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아버지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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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아버지의 한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10.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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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수기공모 장려상-김 염화

“그만하세요. 아버지. 제발 그만하세요. 어머니가 죽겠어요.”

“비키지 못해. 오늘 죽여 버리고 말 거니까. 옜다, 한 대 더 맞구 죽어라 죽어!”

어머니 이마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머니~”

다행히 어머니는 쓰러지지 않으셨다. 설움에 터질듯 한 가슴을 붙잡고 어머니는 쾅 하는 문소리만 남기고 집을 나가셨다. 내 귀청에서 메아리치는 그 문소리를 느끼며 나는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평소에는 누구의 아버지보다도 더 멋진 분이신데…… 빈 술병과 엎어진 밥상을 둘러보다 말고 나는 밖으로 뛰쳐나왔다.

눈물투성이가 되어서 동네를 돌며 어머니를 찾았다. 이 캄캄칠야에 어머니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대로 우리를 두고 어디 영 가시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두려움에 떨떨 떨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불러보았다. 대답이 없었다. 뒤뜰이며 외양간이며 냇가를 찾아다니다가 평소에 자주 가던 빨래터에서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졸졸 흐르는 냇물소리에 뒤섞이며 들려와서 내 여린 가슴을 후볐다. 차라리 옆에 폭포라도 있었으면 속 시원하도록 소리 내어 우실 수 있을 건데.

워낙 과묵하신 어머니는 내가 살며시 손을 잡고 쳐다볼 때에도 말씀 한마디 없으셨다.

“어머니 이마는 괜찮으세요? 너무 불쌍합니다. 흑흑……”

“그런 소리 하지 마. 너와 네 오빠가 있어 엄만 항상 뿌듯하단다.”

나는 어머니 곁에 앉아 이 밤의 정적을 깨며 끝도 없이 흐르는 냇물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얼마동안 듣고 있었는지, 어머니가 문뜩

“이젠 아버지가 주무실 거야. 들어가자.”

하시며 천천히 일어나셨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구들 한 복판에 아무렇게나 누워 코를 골고 계셨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조심조심 방을 치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연속 구박을 들이대는 아버지, 그런 구박을 받으면서도 이 보잘 것 없는 집을 떠나려 하지 않는 어머니…… 도무지 풀려지지 않는 의문들이다. 불현듯 좋은 수가 떠올랐다. 실행도 하기 전에 자신이 이미 평화의 사자라도 된 것같이 흥분되었다.

이튿날 아침 글쪽지를 하나 썼다. 그리고 아버지가 잠깐 나가신 틈을 타서 술병을 넣어두는 찬장 속에 집어넣었다. 아버지가 반주를 드실 때 보시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가방을 메고 학교로 갔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집근처가 아니고 버스를 타고도 30분 남짓이 걸리는 곳에 있다. 시골 학교는 교육의 질이 그만큼 떨어진다면서 우리를 유치원 때부터 멀더라도 시내 쪽으로 다니게 하신 분은 다름 아닌 우리 아버지시다. 이런 일로 보면 아버지가 참 생각이 깊으신 분이셔서 그만큼의 이해심도 있지 않으시겠냐는 생각들을 가끔 해왔었다. 그래서 감히 쪽지를 남기는 것과 같은 발언의 기회를 얻으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은 것이다. 만약 그 쪽지가 큰 효력을 발생하면 내가 딸로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한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흐뭇해졌다가도 그 쪽지 때문에 아버지가 화를 내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바닥에 식은땀이 쫙 나기도 했다.

그 쪽지 생각에 그날 하루는 참 빨리도 지났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섰는데 아버지는 아직 들어오지 않으셨다. 쪽지를 보셨을까? 보셨다면 화가 나셨을까? 나는 찬장 문을 열어보았다. 쪽지가 그 자리에 있었다. 보시고 다시 놓으신 걸까. 아직 못 보신 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치워도 아버지는 모르시겠지. 그런데 치우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갑자기 문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찬장 문을 닫아버리고 책상 앞에 가 앉았다. 어머니셨다. 이마에 붙여진 반창고가 눈에 띄자 난 어머니 앞에 다가가 걱정스레 바라보다가 하마터면 또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안 아프다. 배고프지?”

어머니는 분유 한 컵을 풀어 내 책상머리에 놓아주시고는 저녁 준비를 하셨다. 숙제를 하려고 숙제 책을 펼치고 손에 연필을 들었건만 눈길은 자꾸 저녁 하시느라 분주하신 어머니한테 돌려졌다. 석탄을 키에 담아 들여와서 불쏘시개로 아궁이에 불을 일구시고는 가마 목에 올라와 쌀을 씻어 안치고 감자와 고추를 썰어 장국을 끓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도 불편한 “부엌”에서 참으로 날렵하게도 한 끼니 상을 갖추셨다. 저렇게 밖에서나 집에서나 일 잘 하시는 어머니가 왜 아버지한테 그런 꼴을 당하셔야 하는지. 나는 도저히 풀려지지 않는 의문덩어리를 다시 건드려보다가 아버지가 들어오며 하신 기침 소리에 와뜰 놀라 대뜸 숙제를 하기에 골몰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으나 머릿속에는 그 쪽지가 자꾸 맴돌았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한마디 말씀도 없었지만 아버지가 밥상 옆에 앉으시면 우리는 으레 제자리를 찾아 앉아서 밥을 먹어야 했다. 아버지는 찬장 옆에, 어머니는 가마 목에, 나는 어머니 옆이긴 했으나 아버지와 정면으로 마주 앉는다.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인 오빠는 학교 근처의 친척집에 하숙하였다. 나는 이런 날 이런 분위기에 오빠라도 옆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전에 아버지는 반주를 하신다. 아버지 손이 찬장 쪽으로 이동하는 순간 나는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보다 긴장한 순간도 있으랴. 나는 밥을 만 내 국그릇에만 눈길을 고정시키고 감히 아버지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술병을 잡으려다 그 쪽지를 보셨는지, 그 쪽지를 펼쳐서 읽으셨는지, 읽으신 뒤에 나를 무섭게 흘기셨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말씀 한마디 없으셨고 나는 내 그릇의 걸 후닥닥 먹어치우고 책상 앞에 가서 숙제를 계속했다.

