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토리(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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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토리(30~33)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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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 목사의 장편실화>
 

30. 뉴욕에서의 민주화운동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진로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의 시간을 미국에 건너올 때의 목표인 신학공부에 바칠 것인가, 아니면 민주화운동에 바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시달리고 있던 한국의 상황은 나로 하여금 민주화운동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결국 나는 85년부터 한국에 돌아오기 직전인 87년 말까지 약 3년 동안 뉴욕에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그 당시 한국의 상황은 80년대 초반의 침체기를 벗어나 민주화운동이 그 힘을 키워나갈 때였다. 이 때문에 미국 교포사회에서도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데모가 간간이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뉴욕영사관 앞에서 데모를 할 때 참가자가 20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수적으로 미미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뉴욕을 떠나기 전까지 반드시 영사관 앞 데모숫자를 1백명 이상으로 넘기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는 이 결심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2년 뒤 뉴욕 영사관 앞에서 개최된 데모에는 참가 숫자가 1백50명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1987년에는 미국교포사회에서도 한국의 민주화가 머지않아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졌는데, 4·13호헌조치가 나자 교포사회도 크게 낙심에 빠졌다. 그 당시 나는 뉴욕 한미일보의 논설위원이었는데 그 신문에 ‘지금은 실망할 때가 아닙니다’라는 글을 썼다. 이글은 당시 침체되었던 교포사회에 상당한 자극을 주었다.

 

호헌조치가 내려진 뒤 한국에서는 삭발, 단식 등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나는 미국에서도 한국을 지원하는 대대적인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워싱턴 D·C에 가서 워싱턴 민주화대행진을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워싱턴의 사람들은 한번도 5백 명 이상 모여본 적이 없을 뿐더러 대규모의 대회를 해본 적도 없어서 대행진과 같은 큰 시위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설득했다.

 

“지금 한국에서는 교수, 목사, 학생들을 가리지 않고 삭발과 단식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을 것 같다고 주저앉으면 조국이 위기를 맞았는데도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우리도 삭발이나 단식을 해서라도 힘을 모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나의 설득이 사람들을 움직여 여름 땡볕이 뜨겁게 내리 쬐는 의사당 층계에서 10여명의 목사님들이 3일간 단식농성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곳에 모인 목사님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농성이 교포사회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교포신문들이 앞 다투어 취재를 했고 그 다음 5월 10일 워싱턴백악관 앞에서 대대적인 교포들의 시위가 열렸다. 워싱턴의 한 민주단체와 정의평화민중연합 두 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였는데, 워싱턴 교포사회 사상 전무후무할 정도의 숫자인 1천명의 교포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그날 시위의 광경은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시위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고, 여섯 일곱 시간 자동차를 타고 와서 시위에 참가한 사람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은 공병우 할아버지가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시위에는 참가해야 한다’며 노구를 이끌고 오셨던 모습이다.

 

한 마디로 우리 민족의 엄청난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려울 때 하나로 뭉칠 수 있는 힘, 떠나온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생업도 뒤로 미룰 수 있는 조국애. 많은 사람들이 이 시위에 참여해서 목이 멘 목소리로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쳤고, ‘미국은 독재정권을 지원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때 나는 미국식 시민불복종운동을 실제 시위에 적용해 보았다. 미국에서는 데모를 하면 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설치한다. 그러면 시위대는 그 선 안쪽에서만 시위를 해야 하고, 만약 시위대가 폴리스 라인을 넘어서면 그 자리에서 연행되고 벌금을 물게 된다. 그런데 때로는 시위대들이 일부러 정치적 목적으로 법을 어기는 데, 이를 시민불복종 운동이라고 말한다.

