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과 문화재 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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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과 문화재 수호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1.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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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형필과 간송박물관 -<신길우의 수필 226>

[서울=동북아신문]  국력이 약하면 국토나 재산을 지키기가 어렵다. 나라가 망하거나 전쟁에 패전한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지배를 받는 처지의 나라들도 강대국에게 많은 것들을 잃는다. 강제로 빼앗기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쩔 수 없어서 내 놓게도 된다.

   이런 일은 문화재의 경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각종 위협과 듣기 좋은 구실로, 때로는 몰래 가져가고 훔쳐가기도 한다. 이미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많은 것을 잃었고, 수많은 문화재들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현재 알려진 것만도 일본에 우리 문화재가 3만 4157점이나 있다고 한다. 개인 소장품 등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 왜정 시절에 우리나라의 훌륭한 문화재의 구입과 수장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 바로 간송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다.

   간송은 막대한 재산을 들여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문화재 4점 등을 비롯하여 많은 국가 문화재들을 수집하고 수장하였다. 그의 수장품들을 다루지 않고는 미술사 연구논문을 쓸 수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를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의 수호신’이라고 불리고 있다.

   간송이 이렇게 문화재 수집을 하기에는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재력이 밑받침이 되었다. 그리고 문화재에 대한 남다른 애호심(愛好心)과 깊은 안목(眼目)을 기르고, 위창 오세창(吳世昌) 등 여러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이룬 것이다.

   간송은 단순히 취미나 투자로 문화재를 수집한 것이 아니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 속에 겨레의 혼이 담긴 문화재들이 일본인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를 지키고 보존해야 되겠다는 사명감으로 수집한 것이다. 어떻게든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일본으로 반출된 것도 도로 사들이기까지도 하였다. 그의 문화재 수집은 민족정신의 발로이며, 일종의 항일 투쟁이었다. 어려운 시기에 재력가(財力家)들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전형필은 1906년 7월 29일 서울 종로4가 112번지에서 정선(旌善) 전씨 영기의 차남으로 태어나 동생 명기에게 입양되었다. 할아버지는 무과급제로 가선대부를 지냈고, 큰할아버지는 미곡상을 하는 큰 상인이었다. 1917~1919년에 양조부와 양부, 친형까지 별세하고, 1929년에는 친부까지 작고하여 간송은 친․양가의 유일한 남자가 되었다.

   간송은 1930년에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800만평 2만석꾼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그는 휘문고 은사인 화가 고희동(高羲東)의 소개로, 민족대표이며 서예가인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조언을 받아 문화재 수집을 시작했다.

   1931년에 ‘몽유도원도’가 처음으로 일본 전시장에 나왔다. 연락을 받은 간송은 3만원의 거금이었지만 상중(喪中)이라 사지 못했는데 일본 천리대학이 구입했다. 이 일이 한이 되어 간송은 그 뒤부터 사고 싶은 문화재는 바로 거금을 내고 사들이게 되었다.

   1932년에 고서 인수와 서화 정보를 빨리 얻기 위하여 ≪한남서림≫을 인수하였다. 이 시기에 송병준의 아궁이로 들어갈 정선의 <해악전신첩>을 사고, ‘석조사자탑’ ‘고려3층석탑’ ‘조선석등’ 등을 매입하였다. 인천항에서 반출되려는 ‘괴산 팔각당형 부도’(보물 579)도 되사오고, 오사까 경매에서 ‘3층 석탑’(서울시문화재 28호)도 사왔다.

   1934년부터는 신윤복의 <혜원전신첩>(국보 135호)을 일본에서 구입하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도 다수 모았다. 1935년에는 일본인에게 팔려 운반중인 ‘전문경 5층석탑’(보물 580호)을 사고, <청자상감운학문 매병>(국보 68호)을 일본인에게 2만원(당시 군수 월급 70원)을 주고 샀다. 1936년 11월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 난국초충문병>(국보 294호)을 경성구락부에서 1만 4580원에 낙찰 받았다. 1937년에는 일본에 사는 영국인 존 개스비(J. Gadsby)를 설득하여 고려청자 20여점을 일괄 매입했다. 논 1만 마지기를 처분한 돈으로 충당했는데, 이 둘 중 7점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다.

   193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인 <보화각(保華閣)>을 개설하였다. 오세창은 “여기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精華)로다. 조선의 유물로서 살피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하고 개관을 기렸다.

