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일보 2011-11-28 허국화 기자 ] 연변라지오방송국 문학부 남철주임이 극본을 창작하고 정광이 연출을 맡고 서태문이 해설을 한 다큐멘터리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은 윤동주가 15살때부터 생활했고 그의 장례식까지 치러진 집터를 배경으로 윤동주의 모습과 문학창작배경을 새롭게 발굴된 자료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오늘날 세인의 주목을 받고있다.
기자: 다큐멘터리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은 어떤 내용을 담고있습니까?
남철: 우선 제목은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입니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명동에서 태여나 소학교를 졸업한후 1932년에 중학교에 붙을무렵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이 아들의 장래를 위해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이사한 집이 지금의 룡정정부청사동쪽에 있는 집이였습니다.
그때 그 집에는 윤동주의 조부모, 부모, 형제 셋에 고모의 아들 송몽규까지 여덟 식솔이 살았습니다. 동주가 입학한 중학교는 지금 룡정로년대학(옛날 모윤숙이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교)옆에 있는 영국선교사들이 꾸린 은진(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다는 뜻)중학교였습니다. 그 은진중학교는 바로 지금 룡정에서 말하는 《영국더기》에 있었고 윤동주네 집은 바로 그 더기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큐드라마의 제목이 《더기아래 윤동주의 집》으로 되였습니다.
기자: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의 창작계기는 무엇입니까?
남철: 지금까지 윤동주의 생가와 묘지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윤동주가 15살부터 살았고 은진중학(초중), 평양숭실중학(고중), 서울 연희전문(대학), 일본 도지샤대학(류학)시절을 지냈으며 윤동주가 세상뜬 후 장례식을 치렀던 집은 아는 사람이 극히 적고 또 그 집자리는 지금 파가이주되여 어느 공장의 창고로 돼있습니다.
열백번 문화재로 되여야 할 그 자리가 력사의 진토속에 묻혀버린 아쉬움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것이 저의 프로 기획 의도였습니다. 윤동주 사망후 가족들은 계속 그 집에서 살았고 그 집에서 윤동주의 조부모, 어머니가 사망했으며 1958년에 아버지 윤영석은 동주의 계모 홍씨, 막내아들 윤광주와 함께 용문교쪽으로 이사갔습니다. 윤동주가 살던 옛집은 그냥 방치된채로 있다가 1996년에 이개축을 하면서 허물어졌습니다.
기자: 무엇때문에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이 국제상을 수상할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남철: 프로가 상을 받자면 우선은 제재가 참신해야 합니다. 저의 프로에는 우리가 다 알고있는것 같았지만 또 모르고있었던 윤동주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다. 이 정보는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김혁주임이 제공한것입니다. 《연변문학》지에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발표한 김혁작가도 지난해에야 이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 정보제공자가 바로 1930년대에 은진중학교부근에서 종살이를 했고 윤동주의 은진중학교 12년 후배인 최근갑로인(86세)입니다. 또 다른 정보제공자는 윤동주의 막내동생 윤광주의 딱친구인 리송덕로인입니다.
연변라지오방송국 문학부 남철주임이 제작한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은 일전에 한국 KBS 세계한국어방송인대회에서 시상하는 국제상인 《서울프라이즈》 시상식에서 라지오부문 특별상을 수상했다.
《더기아래 윤동주의 집》은?
2011년11월28일 03시39분 조회:47 [연변일보 2011-11-28 허국화 기자 ]연변라지오방송국 문학부 남철주임이 극본을 창작하고 정광이 연출을 맡고 서태문이 해설을 한 다큐멘터리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은 윤동주가 15살때부터 생활했고 그의 장례식까지 치러진 집터를 배경으로 윤동주의 모습과 문학창작배경을 새롭게 발굴된 자료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오늘날 세인의 주목을 받고있다.
기자: 다큐멘터리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은 어떤 내용을 담고있습니까?
남철: 우선 제목은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입니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명동에서 태여나 소학교를 졸업한후 1932년에 중학교에 붙을무렵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이 아들의 장래를 위해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이사한 집이 지금의 룡정정부청사동쪽에 있는 집이였습니다.
그때 그 집에는 윤동주의 조부모, 부모, 형제 셋에 고모의 아들 송몽규까지 여덟 식솔이 살았습니다. 동주가 입학한 중학교는 지금 룡정로년대학(옛날 모윤숙이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교)옆에 있는 영국선교사들이 꾸린 은진(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다는 뜻)중학교였습니다. 그 은진중학교는 바로 지금 룡정에서 말하는 《영국더기》에 있었고 윤동주네 집은 바로 그 더기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큐드라마의 제목이 《더기아래 윤동주의 집》으로 되였습니다.
기자: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의 창작계기는 무엇입니까?
남철: 지금까지 윤동주의 생가와 묘지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윤동주가 15살부터 살았고 은진중학(초중), 평양숭실중학(고중), 서울 연희전문(대학), 일본 도지샤대학(류학)시절을 지냈으며 윤동주가 세상뜬 후 장례식을 치렀던 집은 아는 사람이 극히 적고 또 그 집자리는 지금 파가이주되여 어느 공장의 창고로 돼있습니다.
열백번 문화재로 되여야 할 그 자리가 력사의 진토속에 묻혀버린 아쉬움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것이 저의 프로 기획 의도였습니다. 윤동주 사망후 가족들은 계속 그 집에서 살았고 그 집에서 윤동주의 조부모, 어머니가 사망했으며 1958년에 아버지 윤영석은 동주의 계모 홍씨, 막내아들 윤광주와 함께 용문교쪽으로 이사갔습니다. 윤동주가 살던 옛집은 그냥 방치된채로 있다가 1996년에 이개축을 하면서 허물어졌습니다.
기자: 무엇때문에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이 국제상을 수상할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남철: 프로가 상을 받자면 우선은 제재가 참신해야 합니다. 저의 프로에는 우리가 다 알고있는것 같았지만 또 모르고있었던 윤동주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다. 이 정보는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김혁주임이 제공한것입니다. 《연변문학》지에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발표한 김혁작가도 지난해에야 이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 정보제공자가 바로 1930년대에 은진중학교부근에서 종살이를 했고 윤동주의 은진중학교 12년 후배인 최근갑로인(86세)입니다. 또 다른 정보제공자는 윤동주의 막내동생 윤광주의 딱친구인 리송덕로인입니다.
연변라지오방송국 문학부 남철주임이 제작한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은 일전에 한국 KBS 세계한국어방송인대회에서 시상하는 국제상인 《서울프라이즈》 시상식에서 라지오부문 특별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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