우리도 이런 시위방법을 통해 시위의 효과를 증폭시켰다. 시위대가 한국대사관 앞까지 행진을 하고 거기서 몇 사람이 크로스 라인을 넘어서면 그 사람들이 연행되고 나중에 벌금을 내고 석방이 되었다. 이날 워싱턴시위는 미국 신문에 크게 보도되면서 미국사회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한국상황은 별로 호전되지 않았다. 나는 좀 더 큰 대규모 교포시위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다. 곧 이어 뉴욕에서 민주화 대행진을 제창하고 곧 바로 뉴욕 민주화대행진 준비작업에 돌입했다. 

 

뉴욕민주화대행진 준비위원회를 급조하고 내가 사무총장이 되어 6월 20일 뉴욕민주화대행진을 조직했는데, 이 시위에는 뉴욕교포사상 처음으로 3천명이 참가했다.

UN본부 앞에서 총영사관까지의 길거리를 시위대가 완전 점거했는데  그야말로 뉴욕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날의 시위는 뉴욕 3대 메이저 TV 채널의 톱뉴스가 되었다. 이날의 시위는 내가 뉴욕에서 펼친 3년 동안의 민주화운동의 총결산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미국 교포사회사상 최대 규모인 이 시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뒤 나의 대중노선이 성공을 거뒀다는 뿌듯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뉴욕에서 정의평화청년연합이라는 청년조직을 갖고 있었지만 전국적으로는 북미주 한인기독학자회의 총무 일도 하고 민주회복통일촉진 국민연합의 사무총장일도 하고 있었다.

대체로 북미주 민주화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셈인데, 민주화운동이 점점 커지면서 그러한 정도의 조직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민주국민협의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L.A, 시카고, 뉴욕, 워싱턴은 물론 샌프란시스코, 아틀란타, 시애틀, 보스톤 등 북미주의 10여개 도시를 총망라하는 시민운동 조직이었다.

 

그리고 북미주에서 100만불 정도의 돈을 모아서 한국에 보내는 일을 추진했다. 그런데 그 일을 진행하다가 6.29 선언이 나게 되어 결국 그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6.29 선언이 나온 것은 너무 기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한달만 늦었어도 북미주의 동포들이 조국을 위해 큰일을 했다는 보람과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 당시 북미주 동포들이 100만불을 모금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 이외에도 나는 ‘재일한국인 인권향상 국제캠페인’이라고 하는 국제조직을 만든 적이 있었다. 1986년의 일인데, 그 당시 재일한국인의 지문문제가 큰 사회문제가 되어 있었다.

나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협력을 얻어 재일한국인 인권향상을 위한 국제조직을 만들고 국제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단체의 사무총장을 맡아 제시잭슨 목사에게 우리의 뜻을 전하고 재일한국인 인권향상 국제캠페인에 공동의장이 되어 달라고 요청해서 그분의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재일한국인으로 이인화 목사님과 WCC총무를 공동의장으로 추대해 3사람의 공동의장을 갖는 세계적인 기구가 탄생했다.

 

그리고 각 도시에 연락해서 8월 15일 같은 시각에 전 세계 10개 도시에서 지문반대를 위한 공동시위를 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 제안에 호응해서 시애틀, 포틀랜드,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L.A, 토론토, 프랑크푸르트에서 반대시위가 이루어졌다. 제시잭슨 목사 일행은 한국에 들어갔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뒤 오사카의 한국인촌을 방문해 그곳의 재일동포들과 함께 지문날인 반대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행사는 지문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 기폭제의 역할을 했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 교포들이 자신과 같은 해외동포들의 아픔에 무척 민감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외동포들끼리의 유대가 얼마든지 강화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생각 또한 나중에 내가 경실련 국제부를 통해 한민족공동체 대회를 개최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나는 재일동포의 지문문제를 가지고 국제켐페인을 조직하기 위해 북미주를 돌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다시한번 체험했다. 그리고 이 일로 세계적인 인권목사인 제시잭슨 목사와도 깊은 친분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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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내가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70년대만 해도 반미정서가 심각하지 않았는데 80년 광주사태를 겪으면서 운동권 내에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서의 민주화운동은 무조건적인 반미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재미동포의 민주화 지원운동은 미국정부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도록 요구하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 국민의 생각과 민주화운동의 추진 상황을 정확하게 미국에 알려서 미국 정부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것이 국익에 이롭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한국 사람들은 흔히 모든 정치적 사건의 이면에는 미국의 음모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그것과 무척 다르다.