   1940년에는 (재)동성학원을 설립하고 보성중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을 겸하기도 하며 육영에 힘썼다. 1943년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수장하고, <동국정운>(국보 71)과 <금보(琴譜, 보물 283)도 구입했다. 1954년부터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방이 된 뒤에는 간송은 문화재 수집을 전처럼 애쓰지 않았다. 독립이 되었으니 누가 수장해도 우리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수장품을 정리하고 전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6․25동란이 일어났다. <보화각>을 접수한 공산당원들은 국립박물관을 지키던 최순우(崔淳雨)와 서예가 손재형(孫在馨)을 시켜 수장품들을 포장하게 하였다. 두 사람은 책임자를 접대하며 온갖 이유를 대면서 작업을 늦추고 시간을 끌었다. 국군이 대전까지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손재형은 계단에서 일부러 넘어져 다리를 다쳐 움직일 수가 없다며 엄살도 부렸다. 그리하여 반출을 간신히 막았다.

   1․4후퇴 때는 미리 주요 수장품들을 부산으로 피난시켰다. 남겨놓은 수만권의 서적과 서화 골동품들은 약탈되었고, 귀경했을 때는 고활자본으로 벽이 도배되고, 전적들이 불쏘시개로 쌓여 있었다. 1959년 관리 소홀로 보성중고가 큰 빚을 지고 있을 때, 간송은 여러 재산을 팔아 빚을 갚으면서도 큰돈이 될 수장품은 하나도 팔지 않았다. 급성 신우염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영인을 위해 국보 <훈민정음>을 한 장씩 해체하기도 하였다. 간송은 1962년 1월 26일 춘추 57세로 세상을 떴다.

   간송이 국보들을 구득하는 일화들은 가히 감동적이다.

   국보 68호가 된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총독부에서 1만원을 주겠대도 안 판 것인데, 1935년 봄에 일본인 마에다가 2만원을 달라자 두 말 없이 현금을 주고 인수했다. 당시 군수의 월급이 70원이었으니 24년치이다. 일본으로 넘어갈 것을 걱정해 박물관 공사비까지 합쳐 지불한 것이다. 얼마 안 되어 일본의 무라카미가 서울로 와서 두 배를 주겠다고 하자, “더 좋은 청자를 주신다면 시세대로 치르고, 이것은 산값에 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매병은 이 땅에 남게 되었다.

   ◀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294호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채 나국초충문병>은 경성미술구락부의 경매장을 뜨겁게 달구고 결국 간송이 낙찰을 받았다. 1936년 11월 22일 경매가 시작되자 시가 ‘500원’에서 금방 3000원이 되고, 일본에서 온 무라카미라는 5000원을 불렀다. 8000원을 마지막 세 번째로 경매사가 부르려는 순간 일본인 야마나카가 9000원을 외쳤다. 결국 그 문병은 최고가 1만 5000원으로 31세의 간송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금액은 당시 좋은 기와집 15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1940년에 제자 이용준 서예가에게서 세종 하사 『훈민정음』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김태준(金台俊)이 전형필에게 알려 주었다. 이용준은 당시 종손의 사위로 처가인 광산김씨가 소장하고 있던 훈민정음을 빌려 가지고 있었다. 1943년 여름, 간송은 “귀한 물건은 제값을 주어야 한다”며 즉각 책값 1만원을 이순황에게 주어 보내고, 김태준에게도 1천원을 주었다. 예상가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어 즉각 인수하게 하고, 일본에 빼앗길까 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숨겼다. 간송은 훈민정음을 자신이 수장하고 있는 수집품 중 최고의 보물로 여겼다고 한다. 훈민정음은 1962년 12월에 국보 제70호로 지정되고,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56년에 통문관에서 영인본으로 출간되었다.

   옛 서화(書畵)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퀴퀴한 종이조각일 뿐이다. 도자기나 석물(石物)들은 그에 담긴 정신을 발견하지 못하면 한낱 사금파리나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안 간송 전형필. 만석꾼 유산을 문화재 수집에 바치고, 그 보존을 위해 평생을 바친 문화선도가. 망국의 왜정 시절의 어려운 시대에, 항일의 정신으로 민족의 훌륭한 유산들을 구입 보관하고, 해방되어 박물관으로 전해준 선각자. 후대에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그가 모은 문화재들은 대대로 빛날 것이며, 후세인들이 감상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의 문화가 그렇게 빛나고 그렇게 값어치하기를 간송은 진정으로 바란 것이다.

   * 전형필 사진은 naver의 ‘이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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