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의 두견새
엄마 품을 떠나
정처 없이 떠돌아야 하는
머나먼 길, 외로운 길
엄마 품이 그리워
안으로 안으로 흐느껴 울다가
기어이 어둠 속에 토해 내고
토했다가
또 다시 안으로 안으로
그렇게도 모질게 되삼키며
만리장성 넘어
남향하여 가는 마음
북간도의 두견새도 구슬피 운다.
어떤 어린 학생이 북경 경제대학교에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어 등록을 포기하고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늦게나마 등록금을 마련해 주어 북경 가는 열차에 태워 보내고 쓴 시다. 그러나 그 학생은 여러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대학 등록을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재수를 결심하게 된다.
2001년 7월, 대학 등록을 하고 연락하기로 했던 향이로부터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리고 3개월 뒤, 발신지도 없는 편지가 왔다. 편지의 내용인 즉 ‘그럭저럭 커서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전 공부 잘 하는 것만이 불쌍한 엄마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덕분에 제 성적은 줄곧 앞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엄마한테 기쁨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입시에서 전 우리 진에서 1등으로 훈춘2고중에 입학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도 안 되겠는지 러시아에 장사를 가신다고 하더군요. 엄마는 집을 팔아서 아버지에게 7천위안 전액을 다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늘처럼 믿었던 아버지가 빚만 지고 다리가 상한 채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 때 제 손에 대학 합격통지서가 날아 들어온 겁니다. 남들은 합격통지서를 받으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지만 저는 합격통지서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입학금을 내려고 학교에 갔더니 제가 합격한 과에는 이미 다른 학생이 등록을 했고, 학교에서 나더러 동물의학과에 등록을 하라고 했습니다. 동물의학을 전공해서 어떻게 돈을 벌겠습니까? 학교를 다녀도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는데 어떻게 제가 살겠습니까? 또 다시 빚진 엄마한테 손을 내밀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저 혼자의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선생님, 등록금 고마웠습니다. 비록 학교는 안 다니지만 지금 북경에서 핸드폰을 파는 조그만 회사에 취직을 해서 핸드폰을 팔고 있습니다.’
9월 16일, 북경에서 첫 번째로 날아온 편지의 내용 중 일부분이다. 그 후에도 어린 나이에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면 종종 보내온 편지가 여러 통 더 있었다. 남들이 다 멋있는 옷을 사 입는데 멋있는 옷 한 벌이 없어, 이다음에 돈을 벌면 제일 먼저 엄마에게 예쁜 옷을 사 드리는 게 꿈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벅찬 하루 근무를 마치고 관광회사 사장이 되어 보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야간반 영어학원도 열심히 다닌다는 내용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일본어는 완벽하게 마스터했고, 영어회화만 정복하게 되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합쳐 4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몇 달을 북경 거리에서 방황하던 향이를 설득시켜 도문으로 돌려보내 향이가 다시 대학 입시를 위한 재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두만강 변방 도시인 도문의 향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2002년 3월 초순의 일이다. 전화로 자세한 이야기는 드릴 수 없지만 연변에 오게 되면 상의할 일이 있다는 전화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주고받지 않았지만 상의할 일이 무엇인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향이에게 내가 연변에 가서 만나 결정을 지을 때까지 꼭 책임지고 돌봐주라는 부탁을 끝으로 전화는 끝났다.
6월, 연변을 방문하여 맨 먼저 향이를 만나 그 동안 있었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연변의 3월은 여기 한국과는 다르게 영하의 날씨다. 다른 해와 달리 몹시 사나운 추위가 몰아치던 날 향이는 도문 시내에 볼일이 있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서게 되었다. 이른 아침의 찬바람에 미처 떨어지지 않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남아 있는 몇 개의 나뭇잎을 세차게 흔드는 한적한 거리,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골목길의 아파트 모퉁이 담벼락에 누더기 옷을 겹겹이 걸치고 산발한 머리에 시커먼 때가 덕지덕지 묻은 험악한 얼굴의 여자 걸인이 새까만 손을 내밀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무심히 지나치다가 순간 이상한 예감이 들어 그 걸인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밤새도록 살을 에는 추위에 시달린 어린 여자 걸인의 행색이 어찌나 측은하게 보였던지 가까이 다가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게 되었다. 그러나 그 걸인은 앞으로 내민 새까만 손을 덜덜 떨며 아무런 대답도 없이 두려운 시선으로 흘끔흘끔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푹 수그리더란다.
