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가 올해 6월1일 이 곳에 찾아갔을 때는 이미 <29회 중국 난정 서예(書法)절>을 치렀으며 중국 서예의 최고 상인 <4회 중국 서예 난정상>이 성대히 폐막한 후였다.
아직 상품화의 물결이 휩쓸리지 않아 노점상들의 잡다한 싸구려 소리가 없는 조용한 난정에는 세월의 고풍을 자아 내는 검은 이끼가 돋힌 <아지비(鵝池碑)>, <난정(蘭亭)> 정자, 곡수류상(曲水流觴), 강희 황제의 <난정서>를 임모하여 돌에 조각해 세운 <어비(御碑)>석, 문아(文雅)한 왕희지의 사당이 수죽(修竹)과 수림, 못에 고즈넉히 어울려 깊은 묵향의 음운과 옛 정서를 담고 있다.
필자는 수림속 개활진 곡수류상처에 이르러 마음은 동진 영화9년 즉 기원 353년 3월 3 짇 날로 간다. 이 날을 <상사절(上巳節)> 이라고도 하는데 주(周)나라 때부터 내려 오는 풍속으로 강가에 나가 세수를 하고 몸을 씻으며 액운을 떨어 버리고 묵은 때를 벗는 수계제(修禊祭)를 지낸다. 왕희지는 소흥 명문가족의 명사와 제자 사안(射安), 사만(射萬), 손작(孫綽), 서풍지(徐豊之), 등 41명을 난정에 초대하여 수계제를 지낸다. 수계제를 지낸 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는데 바로 이 것이 곡수류상이다. 곡수의 양켠에는 왕희지를 포함해 42명의 명사가 주런히 앉아 있다가 술잔이 물결 따라 누구에게 가면 시녀가 건져주어 마시게 하는데 마시고는 반드시 시를 지어야 한다. 만약 시를 짓지 못 하면 벌주 3두(斗)를 마셔야 하는데 1두는 지금으로 말하면 반근이니 한 근 반을 마셔야 한다. 술은 소흥의 명술 황주이다. 이리하여 11명은 각기 2수, 15명은 각기 1수 를 지었으며 16명은 벌주 3두를 당하였다. 시들을 걷어 한데 모으고 서문을 쓰게 되었는데 손님들의 제의하에 왕희지가 쓰게 되었다.
왕희지는 그 날 따라 기분이 좋고 주흥이 도도하여 쥐의 수염으로 만든 서수필(鼠鬚筆)을 들고 누에 고치로 제작한 잠견지(蠶繭紙)에다 28행 324자의 붓글을 썼다. 이것이 바로 훗날 서예계에 지고무상으로 떠 받들린 <난정서(蘭亭序)> 혹은 <난정집서>이다. 왕희지는 집에 돌아와 몇 번이고 다시 베껴 쓰려 하였지만 처음 쓴 경계에는 미치지 못 하였다. <난정서>는 당 나라에 이르러 <고금서첩제일>과 송 나라에 이르러 <천하 제일 행서>로 왕희지는 <서성(書聖)>의 추대를 받게 되었다.
당 나라의 서예가 손과정은 성공된 서예의 창작 요소를 말할 때 5합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신이무한 (神怡務閑), 감혜순지(感惠徇知), 시화기윤(時和氣潤), 지묵상발(紙墨相發), 우연욕서(偶然慾書) 이다. 왕희지는 <난정서>를 쓰는 당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영감적으로 모두 극치에 도달하였음을 말해 준다.
왕희지는 평생 거위와 난초를 각별히 사랑하였다. 그는 거위와 난초에서 서예 창작의 영감을 얻었으며 필묵을 숙련시켰다. <난정서>에는 갈 지(之)가 20자 들어 있는데 한 글자도 같은 것이 없으며 수면에서 거위가 헤엄치는 각양각색의 평온한 자태와 같다. 그리고 필획은 난초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 같은 자유자재의 풍격이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할 것은 잠견지이다. 잠견지는 고려지라고 불리우는데 중국에서는 생산할 수 없었던 종이로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우리의 선조들의 지혜으로 제작한 종이었다. 명주와 같이 하얗고 비단과 같이 질기며 먹물이 잘 배어 중국에는 흉내낼수 없었던 몹씨 부러워하는 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조각도 발굴된 것이 없으며 제지 기술도 영영 실전되고 말았다.
