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하얼빈시 아들집에 며칠 머물렀다가 키워준 고향 오상으로 향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피살한 역이라 각별한 민족적 자부심을 안고 동북지구의 경제발전지역으로 우뚝 솟아나고 있는 우아한 하얼빈역에 들어섰다.
오상행 열차를 타면 늘 조선족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로가 부둥켜안고 웃으며 기뻐하던 시절이 이제는 과거가 된 듯 한족들의 웅성웅성 떠드는 소리만 들린다. 검표시간이 되어 검표구를 향해 묵묵히 걷고 있는데, ‘형님’ 소리와 함께 뒤에서부터 누군가가 나의 어깨에 손을 대고 흔들었다. 조선어 소리에 너무도 반가워 뒤로 돌아보니 철구였다.
우리는 얼싸안고 얼굴로 그의 어깨를 비비였다. 마치 고향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철구를 어떻게 여기서 만났을까! 그는 오상시 동부에 자리 잡고 있는 광휘향 휘황 조선족촌의 촌장이다. 많은 조선족들의 한국행으로 남기고 간 귀중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부향장 후선인 출마도 고사하고 부락에 남아있으면서 집 한 채, 땅 한마지기도 남에게 밀어주지 않은 촌장이다. 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 변혁이 일어나자 집체소유제로 모아두었던 재산을 흩어 버리지 않고 촌의 기동금으로 활용하여 촌민들의 생산 생활에 크게 기여한 촌장이기도 하다.
촌 지도부의 세심한 관심으로 한국행 비용도 대출해 주어 다른 사람처럼 고리대의 고통을 받지 않던 살기 좋은 마을로 기억한다. 순수한 애향심으로 돈벌이도 명예도 마다하고 휘황촌을 꿋꿋이 지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촌민은 그를 믿게 되었고 정부는 그를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한국행으로 첫 걸음을 내딛었을 때 그를 찾아 인사 겸 성과를 축하할 때 “휘황 땅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안심하고 잘 다녀오십시오.” 하고 인사하던 때가 떠올랐다.
둘이서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미안합니다. 저는 그 땅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는 말을 처음엔 믿지 않았다. 철구는 말을 이으면서 “전 촌의 80호가 남긴 4명의 농민, 그나마 병약하여 일도 할 수 없는 분들을 데리고 전 촌의 땅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인근 한족들에게 토지를 위탁하게 되었어요.” 휘황촌 조차 이런 모양인데 다른 조선족 촌은 어떨까 하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오상역에 도착하게 되면서 아쉬움 마음으로 헤어졌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후에 나는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이튿날 새벽부터 몸을 바쁘게 움직였다. 새벽열차를 타고 옛 안가농장(지금의 만락향)으로 가려고 신발 끈을 매고 있는데 시 조선족문화관광장직으로 일하고 있는 맏딸아이가 문화관 주제 하에 진행되는 ‘전 조선족 보름 윷놀이’ 모임에 참석해달라는 것이었다. 조선족 윷놀이 모임은 1984년부터 시위상무위원회의에서 조선족들의 전통 풍습문화로 결정되어 해마다 개최되는 조선족의 문화생활이었다. 원 계획을 수정하고 발길을 돌려 강당으로 갔다. “윷이야.”, “모야” 하는 함성소리에 그만 머릿속에 근심 걱정은 사라지고 몸이 저절로 윷판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나는 “옛날에도 일등이었지만 오늘도 일등입니다.”하고 소리치며 날린 윷이 ‘모’가 나오자 여기저기 “잘한다.” 하며 나에게 이목이 주목되는 통에 “저분은 김 선생 아니야.”, “김 선생 언제 왔나” 하며 웅성거리다 다가와 친절한 인사를 나누었다.
이때 남태동 회장도 만났다. 이 젊은 회장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한국이 부럽지 않습니다. 한 쌍(1헥타르)은 논에 순수입이 만 원 이상이 되니까요. 다섯 쌍 논을 다루면 한국에 간 수입을 따를 수 있으니까요. 더구나 제 땅에서 번 돈이 마디여서 앞으로 한국 사람보다 더 멋지게 살 수 있지요.”하며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앞으로 조선족사회의 전망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나는 조선족들이 모여 살면서 농사도 잘 짓고 살림도 잘 한다고 소문난 민락향으로 갔다. 차에서 내려 향정부를 향해 가노라니 갓 새 옷으로 단장한 향 위생원의 정다운 모습이 나를 매료시켰다. 대문을 열고 정원에 들어서니 환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환자들을 둘러보니 조선족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원장을 비롯한 병원의사, 간호사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선생님께서 애착을 보이던 조선족병원이지만 지금은 조선족 환자를 보기가 힘들어요. 조선족이 앞으로 함께 모여 살날이 있을까요?” 하며 나를 응시하였다. “있겠지요. 우리가 잘 살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하며 희망의 말을 남기고 병원 문을 나왔다. 빨리 촌민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정부를 찾아가던 발길을 돌려 일 잘하는 동네, 부자동네로 소문났던 민락향삼가자마을로 갔다.