“너 이북에서 왔니?”
물어보아도 벙어리 흉내를 내며 아무런 대답이 없다.
“내가 너를 도와줄 터이니 자세히 얘기해 봐.”
설득을 해도 일절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여자 걸인의 행동을 자세히 살펴본 향이는 원래 걸인이 아닌, 이북에서 넘어온 어린 나이의 여자애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 여자애는 낯선 중국 땅에 와서 오갈 데 없는 처지로 신변에 위협까지 느끼는 두려운 마음과,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공포심으로 온몸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이처럼 처참한 곤경에 처해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그대로 거리에 버려두고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이 자신을 괴롭힌다. ‘만약 내가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는다면 이 어린 생명은 영원히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거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침 일찍 보려던 일을 취소하고 그 걸인 여자아이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침 일찍 볼일 때문에 집을 나섰던 딸이 난데없이 웬 거지를 데리고 집에 들어섰으니 향이의 어머니는 기겁을 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멀쩡한 어머니로서는 당연히 불호령을 내릴 것이 뻔하다. 만약에 내 집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이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이다. 도저히 우리 사회에서는 현실적으로 벌어질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어느 부모가 이 같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탈북자를 숨겨 주었다가 잡히는 날이면 숨겨주었던 당사자에게도 신체적 혹은 금전적으로 대단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슬기롭게 어머니를 설득시켜 오늘까지 조그만 아파트에서 함께 숙식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향이는 남들이 할 수 없는 훌륭한 일을 해 냈구나. 아마도 향이는 앞날에 축복이 가득할 거야.”
“제가 어려울 때 선생님이 도와 주셔서 이렇게 공부를 계속 하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의 고마웠던 마음을 생각하며 이런 결정을 내릴 마음이 생겨났답니다.”
“이 문제가 잘못될 경우 너도 화를 당할 터인데 걱정이 되는구나.”
“도문에는 아시는 분들도 많으니까 큰 걱정은 되지 않아요.”
소신 있게 처리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누군들 아는 사람이 없어 탈북자 문제로 고초를 겪겠는가. 어린 향이의 말을 듣고도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 전에도 향이는 입시 공부를 위해 밤잠을 쫓으려 마시던 커피 잔에 하루살이가 빠져 죽은 것을 보고, 하루도 편히 못 산 하루살이의 기구한 운명을 편지로 써 보내기도 했으며 때로는 단 하루를 살다가 떠나는 하루살이의 운명이 부럽기도 하다는 글로 보아 향이는 매우 정서적이며 몹시 힘들게 살았다는 흔적을 내비치기도 했다.
향이는 도문시 변두리 두만강가 양수진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훈춘시에 있는 훈춘 제2여고를 다닐 때는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학교에서 1,2등을 다투던 모범 학생이었다. 어머니는 양수진에 있는 조그만 병원의 간호원으로 근무하며 월급 6백위안의 수입으로 살림을 꾸려가며 향이를 공부시켰다. 근무처인 양수진의 병원은 말이 병원이지 제대로 된 의료기기가 하나도 없었으며 병실에 놓여 있는 환자 침대란 나무판을 댄 목침대 위에 두툼한 요를 올려놓고, 홑이불을 덮어씌운 게 전부였다. 도문시는 연변 자치주 내에서 가난한 시로 손꼽히는데, 그 도문시 중에서 또 가난하기로 소문난 게 양수진이다. 거기에도 영락없이 우리나라 교회는 세워져 있었으며 또 포교 활동도 매우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 이미 사회에서 버림받은 폐인이었으며, 오히려 극심한 행패로 가정생활에 걸림돌이 된 지 오래다. 어머니는 집도 없이 남의 집을 세내어 살림살이를 꾸리는 처지지만 친정집도 도우며 살아야 하는 가난한 가장이기도 하다.
