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루에서 한 시간쯤 머물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저문 녘에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울은 날씨가 맑은 데 이곳은 물기 머금은 구름이 하늘에서 맞물리고 엇갈리고 피어나고...
우리 일행은 승용차에 앉아 씨인제에코오(新街口)로 향했다. 네온등 부연 거리에 가랑비가 제법이었다. 무슨 호텔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일행은 무작정 대문으로 뛰어들었다. 2층은 몇 개의 큰 룸으로 되어 있었는데, 가운데 룸에 연회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2007년 중국남경국제매화절 및 중국민속보호와 여유(旅遊)발전논단/초대만연(招待晩宴)”
초대측은 남경시정부와 남경시국제매화절추비위원회였다. 미국, 프랑스, 영국, 호주 등지의 외국인과 당지 인사들이 초대되었다. 한국 여행업계 관련 대표단 일행은 내일이라야 도착한단다.
우리 기자단은 주 연회상과 가까운 왼쪽에 앉았다.
나는 장원루에서 딸애 순희와 만나 연회장으로 동행하였다. 딸애는 남경에서 나와 이런 날에,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을 너무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남경에 오게요?”
딸애는 이 말을 몇 번 반복했다.
그랬다. 내가 어떻게 남경을 가게 되었는가? 그것도 나의 생일날에, 그리고 나는 이 밤 이런 연회에 초대된 것이다. 또 딸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내가 생각해도 신기해었다. 우연이 필연이 된다는 말이 맞는 듯싶다.
“괜찮습니다, 예”
“그래? 그래도 국제성적 연회인데? 허허.”
“히, 아버진?…”
딸애는 금시 입을 비쭉 내밀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아마 그런가 보다. 그들 눈에는 뭐가 대단하고 뭐가 좋은 것인지? 나는 가끔 딸애한테 진한 세대 차이를 느낀다.
연회에는 남경시정부 여유국 정 부국장과 여유개발처 왕 처장을 비롯 실무자들이 참석하였다. 별로 좋은 디지털카메라가 아니지만 나는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다.
우리의 단장 조명권 사장이 중앙 연회상에 자리를 옮겨 앉아 그와 남경시정부의 끈끈한 인연을 실감케 하였다.
우리는 가끔 건배를 하면서 얘기를 주고받았다. 남경시여유개발처 왕 처장이 바로 내 곁에 앉아있었다. 딸애가 남경농업대학 경재학부에서 회계사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자 자못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족이란 얘기 안했으니까. 중국말이 너무 표준적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웃었다. 실제로 매화절 개막식은 어제 매화산에서 개최하였다고 한다.
유엔의 무슨 학교의 흑인교장과 싱가포르 여유국 국장(여)이 나와서 발언을 하였다.
나는 참지 못하고 오늘이 생일날이란 말을 하였다. 와인은 연태산(産)이었다. 잔을 들고 모두가 일어나 건배를 하였다. 한국식으로 “위하여”가 터져 나오자 장내시선은 우리 쪽으로 쏠리었다. 호텔지배인이 와서 또 잔에 와인을 부었다…
이 몇 해 간 나는 둥지 떠난 기러기의 외로움에 젖어있었다. 글로벌 삶속에 예전의 가족적인 안온함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가 되었고, 아련한 옛 추억으로만 남은 것이다. 와이프는 직업 버리기 아까워 고향에서 혼자 빈방 지키면서 탈탈거리며 직장 다니고 있고, 딸애는 머나먼 이곳 강남까지 와서 대학공부를 하고 있고, 나는 나대로 서울 셋집 하나 얻어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었다.
나는 가끔 이렇게 묻는다.
“내가 무얼 위해 이렇게 하고 있지?”
꿈은 없는 것 같다. 그냥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자기가 좋아하는 사업을 위해, 그리고 공익을 위한 사업에 바삐 도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꽤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혼신을 다해 내가 맡고 있는 인터넷뉴스, 우리 ‘동북아신문’을 잘 꾸려 보고 싶다. 어차피 동포들을 위한 일이고 이 사회를 위한 일이니까! 그리고 내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이것도 꿈일까?
“외롭다?…그래, 외로워도 방법이 없지…요즘 시대에는 다 그렇게 사니까!”
나는 그렇게 자기를 위로해 본다.
한국에는 ‘기러가 아빠’란 신조어가 나온 지도 너무 오래다. 중국에서도 이제는 그런 급변시대가 대두한 것이다. 금년 설 기간 유동인구만 봐도 그렇다. 중국 정부 당국은 올해 전국의 철도와 고속도로, 항공로를 이용한 춘절 귀성객들의 이동 규모는 모두 18억 9천만 명으로 지난해 춘절의 18억 3천만 명에 비해 6천만 명 정도 증가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개혁개방 후, 농촌인구가 대량으로 시내로 흘러들어오고 동서지방의 유동인구가 급격히 불어나고 있는 셈이다. 마치 거대한 인구소용돌이가 중국대륙에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빚어지는 불온한 치안과 개개인의 고충과 아픔들도 이제는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행복추구에 대한 중국인들의 집념을 막을 수 없었다...
예전에, 농촌인구가 시내에 들어오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들었다. 자식들이 대학이나 군에 가야만 도시인으로 될 길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호구(戶口)를 떼서 시내에 부칠 수 있었다. 농촌사람이냐 도시인이냐, 의 관건은 역시 호구였다. 그러니 호구가 오래 동안 중국인들의 유동을 통제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해 주는 도시, 그곳에서 생활하는 도시인은 농촌사람들의 선망 대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장벽이 뚫리어졌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재간 있고 돈 있는 농촌사람들은 시내에 들어와 호구를 부치고 버젓이 아파트를 사고 사무실을 내고 장사를 하고, 그것이 안 되면 직장이나 공장에 다니며 돈을 벌고…
그러나, 돈 없고 재간 없는 농촌사람들에게는 호구제가 의연히 높은 장벽이었다. 도시에 들어와 자녀교육을 시키거나 병을 보이거나 하자면 도시인들보다 돈을 더 많이 내야한다. 이런저런 생활상의 애로도 많이 있다. 그래도 농촌사람들은 끝없이 도시로 밀려든다.…
그래서 시내사람 농촌사람 할 것 없이 도시화가 되고 글로벌화가 되어 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시대상이고 현실인 것이다. 가족과의 대화를 잃어가고 정을 잃어가고 제 마끔의 환경에서 고독한 삶과 더불어 인간의 진한 모습을 잃어가게 되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화와 인간세계 본연의 지킴은 분리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 내리는 씬제에코오(新街口)를 택시는 빠져나가고 있었다.
딸애와 이런 시각 이렇게 택시에 앉아 보기는 처음이다. 감회가 남달랐다. 택시는 시십분 쯤 달려서야 위이가앙(衛崗)에 있는 남경농업대학에 도착했다.
나는 딸애를 가슴에 품어주었다. 평소 나는 딸애를 한 번도 안아주지 못했었다.(다 자라서.)
약간 어색해 하는 딸애의 몸짓이 알려왔다.
“됐어요. 히히…빨리 가요, 이젠. 도착하면 꼭 전화해요.”
딸애는 나를 살짝 밀쳐냈다.
나는 정말 딸애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따뜻히, 오래도록 품어주고 싶었다. 아빠로서 경솔했던 과거를 용서받고 더 진한 정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허허 웃으면서 이내 풀어주고 말았었다.
연민과 애틋한 부애가 내 가슴을 허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