치고 뒤풀이 겸 상견례를 위한 젊은이들의 저녁 초대 초청을 받았다.
매일 끼니마다 기름에 튀기고 볶고 한 기름진 중국 전통 요리에 식상한 나는 색다른 음식을 먹자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만장일치로 합의를 본 음식이 개장국이었다. 개장국 하면 연변 조선족의 별미 음식이다. 개장국은 아마도 이북 식생활 문화가 중국의 연변까지 연결되어 생긴 음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연변의 개장국 거리는 그 규모 또한 그 곳 생활수준으로 보아도 상상할 수 없는 중소기업의 규모다. 언제 가보아도 손님들로 넘쳐난다. 원래 개장국은 조선족의 별미 음식이지만 지금은 한족 미식가도 즐겨 찾는 음식으로 자리 굳힘 해 간단다. 매일같이 이렇게 많이 죽어가는 개들은 과연 어디에서 다 공급될까 의아하게 생각도 해 본다.
일행은 음식점을 나와 이차로 노래방에 가기로 결정했다. 흥청망청 마시고 노는 노래방 또한 언제 봐도 만원이다. 노래방에 들어서자 일사천리로 맥주와 안주가 들어온다. 내가 연변에 와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내 옆엔 늘 여자를 앉힌다. 그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리모콘을 누른다. 선택하라는 지시에 따라 늘 두만강 뱃사공 노래를 즐겨 부르는 젊은 친구가 흥겹게 한 곡조 뽑아 댄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서 떠나간 그 님은 어디로 갔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젊은 아주머니에게 두만강 이야기를 했다.
“노래 가사에 두만강 물이 푸르다고 하기에 맨 처음 연변에 와 두만강물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푸르기는커녕 거무튀튀한 색깔로, 썩은 물처럼 보였습니다. 왜 그런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노래 가사에는 푸른 물이라고 했을까요?”
옆에 앉은 젊은 아주머니는 내 질문에는 관심도 없는 듯 자기 할 말만 내뱉는다.
“두만강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피눈물로 검붉게 물들어 흐르나 보지요.”
“그런데 왜 푸르다고 했을까요?”
“옛날처럼 다시 푸르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그랬겠지요.”
참으로 재치 있는 대답 같기도 하고 무언가 뜻이 서려 있는 내용 같기도 한 아주머니의 유머러스한 대답이다.
연변 대학 모 연구소에 근무한다는 옆자리의 아주머니에게, 오늘 들렀던 개장국 거리에서 소모되는 개의 숫자가 대단히 많을 텐데 그 많은 수의 개를 어디에서 공급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내 말을 듣고 아주머니는 선뜻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겠다며 아래와 같은 사실을 나에게 들려줬다.
“연변에 사는 조선족 치고 이북에 친인척 없는 가정이 별로 없을 정도로 서로는 밀접한 관계에 있지요. 저도 이북에 고모가 살고 계시며 밥을 굶고 지낸다는 소식에 간혹 이북을 찾아가 적지만 도움을 주기도 했어요. 또한 고모도 찾아와 도움을 청해 몇 번인가 도와도 주었지만 그렇게 몇 번 도와주는 걸로 해결이 나는 문제도 아니잖아요? 한도 끝도 없이 도와 달라고 손을 벌리니 난들 돈을 땅에서 캐내는 것도 아니고, 별다른 방법이 없지요. 월급은 쥐꼬리만 해가지고, 남편과 둘이서 번다고 해도 자식 공부시켜야지요, 살림살이하기에도 빠듯하니 더는 도와줄 수 없어 마지막으로 적지만 사업자금을 대 줘 개장사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밑천이랄 것도 못 되는 적은 액수지만, 여기서 1천위안은 한 달 치 월급 전액이며 이북에서는 이만한 돈이면 1년은 거뜬히 살고도 남을 거금입니다.