낯익은 논밭을 지나며 새로 닦은 시멘트 길을 걷노라니 근면한 우리 조선족들이 찬바람을 맞으며 진탕 소에서 맨발로 논을 일구고 길을 닦던 일, 일하면서도 호호 웃어대던 아낙네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에 잠기며 걷노라니 어느새 삼가자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주변을 둘러보니 택시 몇 대가 길에 서서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참관단이 왔는가? 아님 시장어르신님이 왔는가?’하며 이런저런 생각으로 옛 촌지부서기 성용제씨 집을 찾았다. 집에 들어서자 “안녕하십니까. 제가 돌아왔습니다.” 갑작스런 손님을 보고 반가운 인사로 떠들썩한 중에도 나는 길가의 택시가 궁금하여 오늘 누가 왔는지 물어보는 말에 대답은커녕 “누가 오기는 누가와 동네 택시지 김 선생 참 형세를 모르는 구려.”하며 경상도 토박이의 뚝뚝한 말로 나를 면박 주었다. “개혁개방 후 참 큰 변화입니다.”라고 화두를 떼더니만 성 부서기는 전국모범촌으로 흥성거리든 옛날을 되뇌며 마을의 변화를 이야기 하였다. 원래 선진이었던 조선족의 살아가는 모습 대신 한족들의 변화를 자기 일 마냥 소개하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였다. 한 부락에 두 개 민족이 살면서 조선족 촌은 줄곧 중앙, 성, 시, 의 선진으로 되었고 한족들은 농사를 지을지 몰라 늘 조선족들이 모를 키워 주었는데 건국 후 몇 십 년을 형제처럼 살면서 모든 영농법을 다 배워냈으며 조선족들의 위생문화와 음식문화를 접하여 네 집, 내 집, 희사, 흉사를 가리지 않고 지내는 터이니 옛 조선족지부서기의 자랑도 당연하였다. “우리 부락에 택시 18대가 있습니다. 모두 한족들이 산거예요. 그 중 조선족이 1대 샀는데 그나마 빚을 내어 샀습니다.”라고 전했다. 한마을에 사는 80여 호의 한족들이 돈을 벌어 택시 17대를 구입했다는 살아온 안가벌판 역사상 유래 없는 일이다.
내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옛 촌장이던 이영복과 몇몇 친구들이 모여 지부서기 부인이 손수 차려 준 반찬에 한 컵 한 컵 술잔을 비워냈다. 2년 전 만해도 밥상에 앉으면 어떻게 해서든 한국으로 가야 팔자를 고치겠는데 하며 한탄 섞인 소리뿐이었는데, 오늘은 ‘여기서도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퍽 신기하면서도 기쁘게 들리는 소리여서 상세히 듣고 싶은 마음으로 이것저것 물어보다보니 조사좌담회가 되고 말았다. 10여 가지의 정부가 농민에게 베풀어준 혜택을 알게 되었다.
당 중앙에서는 “3농지원정책” 조치를 했는데, ‘농업을 발전시키고’ ‘농촌을 진흥시키며’ ‘농민 수입을 증가’하기 위한 정책이다. 징구량 면제, 농업세 면제, 양식 보조, 우량종자 보조, 농기구 구매 보조, 새 농촌 건설지원, 공공시설 건설지원, 농업전업 합작사 부축, 합작 의료 보조, 농민 전자상품 구매 보조, 각종 보험 등 10여 가지 정책 시행으로 농민들을 크게 고무시켰다고 한다. 가을이면 농민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양식임무와 농업세는 사라졌고, 양식보조와 우량종자보도 등 국가의 지원을 받아가며 농사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농업기계국의 앞마당에는 농업기계 구입으로 모여든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시내의 전자상품 상점은 텔레비전, 세탁기, 등대형 가정용품을 사러 온 농민들로 상점을 메웠단다.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향촌 길과 농토 길은 콘크리트로 새 단장을 했고, 정부 지원으로 시행되는 ‘농민합작이료’는 질환치료의 걱정을 크게 덜어주었다고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조선족 농민들의 말도 달라졌다. 전에는 오직 한국으로 가야 신세를 고치겠다던 사람들이 이젠 ‘여기도 잘 살 수 있습니다.’하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단다.
