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정마을 고려인 주민들이 부르는 삶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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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정마을 고려인 주민들이 부르는 삶의 노래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6.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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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혜경(mellow8135) 기자   

모든 사람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고향. 때로는 뭉클한 기억으로, 때로는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고향은 늘 어머니의 품과 같이 든든하고도 훈훈한 정이 넘치는 곳일 것이다. KBS <6시 내고향> '백년가약' 97호로 결정된 러시아 우정마을. 그곳에 처음 발을 내딛었을 때, 과연 우리 고향의 향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찾아간 우정마을.

그러나 이내 그곳의 주민들도 바로 우리의 부모님과 같은 모습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우정마을 주민들의 희망의 노래 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다.

▲ 한 빅토르 대가족
ⓒ 최광호

전통적인 한국 가정의 모습을 담아가고 있는, 한 빅토르 대가족

'새마을로'라는 표지판을 따라 찾아간 곳은 한 빅토르 아저씨네 집이었다. 낯선 제작진의 모습에 문을 열어주던 두 아이는 수줍은 듯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빠끔히 고개를 내밀어 바라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 가정, 한 빅토르 아저씨의 가족은 총 8명이다. 이젠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대가족이다. 한 빅토르 아저씨의 부인인 율라 아주머니와 둘째 딸인 비까, 사위 유리, 손녀 이라, 손자 샤샤와 작은 아들인 세르게이와 며느리 이리나까지 총 3대가 한 집에서 살아가고 있다.

2년 전,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이들 가족은 토마토, 고추 등 하우스 농사를 수입으로 살고 있었는데 아침이면 대가족이 함께 일터로 나가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제작진과 이야기를 나눴던 작은 딸 비까는 수줍음이 많으면서도 가정을 이끌고 있는 당찬 모습이 엿보였다. 유창한 한국어와 연신 환한 웃음으로 대하던 비까에게 소원이 무어냐고 묻자, 옆에 있던 남편을 바라보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일을 하다 한 쪽 눈이 다쳐 실명 위기에 처해 있는 남편 유라. 돈을 많이 벌어 한국에서 남편의 눈을 치료해 주고 싶다고 말하는 비까의 목소리는 떨려 있었다. 그러나 이내 웃음을 띠는 비까의 모습 속에 힘들게 살아온 지난 모습이 엿보였다.

오랜 시간 취재를 마치고 자리를 뜨는 제작진에게 유라가 라일락을 선물하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강하게 퍼져 나가는 향이 어느 값비싼 향수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유라의 맑은 눈이 하루 빨리 나을 수 있기를, 비까의 웃음이 늘 지속될 수 있기를, 두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늘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이 대가족의 저녁 시간은 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기를, 방 안 가득 퍼지는 라일락 향만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 우정마을 아주머니들(가장 왼쪽이 갈리 아주머니)
ⓒ 최광호
화투치기를 즐기고 반찬 걱정을 하는 전형적인 한국 아주머니, 갈리

매우 능통한 한국어로 제작진의 취재 기간 동안 동행했던 갈리 아주머니. 호탕한 웃음과 구수한 입담으로 우정마을의 부녀회장이나 다름없는 갈리 아주머니의 집을 찾았다.

집 안을 들어서자 우정마을 청국장 제조의 총 책임자답게 잘 발효된 청국장 냄새가 퍼졌다. 그래서 그런지 갈리 아주머니의 말씀은 구수함이 가득했다.

카자흐스탄에서 5년 전에 온 아주머니는 여느 한국 주부와 같이 반찬 걱정과 남편, 자녀들 걱정이 가득했다. 특히,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큰 아들에 대한 걱정이 많은 듯 했다. 우리나라 나이로 27살인 아들에게 좋은 여자가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는 애교 섞인 말씀도 놓치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 취재를 했을 무렵, 갈리 아주머니가 화투를 가지고 왔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제작진을 향해 화투를 잘 친다고 자랑하며 웃는 갈리 아주머니의 모습이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았다.

화투를 들고 서둘러 찾아간 곳은 건너편에 위치한 박니나 아주머니 댁. 이미 그 곳은 4명의 아주머니들이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카자흐스탄에서부터 가끔씩 모여 화투를 즐긴다는 갈리, 박니나, 김익사나, 나시쟈, 에밀리야 아주머니였다. 러시아어와 한국어가 교차 편집되는 듯 들렸고, 웃음과 탄성이 집 안을 넘어 마을 가득 흘렀다.

우정마을 아주머니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긴 시간 나에게 웃음을 주었다.

▲ 나타샤(좌)와 나시쟈(우) 자매
ⓒ 최광호

청국장과 같이 구수함이 묻어나는 자매, 나따샤와 나시쟈

어머니의 땅, 연해주로 다시 돌아온 이들은 대부분 가족이나 친척들과 함께 온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 나따샤와 나시쟈 자매는 우정마을에서 청국장 제조를 가장 오래한 '모범' 가정으로 꼽히고 있다.

서툰 한국말 속에 늘어놓는 농담이 마치 우리네 이모 같은 느낌을 주는 나따샤와 나시쟈 자매는 늘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다. 답사 첫날부터 자신의 청국장이 가장 맛있다고 자랑하는 나시쟈 아주머니, 바로 그 집을 찾았다.

집 앞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역시 나무 틀 안에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자연 건조를 시키고 있는 청국장이었다. 청국장 맛을 보라며 건네주는 자매의 모습에 구수함이 배어 있는 듯 했다.

사실 처음 청국장 만들기 시작했을 때에 나시쟈의 집에는 얼씬도 못했다는 언니 나타샤. 그만큼 청국장의 강한 냄새에 적응을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자매의 청국장에 대한 사랑은 막상막하로 변했다.

청국장을 먹고 화장실에 가기 편해진 것은 물론, 몸이 좋아진 것 같다며 청국장 애찬론을 펼치는 동생 나시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혈압이 낮아지고 살도 빠졌다며 말하는 언니 나타샤의 청국장 예찬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집 안에 퍼지는 청국장 냄새로 고향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을 무렵, 내 손에는 자매가 만든 청국장 환이 들려있었다. 건강을 챙긴 것은 물론, 가족의 사랑까지 전해준 청국장이 고맙다고 말하는 자매의 모습 속에 구수함이 가득했다.



우정마을 주민들에게 전하는 편지

송 슬라바, 강 아나스타시야, 에밀리야, 유 이골, 고 에밀리야, 유 인나, 김 악사나, 한 빅토르, 율라, 비까, 유리, 이라, 샤샤, 셰르게이, 이리나, 한 뾰뜨르, 한 나딸리야, 박 니나, 김 갈랴, 김 아나똘리, 지마, 꼴랴, 강 발레리, 고 아나똘리, 김 볘녜라, 이 나딸리야, 김 슬라바, 박 세르게이, 루직, 송 보바, 라직, 김 니꼴라이 등 그 외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우리 동포들.

모두 제작진의 기억 속에 그리고 가슴 속에 영원히 남도록 취재와 촬영 기간 내내 늘 밝은 웃음으로 대하던 우정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우리, 한민족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고국, 한국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들이지만 한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는 그들, 청국장을 만들면서 한국을 그려본다는 그들, 서툰 한글을 한 자 한 자 배우며 한국을 되새긴다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진정, 한민족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재한유학생네트워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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