나는 미국이 ‘자기나라의 국익에 어느 쪽이 더 유리한갗를 좇아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실용적인 국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미국의 대한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실제로 한국 내의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높아지자 미국정부의 입장도 거기에 맞춰서 수정되는 것을 목격했고, 이런 미국의 모습을 보며 나의 확신은 더 굳어졌다.


한번은 뉴욕에서 내가 창립한 단체인 정의평화청년연합이 주최해서 솔라즈 하원의원(아시아태평양소위 위원장) 초청만찬을 열었던 적이 있다. 그때 솔라즈가 처음으로 한국의 핵 주둔을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솔라즈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정의평화청년연합이었다.

우리는 사전에 솔라즈 의원을 몇 차례 만나서 한국에 핵을 주둔시키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설명하고 그의 지지를 요청했었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솔라즈의원이 결국엔 ‘한반도 핵주둔 반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교포사회는 두 가지의 민주화운동 노선으로 갈라져 있었다. 하나는 서경석, 이신범의 실용주의 노선이었고 또 하나는 윤한봉의 반미 급진노선이었다.

윤한봉씨는 전에 민청학련 사건 때 같이 감옥에 간 데다 안양교도소에서 한방에 수감되어 생활했던 적도 있어서 잘 아는 사이였다. 윤한봉씨는 내가 미국에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밀항을 해서 미국에 왔는데, LA에 민족학교를 열고 교포 청년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는 나와 이신범씨와는 달리 제3세계 운동과 연대해서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북한에 대해서도 오랜 기간 동안 비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나는 윤한봉씨의 운동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다. 교포사회의 지지를 얻어내지 않으면 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미국의 정책을 바꾸려면 미국의 영향력 있는 중요인사들의 생각을 바꿔야지 급진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한두 명의 국회의원과 연대하는 것으로는 미국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끌던 정의평화청년연합에서 진보적 성향을 가진 몇몇 하원의원들을 두고 굳이 솔라즈 의원의 핵주둔 반대선언을 이끌어 내려고 했던 것도 솔라즈 의원이 갖는 미국 내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는 미국의 정책을 반대하는 것은 좋지만 미국에서 노골적인 반미운동을 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윤한봉은 광주사태의 충격 때문에 노골적인 반미운동을 폈고 국내의 반미운동과 연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미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나는 윤한봉씨와의 대립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목사안수도 이 때문에 늦어졌다. 나는 1985년 12월 15일에 부르클린 한인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는데 사실은 84년 프린스턴을 졸업하면서 목사고시에 합격했기 때문에 84년에 안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자신이 목사가 될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이를 1년 늦추었다. 그 즈음 내가 프린스턴신학교 시절 조직했던 청년동우회 회원 일부가 윤한봉 쪽으로 넘어가는 일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서로 감정적으로 상처를 입으면서 일부 후배들과의 반목의 골이 깊어졌다. 목사안수를 받으려니까 그 후배들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그 후배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풀고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다.  결국 이 상태로는 목사안수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해가 지난 후 용서할 자신이 생긴 다음에 비로소 목사안수를 받았다.


돌이켜 보면 윤한봉씨 그룹과의 대립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입장은 다르지만 서로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갈 수도 있었는데 내가 부족해서 노선차이 문제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했다. 윤한봉씨도 참 훌륭한 분인데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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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해외동포회의 보고서


6.29선언이 나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교포사회에서 해야 할 일은 사실상 끝이 난 셈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통일문제를 다루고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전에 문익환 목사님이 미국교포들을 향해 ‘해외동포들이 남북한의 중간에 서서 지렛대 역할을 해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계속 마음속에 담고 있었는데 마침 6.29 선언으로 통일운동에 주력할 수 있는 기회가 온 셈이었다.