이런 가정 형편인데도 향이는 사지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인간의 고통을 감싸 안았다. 믿음이 있어서도 아니요, 혈육으로서의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며, 앞날의 조그마한 명예를 꿈꾸어서도 아니다. 단지 순수한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음 날 도문으로 그 소녀를 만나러 갔다. 향이의 집은 사글세 아파트 3층이다. 극빈자들이 사는 아파트로 복도는 지저분했고 지저분하다 못해 으스스하기까지 하다. 집에 들어서자, 말이 아파트지 이건 아파트가 아니라, 딱 벌어졌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런 데서 어떻게 사느냐고 묻기도 쑥스러운 집이다. 바닥엔 너덜너덜한 비닐 천 같은 게 깔려 있고, 화장실은 문을 닫고 돌아서기도 어려울 정도의 좁은 공간이며, 물 값을 아끼려 방울방울 떨어지게 잠근 수도꼭지에서 양철통에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어찌나 조용한 공간을 강하게 흔드는지 섬뜩한 마음마저 든다. 허섭스레기나 보관할 것 같은 헛간 같은 좁은 부엌과, 방이라고는 두 명이 자기에도 빠듯한 넓이의 공간에 아무렇게나 둘러친 난방 쇠파이프가 벽면 아래쪽으로 노출되어 있다. 도배 대신 흰 페인트로 울퉁불퉁한 벽면을 발랐으며 그을은 벽면에 오려 붙인 퇴색한 여인의 달력 사진이 오히려 집안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채색해 놓는다.
그래도 작지만 방은 두 개다. 공부방에 가서, 향이가 이게 자기 책상이라고 알려 주는데 차마 네가 여기서 공부를 하느냐는 질문을 할 수도 없는 모양새다. 커다란 사과 궤짝 같은 나무 상자 위를 알록달록한 비닐로 덮어씌운 게 그나마 돋보인다. 책은 참고서도 별로 없이 교과서 몇 권뿐이다. 그래도 밤잠을 설쳐가며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북경 경제대학에 합격했다.
방에 쪼그려 앉아 있던 어린 아가씨는 나를 대면하자 두려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처음 마주치는 한국 사람이라는 공포심에 안색까지 변했다. 성장하면서 정신적으로 세뇌된 열일곱 살의 미성년자가 한국에서 온 나를 만나고 두렵지 않다면 오히려 그 말이 거짓일 거다.
이름을 물어보았지만 선뜻 대답이 없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자기는 이북 온성에서 돈도 벌 겸 도문에 계신 친척 고모를 찾아 왔다가 고모가 이사를 가는 바람에 친척도 못 찾고 거리의 공안이 무서워 오도 가도 못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실토한다.
“아가야, 네 이름이 현옥(가명)이라고 했지? 앞으로 내가 너를 끝까지 돌봐줄 터이니 여기 향이 언니하고 형제처럼 의지하며 살아가거라.” 현옥이는 고개를 숙인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언니는 지금 대학에 가기 위해 재수를 하고 있단다. 너도 이제 중국에 와서 살게 되었으니 오늘부터 언니에게 중국말을 열심히 배워 다른 생각일랑 말고 여기에서 향이하고 행복하게 살아라. 이렇게 다부지게 마음먹고 살아가는 게 내 도움에 대한 너의 보답이란다.”
2002년 8월 향이는 장춘에 있는 길림대학 전산학과에 합격해 장춘으로 떠났고, 곧이어 향이 어머니는 한국인과 결혼을 하여 한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일시에 고아 신세가 된 현옥이는, 향이의 소개로 부인이 한국으로 돈 벌러 떠난 가정에 한 달에 1백5십위안을 받는 식모로 취직을 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가정집 식모로 전전하며 떠돌았다.