왕희지는 죽으면서 <난정서>를 가보로 진장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270년 동안 아무 사회적 효과를 내지 못하고 가문에 묻혀 있었으며 왕희지의 7대 손 지영 (智永)이 소장하고 있었다. 지영은 월주 영흠사 스님이 되여 물려 줄 자손이 없게 되자 죽으면서 자기의 제자 변재(辨才)에게 물려 주었다.
당 태종 이세민은 서예에 대하여 조예가 깊으며 왕희지의 서예를 특별히 숭상하였다. 그는 황제로 된 후 민간에 소장된 왕희지의 필적을 2300여 첩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난정서>만을 수집 못 해 한스러워 하였다. 그는 사람을 파견하여 변재를 찾아 가게 하였으나 번번이 빈 손으로 돌아 왔다.변재는 모른다고 딱 잡아 떼였던 것이다. 이세민은 강산과 황후를 제외하고 어떤 대가를 치렀으라도 <난정서>를 손에 꼭 넣을 정도로 집착하였다. 이세민은 감찰어사 소익(蕭翼)을 불러 네가 가서 찾아 오라고 하였다. 소익은 당 태종에게 왕희지의 서예를 몇 첩 얻어 가지고 산동 선비로 가장하여 영흠사에 갔다. 몇 달 동안 접촉하면서 소익은 변재의 신의를 얻었다. 하루는 소익이 왕희지의 서예을 변재에게 보이면서 진품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변재는 유심히 바라 보다가 진품이 맞다고 하면서 자기에게도 있는데 보려면 내일 오라고 하였다. 이튼 날 변재는 자랑스럽게 침실의 대들보에 구멍을 파고 숨겨 두었던 왕희지의 필적을 소익에게 보여 주었다. <난정서>다 ! 그토록 당 태종이 찾으려던 <난정서>이다 ! 몇 일 후 소익은 변재가 강으로 목욕 간 틈을 타서 영흠사에 들어가며 문 지키기 중에게 스님께서 정건(淨巾)을 가져오라 시켰다며 들어가 <난정서>를 도적질해 줄행랑을 놓았다.
당 태종은 <난정서>를 받아 쥔 후 용안에 희색이 만면해 당장 소익을 원외랑(員外郞)으로 진급 시켰으며 변재에게는 왕을 속인 죄로 처벌이 마땅하나 사면하고 비단 삼천필과 량곡 삼천석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변재는 소익에게 배반 당한 원통감과 목숨처럼 여긴 <난정서>를 도적 맞히고 나서 병들어 일년이 못 되여 죽었다. 이로하여 황제인 이세민의 인격에는 큰 오점을 남겼으나 <난정서>가 사회적 효과를 발휘하는데는 크게 기여하였다. 소익의 비 도덕적인 행위는 지금도 중국 소장가들의 질책을 받고 있다.
당 태종은 최고의 서예가들을 시켜 임모하고 탁본하게 하였으며 십여첩을 가족이나 대신들에게 하사하였다. 지금 북경고궁박물관에 있는 <난정서>는 그때 풍승소(馮承素)가 임모한 것으로 필법, 묵기(墨氣),행관(行款),신운(神韻)이 원래의 것과 근사한 것이다. 당 태종은 죽을 때 <난정서>를 순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후량의 휘주 절도사 온도(溫韜)가 소릉(昭陵)을 도굴하면서 행방은 사라졌다. 또 어떤 설은 당태종과 순장한 <난정서>는 모품이며 진품은 당 태종의 아들 이치가 가지고 있다가 이치가 죽은 후 무측천과 함께 순장되어 건릉(乾陵)에 있을 것이라 한다.

2007년 8월 26일 11회 연변 지용제
정지용 문학상 수상
KBS성립 45주년과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망향시 우수상 두차례수상
연변작가협회 회원
료녕성 작가협회 회원
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심양 시조문학회 부회장
시집 <달밤의 기타소리> <징검다리> <자야의 골목길>
<팔공산 단풍잎(한국 학술정보(주)에서 출판)><다구지길의 란>
<료녕성조선족 시선집(리문호편찬)>가 있음
이메일; lwh0312@hanmail.net
역대 서예가들이 쓴 <난정서>의 모본은 수 천 첩이 넘는다. 그 누구나 서예가면 왕희지의 서예 경지에 오르려고 노력 하였던 것이다. <난정서>는 서예의 경서일 만큼 서예가들의 심리를 휘여 잡았다.
각종 베일에 쌓인 서성 왕희지의 <난정서>, 그의 행방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천고에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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