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의 사랑하는 딸
상태바
나와 나의 사랑하는 딸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6.05.15 00:00
  • 댓글 0


기자: [admin] 래원: [길림신문

○  (연길) 류성근

금년 설을 일주일가량 앞두고 한국 KBS사회교육방송국 손씨에게서 뜻밖에 전화가 왔다. 설 이튿날 딸이 부모님한테 보내는 글을 방송한다는것이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소식이다. 이번 설도 딸과 함께 못 쇤다는 허전함에 못내 서운하더니 딸이 어떻게 이런 기발한 착상을 했을가. 그저 딸이 대단하다는 생각과 이젠 단 하나인 딸만을 위해 살고 딸만을 믿고 살겠다는 가슴 뿌듯한 자호감에 온 몸이 둥둥 떠도는것 같았다.

설 이튿날, 설보다 더 애타게 기다려온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방송을 들으며 얼마나 가슴을 들먹이였는지...

따라서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딸은 우리 부부가 늦게 얻은, 하늘이 우리에게 선사한 복덩이다. 70년대초 모든것이 부족한 그 세월에 딸이 태여났다. 기쁨과 랑만, 환희와 동경,  희망과 행복을 안고.

딸이 점차  말을 익혀가자 집안엔 웃음뿐이였다.  《우리 딸, 1등!》 하면 《아니, 특등!》 딸이 받아한 말이 너무 기특해 집안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군 했다.

행복한 시절은 세월도 빠른가 보다. 어느새 딸이 학교에 다니게 되였고 내가 글을 쓰면 딸이 첫 독자이고 평론가이기도 했다.딸이 시답지 않다고 여기면 나는 인차 수개에 들어갔고 딸이 좋다고 하는 글은 곧바로 발표되였다.

나와 안해는  딸이 있기에 너무나 행복에 겨웠고 손에 쥐면 깨여질가 불면 날아날가 그야말로 우리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요, 장상명주(掌上明珠)였다.  하지만 맹목적인 사랑이나 막무가내한 사랑은 아니였다. 딸이 스스로 모든것을  잘 해나가도록 이끌어 주고 받들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딸은 반듯하게 잘 자라주었다.

딸이 대학시험을 치게 되였다. 나는 대학을 나왔더라면 좀 더 어엿한 작가로 되였을것이라는 애달픈 한이 서려있기에 딸이 조문학부를 나와 작가가 되였으면 했는데 딸은 한어학부를 선택하였다. 좀 서운하기는 하나 딸을 리해하고 지지해주기로 마음 굳혔다.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한어선생이 되였다.  학교에서 이런저런 상장도 많이 타와 이젠 시집을 가 우리에게 떡판같은 손군을 안겨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데 딸에게서 한국류학을 가겠다는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

그 좋은 직업을 버리고 앞날에 어떤 고달픔이 있을지 모를 길을 가겠다고 한다. 여러 날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 딸을 믿고 밀어주자였다.

마침 그 때가 미국 《9.11》테러사건으로 세계가 뒤숭숭할 때였다. 부모로서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딸은 억지로 웃으며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딸이 한국 광주에서 석사공부를 시작해서 넉달만에 집으로 왔다. 그때 나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혹여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일가? 그런데 책을 번역할 과제를 맡고 왔다며 컴퓨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때만 하여도 컴퓨터가격이 대단히 비쌌다. 수소문해 중고컴퓨터를 샀다. 이렇게 돼 나도 60대중반에 컴퓨터와 인연을 맺게 되였고 이는 또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시발점으로 되기도 했다.

나는 결심을 내리고 딸의 도움을 받으며 컴퓨터를 배웠다.

어떤 사람은 매일 무료해서 어떻게 보내는가 묻는데 실은 컴퓨터에 앉으면 시간 가는줄 모른다.   인터넷접속을 하고 메일을 받고 보내고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어떤 때는 한바탕 같이 부르기도 한다.

딸은 한국에서 석사공부를 마치고 한국의 모 대학에서 한어교수로 열심히 뛰고있다. 그제서야 나는 딸이 한어학부를 선택한것이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였는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였다.

우리는 비록  아들이 없이 딸 하나를 두었지만 열 아들 부럽지 않다.  딸의 덕분에 새 아빠트에 들고 작년에는 한국방문도 다녀왔다.

나는 오늘도 컴퓨터에 앉아 딸과 서로 보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딸은 전파로 날려보내는 편지에서 부모에 대한 효도는 자기와 잘 어울리는 짝을 만나 손군을 안겨주는것이라 하였다. 그렇다,  그때면 말 그대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댓글 0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