 

우선 나는 친남한 인사와 친북한 인사를 가리지 않고 통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북미주 지역의 모든 인사들이 함께 참여하는 해외동포회의를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몇 차례 준비 모임을 거친 뒤 87년 11월 19일 뉴욕주 불빌에 있는 포레스트힐 수양관에서 ‘해외동포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미국, 캐나다, 독일 등지에서 온 1백여 명의 교포들이 참석했는데, 주요인사만 봐도 임창영 전 주미대사(북한에 몇차례 다녀온 적이 있고 김일성주석과도 친분이 있었던 친북인사), 이승만 목사, 김동수 박사 등의 인사들과 손명걸 등  민통연합 (북한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인사 등이 참석했다.

 

그리고 2박 3일간 ‘앞으로 해외동포들이 통일운동을 위해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인갗에 대해 논의한 뒤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는 ‘해외동포회의 보고서’라는 문건을 채택했다. 말하자면 북미주의 통일문제에 관심 있는 거의 모든 인사들이 다 모여서 통일문제에 대해 회의를 한 뒤 각각의 입장을 한 데 모아 하나의 문서를 통과시킨 것이다.

문서의 작성은 내가 했는데, 남북 양쪽 경향의 인사들이 모두 참석했던 회의의 결과물인 만큼 이 보고서는 남북한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정하고 타당성 있는, 실현가능한 제3의 목소리라는 평을 들었다.

 

해외동포회의보고서는 크게 ‘통일을 다루는 우리의 자세’, ‘남북통일 방안에 대해서’, ‘반핵, 군축, 미군철수문제’,‘남북대화에 대하여’, ‘해외동포북한방문문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된 내용은 ‘해외동포들이 분단선상에 서서 지렛대 역할을 해야 하며, 그래서 남과 북을 향해 시시비비를 가리고 공정한 제삼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보고서는 나중에 국내 통일운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엔 남북한의 유엔가입 문제가 이슈가 되었을 때인데, 남북한의 주장을 절충하는 제3의 안을 제시했다.

당시 유엔가입에 대해서 남한은 동시가입을 주장하고 있었고, 북한은 연방제 통일을 한 뒤 단일국가로 가입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었는데, 해외동포보고서는 이 두 가지 안을 절충하여 1국가 동시가입이라는 안을 내놓은 것이다.

말하자면 형식상으로는 1국이지만 내용상으로는 2개의 국가가 함께 가입을 해서 의견이 갈릴 때는 기권을 하고 의견이 모아질 때는 찬성, 같이 반대할 때는 반대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나중에 문익환 목사님께서 이 해외동포보고서를 읽으시고 높은 평가를 하셨는데, 그런 까닭에서인지 나중에 북한이 해외동포보고서의 내용처럼 남북한 유엔가입을 ‘1국가 동시 가입안’으로 수정하였다. 

 

아마도 문익환 목사님이 북한에 가셨을 때 김일성주석에게 이 보고서를 보여주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남북한 관계가 항상 그렇듯이 이것이 빌미가 되어 남한정부는 오히려 해외동포보고서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단순한 반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해외동포보고서의 주장이 불온하고 잘못된 주장인 것처럼 남한 사회에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해외동포보고서가 제시한 통일방안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해외동포회의를 하면서 ‘남북한이 열심히 노력만 하면 서로 생각이 다르다 해도 하나의 의견을 모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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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김대중 씨와의 인연


해외동포회의를 마쳤을 즈음 한국은 대통령선거 국면을 맞고 있었다. 87년 6.29선언으로 김대중씨가 복권된 뒤 김영삼, 김대중씨가 갈라져서 각각 대통령 출마를 선언함에 따라 한국의 운동권은 ‘후보단일화론’, ‘비판적지지론’, ‘독자후보론’의 3파로 나뉘어져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나는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세 정파의 이전투구 현장에 휘말리지 않았지만, 미국 교포사회도 심심치 않게 이러한 입장차이로 반목하고 있었다.