그 동안에 수소문하여 고모를 찾게 되었지만, 만나 본 고모는 매우 싸늘했다. 오히려 내가 어려울 때 쓰라고 주었던 용돈과 식모살이로 근근이 모았던 돈을 집에 보내달라며 맡겼던 것까지 고모가 축내고 말았다. 그래도 탈북자의 신분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냥 서러울 뿐이다.
현옥이를 만나고 돌아온 지 두 달 가까이 되던 날 현옥이 한테 첫 편지가 왔다. 그 내용인 즉 아래와 같다.
‘중국에 오기 전엔 가서 친척의 도움을 받아 일자리를 찾아 돈 벌어 고생스럽게 살고 있는 부모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위험도 무릅쓰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생각했던 친척은 찾을 수 없고, 무서운 경찰 옆을 지날 때, 아 이젠 죽었구나,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며, 위험한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떠나온 길을 후회하며 숨죽이고 지냈어요.
낮에 내가 눈을 감는다고 대낮이 밤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데, 낮엔 빌어먹기도 하고 굶기도 하면서 열흘 동안 밤이면 건물 구석에서 밤을 새워 가며 처음으로 하늘을 믿어 보았어요. 찬 날씨에 잠을 설치면서도 두 손 모아 기도했어요. 아침이면 손발이 시리고, 따뜻한 집 생각이 나고, 그래도 지금은 그 때 제가 하늘에 기도한 덕분에 은인을 만나게 된 것 같아요.
열세 살 때 있었던 일입니다. 다른 해보다 눈이 많이 왔어요. 오십 년 사이에 제일 큰 눈이 왔던 날, 오십 리쯤 떨어진 곳에 가서 식량을 지고 오게 되었어요. 추운 날씨 때문에 더 힘겨웠지요. 아침에 떠나 걸어가다 보니 저녁이 다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답니다. 잔뜩 쌓인 눈길이라, 추운 겨울 몹시 지친 몸으로 저녁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는데 정말 놀라운 일이 펼쳐졌어요. 밤새 소리 없이 눈이 4백 미리나 온 겁니다. 전에 온 눈에 금방 온 눈까지 합쳐, 거기에 쌩쌩 불어오는 바람까지……. 정말 막막했어요. 그러나 한시 바삐 가야 하는 길이니 떠나야 했지요.
무거운 양식을 지고, 밤새 온 눈과 전에 쌓였던 눈이 바람에 날려 길을 막고 있는 상황에서 몹시 춥고 괴로웠던 그 때 고생을 어디 비하겠습니까.
그 때 고통 속에서도 울지도 못하고 지쳤을 때, 조용한 골짜기라도 들어가 잠자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가 쓰러지면 무얼 먹고 살까 싶었습니다. 한 치도 더는 갈 수 없다 했다가도 겨우겨우 헤치고 온 저는 지금 그 때의 고생을 바탕으로 지금과 앞을 살며, 그 때처럼 힘든 오늘을 이겨냅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을 더 받고 있는 지금, 오늘도 그 힘겨움 속에서 헤어 나오려고 무지 애쓰고 있는 겁니다.
공부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지금과 전에 알지 못했던 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약간은 알게 되었습니다. ……’
눈물 없인 읽어 내려갈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이런 무모한 시련을 주는 그런 사회가 존재한다면 과연 우리 인간은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할 지 아니면 부정해야 할 지 헛갈릴 수밖에 없게 된다.
도문에 거주하는 현옥이는 탈북자 색출 강화로 두려운 나날을 보낸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아무런 희망도 없이 쫓기고만 있는 도문에서의 생활이 현옥으로서는 더 두려웠을 것이다. 여러 차례 가택 수색으로 인하여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는 현옥의 전화 연락도 받게 되었다.
나는 현옥을 향이의 곁으로 보내는 게 그래도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향이는 길림 대학 기숙사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향이에게, 장춘에 조그만 아파트를 얻어줄 터이니 현옥이를 장춘으로 데려가 함께 살라고 부탁을 했다.