그 돈을 밑천 삼아 이북에서 개를 사 야밤을 틈타 두만강을 넘어 흑백 TV와 맞바꿔 가는 개 밀무역 장사를 시작했지요. 공공연하게 허가 없이 국경을 넘나들며 비밀로 하는 밀무역이랍니다.
한 번에 개 두 마리를 가져 와 커다란 흑백 TV 한 대와 조그만 흑백 TV 한 대, 도합 두 대와 맞바꾸는 물물교환이랍니다.
하루는 개 두 마리를 다른 날과 같이 주둥이와 네 다리를 새끼줄로 꽁꽁 묶어 한 마리는 등에 지고 한 마리는 자루에 담아 들고 두만강 가에 거의 도착을 했는데, 그만 들고 오던 개가 자루에서 탈출을 해 도망을 쳤어요. 몸무게가 무거운 개라 노약한 할머니로서는 들고 먼 길을 올 수가 없어 밤사이 자루가 닳아 찢어진 줄도 몰랐던 겁니다. 온 집안 식구의 생명 줄인 개가 야반도주를 했으니 고모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경비가 삼엄한 두만강 가에서 그래도 도망친 개를 찾아보겠다고 몇 시간을 어둠 속에서 강가를 개 마냥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큰 소리도 못 내고 목멘 듯한 작은 소리로 ‘워리! 워리!’ 하고 불러 보지만 혼비백산하여 도망친 개가 돌아올 리 만무했지요. 사지에서 탈출한 개가 ‘내 목숨 여기 있습니다.’ 하며 찾아올 리 없으니까요.
결국 잃어버린 개 한 마리는 영영 못 찾고, 메고 있던 개 한 마리만 가지고 두만강을 넘어 물물교환 장소로 가 전후사연을 이야기하고 선처를 바랐으나 약속을 어긴 죗값은 냉엄했습니다.
오히려 이쪽에서 신용에 씻을 수 없는 큰 피해를 봤다면서 조그만 흑백 TV 한 대만 주더랍니다. 신용을 못 지킨 죄로 무역자금을 모조리 뜯기고 만 거나 다름없지요. 그 후로 그만한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개 밀무역도 못 하게 된 고모는 그만 상심하여 병석에 드러눕게 되었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어찌나 이 이야기가 내 가슴을 찡하니 두드리던지 순간 눈가에 눈물이 핑 도는 듯 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어떻게 고모를 도와야 할 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내가 선생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 꼭 허락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뭔지 말해 보세요. 들어줄 만한 건이라면 들어주고 못 들어줄 건은 사양하는 게 예의가 아닐까요?”
“제가 설마 불한당같이 파렴치한 부탁이야 선생님께 드리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모르는 체 들어주어도 죄 될 일 아니니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연변에 오셔서 좋은 일을 하시는 선생님이 설마 다른 일이야 있겠어요? 좋아요. 선생님 부탁을 들어 주겠습니다.”
나는 곧 잠바 주머니를 뒤져 수첩을 꺼냈고, 수첩 갈피에서 미화 백 불을 꺼내 그 아주머니의 손에 쥐어 주며 이북에 계신 고모에게 꼭 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아주머니는 몇 차례 사양의 뜻을 비쳤으나, 내 의사가 너무나도 완강하여 그 이상은 거절하지 못하고 꼭 전해 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위와 같은 일이 있고 난 후 다음 해, 다시 연변을 방문했을 때 어떤 낯선 아주머니 한 분이 호텔 방으로 찾아왔다. 아주머니의 성함을 듣고 지난 해 노래방에서 내 옆에 앉았던 아주머니라는 걸 알았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이북의 고모가 고맙다는 인사말을 전해 달라고 해 이렇게 찾아 왔다며 거듭 고맙다는 뜻을 표하고, 약소한 선물이라며 조그마한 상자 하나를 슬그머니 탁자 위에 놓고 나간 게 아마도 ‘양경조발왕 (陽莖早勃王)’이란 약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일 년 만에 미화 백불이 비아그라가 되어 돌아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