 

나는 구태여 말하자면 ‘후보단일화론’의 입장에 서 있었던 셈인다. 그렇다고 김영삼씨 지지를 전제로 한 ‘후보단일화’가 아니라 누구건 한 사람으로 단일화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사회운동은 가급적 정당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갖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보단일화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후에는 마음 속으로 김대중씨를 지지했다. 

 

나는 이전에 김대중씨와 두번의 인연을 갖고 있었다. 한번은 대학졸업 직후인 71년 대통령선거 때 공명선거감시단을 조직화하는 일을 통해 사실상 김대중 후보 지지운동을 펼쳤었다.

미국에 온 후인 85년에도 김대중선생 귀국환송 준비위원회 사무국장 일을 했었다. 그 당시 김대중씨는 미국에 와서 워싱턴 D.C에 있었는데, 86년경에 귀국을 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김대중씨가 귀국하면 한국에서 탄압 당할 위험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김대중씨로서는 사지(死地)로 가는 셈이었다. 그래서 교포사회는 김대중씨가 한국에 가서 큰 문제를 겪지 않게 하려면 귀국환송행사를 크게 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 때문에 뉴욕의 민주화 인사들이 뉴욕의 메디슨스퀘어 가든에서 김대중선생 귀국환송대회를 갖기로 결정했는데 내가 그 작업을 책임지는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다. 

 

나는 당시 김대중씨를 돕는 것이 곧 민주화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제안을 수락하고 환송행사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3개월 동안 그야말로 죽도록 일을 해서 행사를 치렀는데, 그 과정에서 너무 과로하여 쓰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행사는 성공적으로 개최되어 3천2백명의 교포가 참석했다. 그 당시 시위에 참여하는 교포들의 수가 많아야 수십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인원동원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87년 말 내가 귀국을 한다고 하자 김대중씨는 기독교쪽에 ‘서경석 목사가 자기와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치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제안에 응하지 않았었다. 


87년 12월 17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내의 여러 지인들이 대통령 선거 전에 귀국해서 이런저런 일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해왔지만 나는 대통령선거 시기에 내가 국내에서 할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선거가 끝난 뒤인 12월 25일에야 귀국길에 올랐다.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뒤에도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대개 외국에서 귀국할 때에는 국내에서 할 일을 미리 정하고 돌아오지만, 나는 일단 귀국하면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어떤 것이건 간에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해서 할 일을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데 LA에서 연말을 보내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 YMCA 강문규 총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서목사가 기사연 원장(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을 맡아줘야겠어”

느닷없는 제안을 듣고 내가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그 당시 손학규 원장이 외국유학을 떠나면서 기사연 원장자리가 공석이 되었는데, 마땅한 원장후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사회 결정이 이미 났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1월 2일 한국에 도착해서, 이틀 뒤인 4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나는 기사연 원장 취임요청을 수락하고 난 뒤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이때 일본에서 후배인 김경남목사를 잠시 만났다. 김경남은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유학을 가서 박사가 돼서 교수가 되더라도 절대로 NCC총무가 되지는 말라’며 뼈아픈 말을 했던 후배였다.

김경남의 집에서 하루를 묵으며 나는 경남이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한데, 네 의견은 어떠냐? 내가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성공할 가능성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러자 경남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간곡한 어조로 이렇게 조언했다.

“내 생각도 형님과 같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가서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애들한테는 무조건 ‘내가 아는 게 뭐가 있냐. 니들한테 배워야지’라고 말하고 절대로 나서지 마십시오. 특히 ‘사회주의혁명은 안 된다’는 말은 절대로 입에 담지 마십시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도 ‘그러마’고 말했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지냈으니 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후배들 이야기를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한국의 각 정파가 벌이는 사구체 논쟁의 폐해를 익히 들어온 터여서 당분간 관망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결심에도 불구하고 기사연 원장 재임 1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후배들과 심각한 마찰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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