설령 아파트를 얻는다 해도 문제는 신분조사가 심한 기차를 타고 11시간이나 걸리는 장춘으로 현옥이를 데려가는 것이 큰 문제였다. 상의 끝에 현옥이를 장춘으로 데려가는 문제는 향이가 책임을 지기로 하고, 장춘에서의 나머지 일들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현옥이로부터 또 편지가 왔다.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른 곳보다 그래도 안전한 장춘으로 이사 가서 함께 살자는 향이의 부탁대로 떠날 수 없는 건, 앞날을 예측할 수 없고, 또 이 일로 하여 언니가 화를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탈북자 문제로 중국 정부가 극히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시기였다. 나이 어린 여자로서는 망망대해에 조각배를 띄우고 해협을 넘는 거나 마찬가지의 모험이다. 오도 가도 못하는 좁은 기차간에, 언제 공안이 신분조사를 할 지 모르는 위험한 길이다. 그러나 현옥이는 마음을 굳힌 듯, 내가 연변을 떠나던 날 향이와 현옥이는 나를 연변 비행장까지 마중을 하고 간단하게 이삿짐을 챙겨 그 날 밤 장춘 가는 기차를 탔다.
현옥은 이북 변방부대 대대장의 딸이었다. 탈북하는 과정은 아버지의 신분 때문에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현옥이의 위로는 언니가 두 명 있는데 시집을 갔으며, 이곳저곳 부대를 옮겨 다니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던 현옥은 공부도 제대로 못 했다.
정년으로 아버지는 제대를 하여 고향 마을에서 집단 영농 책임을 맡아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럭저럭 양식 걱정은 남들보다 덜 하는 편이다. 그래도 농사일을 망쳐 소득이 줄어들게 되면 끼니 걱정을 하게 된단다.
돈벌이를 위해 탈북한 어머니의 소식은 지난해에 알게 되어 전화통화도 하게 되었다고 현옥이로부터 전해 들었다. 탈북하여 중국에서 방황하던 어머니는 인신 매매단에 붙잡혀 길림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의 나이 많은 한족에게 팔려가 그런 대로 지내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도문에서의 일이었다. 새벽녘이면 쉴 날도 없이 먼 협동 농장으로 출퇴근하시는 아버지에게 자전거 한 대를 사드리는 게 소원이라는 현옥이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자전거 살 돈을 손에 꼭 쥐어줬다. 고향에 자전거를 사서 보낸 뒤 아버지마저 연락이 두절되었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이런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무사히 장춘으로 이사를 온 현옥이는 향이와 같이 대학 강의 시간에 들어가 함께 공부도 했으며, 한족 남학생들과 교제도 하고, 친한 남자 대학생을 가정교사로 모셔 중국어 공부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현옥이의 중국어 실력은 빠르게 늘었고 현실 적응도 빠른 속도로 진전되었다.
장춘에서 3년 동안 생활하며 현옥이는 중국어를 많이 깨우치게 되었고, 장춘 생활 후반기에는 미숙하나마 한족이 운영하는 점포에 점원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향이는 졸업을 앞두고 현장 실습으로 나갔던 일본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아예 취직이 되어 상해로 거처를 옮겨가게 되었고, 장춘에 홀로 남은 현옥이가 걱정되어 다시 상해로 현옥이를 데리고 갔다.
회사 일로 향이가 일본 오사카에 출장을 가 있는 동안 현옥이의 신변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2006년 3월 안식구와 느지막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불러 봐도 상대방으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잘 안 들립니까?’ 라고 큰 소리로 상대를 불렀다.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저 현옥이에요.’ 하며 모기 소리만한 작은 음성으로 울먹이며 말하는데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현옥아, 무슨 급한 일이 있니? 큰 소리로 말 좀 해 봐.”
다그쳐 물어봐도 흐느끼는 소리 뿐 말을 못 하고 있다. 잠시 후 숨넘어가는 소리로 대답한다.
“제가 죽는대요.”
그러고는 그녀는 또 말이 없다.