우상시 밀락 조선족향우의촌의 젊은 농업기술원 남태동씨는 농업 합작사를 꾸려 과학적인 영농기술로 농민을 이끌었으며 ‘생산, 판매 책임제’를 실시하여 농민들의 수입은 크게 늘었다. 영안시 근로촌 당지부서기 이광진 씨는 전 촌의 토지를 모아 통일 양도하는 방식으로 토지유실문제를 해결하였다. 한국에서 돈을 번 촌민들을 중심으로 10여명 주주를 조직하여 50만원의 자본금을 모아 ‘륭흥벼합작사’를 설립하였다. 이 희망 사업은 당지 정부의 지지도 받게 되어 농기계구입자금을 지원 받게 되었다.
그래서 100헥타르 논을 점유한 인근의 한 촌까지 합작사 주주로 가입하였으며 그 해에 토지 집중 양도로 25만원의 수입을 얻었으며, 합작사의 발전과 도로 포장 등 공익사업에 기부하여 성급 신문에도 보도되었는데 이는 조선족 촌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연수현의 원 조선족 부현장 이수길씨는 퇴임 후 ‘조선족경제교류문화협회’란 민간단체를 만들어 중한관계의 발전에 따라 조선족의 역할을 구상하여 토지 유실의 심각한 상황이 장래 조선족사회의 발전과 조선족들의 삶에 큰 영향으로 된다는 도리를 심각히 느끼고 전 현 조선족 농호들의 ‘토지 당안’을 만들어 사용권 양도권을 일괄 관리하였다.
돈을 벌기 위한 한국 진출로 바쁜 농민은 일 년 70여일이면 농사일을 마치는데, 중국에 돌아와 농사짓고 한국에 가서 돈벌이를 해도 된다면서 계약이 완료된 땅을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며 나는 이것이 조선족에 대한 체류 정책의 완화가 낳은 긍정적 효과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자유왕래’가 실시될까하는 아쉽고 간절한 마음으로 장래 조선족사회의 발전을 그려보며 딸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다 책상 위에 흩어져있는 흑룡강신문을 보노라니 “고향땅을 지켜가는 ‘왕벌’주부”라고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기사를 읽고 감명 받고 고마운 생각으로 ‘왕벌주부’를 만나야겠다는 마음으로 일어나 동광마을로 향했다. 그녀의 몸에선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차림새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거주하는 곳은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그저 그녀의 눈에서 솟아나는 해내고야 말겠다는 소박하지만 강인한 정기뿐이었다. “주인 없는 땅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180세대가 살던 동관촌에 겨우 병약한 4세대만 남아있습니다. 주인 없는 땅을 지키면서 칼을 든 불한당들의 촌장 직에서 물러나라는 공갈 협박과 흉기로 위협까지 당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어떤 억압에도 동요 없이 땅을 지켜왔으며 저에게 행패를 부리든 불한당들까지 길 들여진 종이범으로 만들었습니다. 동네는 조용해지고 민족 단결을 지켜가는 동네로 되었습니다.” 라고 자랑스럽게 힘주어 말했다.
그럼 언제까지 이 땅을 지키겠는가 하는 물음에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혼자된 몸이니 시집도 가야하고요”하며 수줍은 웃음으로 말을 맺으려다가 무엇을 바라는 것처럼 덧붙였다. “우리 동네 농민들에게 전해주세요. 여기서도 잘 살 수 있다고요. 간절히 기다린다고요. 중국 정부의 농민 정책을 많이 홍보해주세요”하는 정숙한 부탁이었다. 마치 이 늙은이의 할 일을 찾아주듯이 한 여인의 부탁은 많은 생각을 불러왔다. ‘많이 홍보해야겠다. 고향땅을 왜 홀로 지켜야 하는가? 우리들의 삶의 가치를 서울에서 찾아야만 되는가? 돈 번 재간둥이들이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돌아와 유용한 터전으로 발전시킬 수는 없을까?’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배회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주인을 잃어버린 땅위에 덥힌 흰 눈도 반짝반짝 빛을 내며 달려오는 주인님을 기다리는 양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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