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시인. 신화신문 논설위원)

‘외국에서는 변법을 하면서 피를 흘리지 않은 자가 없으니, 중국에서 변법으로 피를 흘릴 자는 나 담사동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1898년 9월 24일 체포되어 옥에 갇히기 전에 예언처럼 남긴 말이다.
당시 청나라는 많은 사회적인 모순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황실과 지배 귀족 관료계층은 부패했고, 아편전쟁 이후 제국주의 세력은 탐욕스럽게 중국대륙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 민중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이럴 때에 어둠 속의 등불처럼 나타난 사람이 담사동이다. 담사동은 호남성 유양 태생으로, 유년기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학대를 받고 자랐으나 장성하여서는 청나라 말기를 대표하는 정치가이며 사상가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많은 서적을 탐독하였는데, 특히 왕부지(王夫之) 등의 사상을 깊이 탐구하면서, 실증적인 학문에 눈뜨기 시작했다. 이것은 후에 변법유신을 제창한 그의 사상적 토대가 된다. 그의 자인 복생(復生), 장비(壯飛), 또는 화상중생(華相衆生) 등으로 불리는 그의 호, 이것의 의미를 앞뒤로 엮어보면 ‘웅장하게 날아서(壯飛), 꽃다운 모습의 민중(華相衆生)을 다시 살려보세(復生).’가 된다. 그의 일생을 압축한 말이다.
젊어서 그는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그때마다 낙방해야만 했다. 실력 있는 자가 공정하게 등용되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하북성에서 신강을 거쳐 대만 등 전국토를 유람하며 청조 통치의 부패상과 고통 받는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겠다는 큰 포부를 세웠다. 그 다짐으로 자신의 호를 '장비(壯飛)'라 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는 참패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강유위(康有爲)는 공거상서(公車上書: 선비들의 상서라는 뜻)'를 제출하며 변법유신운동을 주동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담사동은 호남지역에 유신의 바람을 일으켰다. 한편 그는 신사상을 심화시키기 위해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다니며 서양서적을 구입하였다. 자연과학을 깊이 탐구한 것도 이때이다. 이 시기에 그는 양계초(梁啓超) 등 유신파 인사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이로써 그는 변법유신의 신념을 더욱 확고히 굳혔다.
이후 그는 양문회(楊文會)와 불교에 대한 토론을 하며 마음 수양과 학문에 정진하여, 그의 대표 저작 <인학仁學>을 저술하였다. 세계의 존재와 발전은 세계 구성의 본체인 '인(仁)'의 작용에 따른다는 철학이다. 이 저서에서 그는 자연계와 인간사회 모든 것이 끝없이 변화 발전하는 것임을 확인하고, ‘하늘은 불변하며, 도(道)도 또한 불변한다.(天不變, 道亦不變)’며 강변하는 구사상을 비판하였다. 사회제도의 개혁과 변화를 시도하려는 선구자적 외침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민권과 평등을 주장하며 삼강오륜(三綱五倫)은 지배자가 기르는 ‘참혹한 재앙의 독초’라고 지적하였다. 그 바탕 위에 그는 청왕조 통치의 죄악을 폭로하고, ‘군주제 폐지, 민권 수립’을 주장하며 수구파의 반발에 단호하게 맞섰다.
1898년 6월 담사동은 변법을 선포한 광서제에게 천거되어 신정에 참여하였다. 서태후 일파는 정변을 준비하며 맞섰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담사동 등의 유신파는 군권을 쥐고 있던 원세개(袁世凱)를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원세개의 배신으로 유신파는 잔혹하게 제거되었다.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변법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담사동은 곧 체포되어 33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되었다. 이때 함께 처형된 사람들이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이다.
담사동이 처형된 지 이미 한 세기가 훨씬 지났다. 그리고 중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것이 그 발전의 에너지이다. 그러나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고양이’의 본질을 잃지 않는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쥐’는 민중의 고통이다. 민중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담사동, 그리고 그의 철학인 <인학仁學>, 그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상해 외탄의 동방명주처럼 찬란히 빛나야할 이유이다. 세계가 그 ‘동방명주’를 지켜보고 있다.
신화신문(한글판/02-868-4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