전화를 받던 나는 수저를 밥상 위에 얼른 내려놓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핸드폰에 귀를 더 바짝 들이댔다. 전화 통화 내용으로 보아 무언지는 모르지만 긴박한 상황이 벌어진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지금 병원 응급실인데 수술을 안 하면 죽는대요. 그런데 저는 탈북자고, 또 돈이 얼마가 들어갈 지도 모르는데 그만한 돈도 가진 게 없잖아요.”
이 말을 듣고 내가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 지 순간 혼란스러운 마음이 앞을 가려왔다.
장춘에 있을 때도 자주 몸이 아파 병원을 다녔다. 성장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 후에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게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향이가 일본에 출장을 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수술비야 얼마가 들든 중국의 아는 분에게 먼저 부탁을 하고 차후에 해결을 해 주면 되겠지만 큰 문제는 탈북자라는 신분이다.
“현옥아, 네 병명이 뭐라고 의사선생이 말하던?”
“제 병은 급성 장출혈인데 내장이 터졌대요. 그래서 곧 수술을 안 하면 위험하대요.”
그러면서 또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얼마가 들든 수술비는 내가 책임을 질 터이니 빨리 수술할 절차를 밟거라. 그리고 신원 문제는 네가 거주하고 있는 집주인에게 잘 부탁을 하고 후에 문제가 없도록 조심하고, 수술비가 얼마나 드는지 대충이라도 알아서 연락해 주기 바란다.”
착잡한 심정으로 현옥이와 전화를 끊었다.
“여보, 지금 전화 내용 들었지? 사람이 죽어간다는데 어떻게 하겠어. 얼마가 들든 우리가 책임을 져야할 것 같아.”
“내가 언제 당신 하는 일에 반대한 적 있어요? 하찮은 도둑고양이 생명도 불쌍해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를 해 주는데, 마땅히 우리가 도와줘야죠.”
아내의 이 말을 들은 나는 왈칵 눈물이 솟을 듯 가슴이 울렁여 오는 것을 느꼈다. 이역만리, 그것도 사지에서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한 여인의 피맺힌 절규를 누군들 모르는 척 뒤돌아설 수 있겠는가. 그래도 선뜻 응해준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현옥이는 어린 나이지만 앞으로 만나야 할 가족이 많다. 지금은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상해에서 한족이 운영하는 점포의 직원으로 월 2천위안을 받고 근무를 하고 있다. 2천위안이라고 하는 월급은 중국 사회에서는 적지 않은 금액이다. 훗날 만나게 될 가족들을 위해 착실히 월급을 저축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현옥이는 성공한 한 여인으로 중국 땅에서 떳떳하게 살 수는 있겠지만 늘 보이지 않는 공포의 사슬에서 영원히 벗어나지는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아픔의 순간들을 딛고 일어선 향이와 현옥이는 영원히 함께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시련을 극복하고 피어난 길가의 풀꽃처럼.
슬픈 교감 交感
산에 들에
지천으로 태어나
밟히고 찢기고 버림받고
이 곳에 태어남도
그건
나의 뜻이 아니었지
대대로 죽는 날 까지 한 곳에 뿌리 내려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려니
가엾은 나의 몸 짓밟고
모질은 바람아! 불지 말아 다오
꿈과 희망은 오로지
당신의 몫
다만
나의 뜻이 아닌 운명이었을 뿐이리니
간간이 풀벌레 찾아와
슬픈 노래 부르다가 떠나가고
이 곳에 태어남도
그건
나의 뜻은 아니었지
사랑스런 손길로 가만히
당신이 나를 안을 때
나는 그 순간 행복한 눈물짓고
발길 돌려 당신이 멀리 떠나고 나면
나는 다시
나의 외로운 길로 되돌아와 슬픈 눈물짓겠지
한 아름의 빈 하늘 가슴에 안고
풀벌레 슬피 노래 부르는 밤
나의 옷깃엔 어느 새
벅차게 넘쳐 내린 이슬 같은 눈물방울 맺혀
이곳에 태어남도
그건 그건
나의 뜻은 아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