며칠이 지났다. 나는 그 쪽지를 거의 잊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 쪽지 때문에 나한테 화를 내지 않으셨으니까. 그리고 아주 적으나 필요한 말들을 두 분이 주고받으시는 걸 나는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이해심이 있는 분이시고 이 가정에서 이 딸의 역할 또한 크다는 생각에 흐뭇했고 무거웠던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아마도 그 쪽지가 우리 집 화목의 씨앗으로 변신하여 발아를 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의 “성공”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 희열이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나에게는 또 좋은 방법이 있었다. 또한 나로서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지도 모른다. 바로 좋은 시험 점수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조선어문”과 “수학” 두 과목을 모두 만점 백점을 맞아 내 이름이 맨 앞에 버젓하게 박혀진 시험성적표를 아버지께 보여 드렸을 때 그렇게 활짝 피는 표정을 나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평소에 항상 엄숙한 표정 때문에 무서워 보이기만 하던 아버지였는데 성적표를 보시고 “우리 딸 일등이다!” 하시며 엄지손가락까지 내밀어 보이시는 것이었다.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나 자신도 인정을 받고 온 가족이 기뻐하는 그 순간, 그런 작은 순간 속에 행복이 숨어있는 게 아닐까.

이젠 2학년이니까 “한어”까지 합쳐 3개 과목인데 “삼백”을 따내야지. 이런 다짐 때문이었는지 나는 실로 3개 과목 만점인 성적표를 아버지께 보여드릴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죽 일등의 보좌는 내 것이었다. 나는 기뻤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그 보좌보다도 그 보좌로 더없이 소중한 걸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사이의 다툼이 깨끗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오빠가 학교에서 담배 피우다 발각되어 처분 받은 일, 나와 오빠가 밖에서 놀음에 탐해 제때에 밥을 먹지 않은 일, 성가하지 않은 막내 삼촌이 남들과 손찌검하여 남을 크게 다치게 한 일…… 이런 일들 가운데 정말 화가 날만한 일들도 있겠지만 남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일에도 집이 뒤집어지도록 화를 내시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셨다. 내 머리 속에 그 의문덩어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김서기만한 분이 어디 있습니까? 공적인 일들은 물론 척척 잘 해나가시고 개인적으로도 동네사람들의 어려움에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해 주시고. 거기다 손재간도 이만저만이 아니지. 팔방미인이지요. 학교만 좀 더 다녔으면 큰 인물이 되었을 건데……”

어릴 때부터 여러 사람 입에서 들어온 말이다. 잘 모르고 있었는데 그렇게 여러 사람이 우러르는 분이셨구나. 남의 어려움도 그냥 넘기지 않는 가슴이 따뜻한 분이시구. 그런데 “학교”, “학교를 좀 더 다녔으면” 하는 말은……

그 날 저녁이 생각난다. 그 날도 아버지는 흠뻑 취하셨다. 취하시면 아무 꼬투리라도 잡아서 역정을 내고 싶으신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눈치를 봐서 살며시 자리를 피하셨다. 나 또한 숙제를 진작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숙제가 많은 양으로 책상 앞에만 딱 붙어 앉아있었다. 내가 공부를 할 때만은 절대 지장을 주지 않으려 하는 아버지시다. 그런데 그 날만은 나를 앞으로 부르셨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아버지 앞에 가서 앉았다.

“우리 조상들은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자식을 공부시켰단다. 이 애비도 너희들을 끝까지 공부시켜 원이 없게 할 거다. 지금은 뭐가 모라자서 공부 못하겠니. 너 그거 아니? 나도 영 공부 하고 싶었는데. 이 애빈 학비를 낼 수 없어 학교에 못 다녔단다. 누가 날 좀 공부 시켜주지. 내가 학교를 좀 더 다녔어도…… 나도 꿈이 있는데. 나도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아버지의 말소리가 끊겼다. 구들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아버지 고개는 숙이는 데까지 숙여졌다.

“아버지~”

나도 갑자기 목이 메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오늘따라 아버지의 모습이 유난히도 가냘팠다. 학교를 못 다닌, 꿈을 이루지 못한 아픔이 얼마나 컸으면 딸 앞에서 이렇게 울고 싶으셨을까.

아버지는 6남 3녀 맏아들로 태어나셨다. 그 때는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도 자녀를 참 많이들 두었다. 식구가 하나 더 늘면 죽에 물을 한 바가지 더 넣으면 된다는 시절이어서 먹기도 힘들었는데 그렇게 많은 자녀들을 다 공부시킨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희생을 해야 하는 것은 맏이였다. 부모를 도와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까. 초등학교를 막 졸업하려는 해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고 산에 나무하러 가서는 사람 안 보이는 곳에서 혼자서 슬프게 울곤 하셨단다. 그러다가 그런 상황에서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지 하는 마음에 한어사전 하나만은 꼭 지니고 다니면서 틈틈이 보고 읽고 쓰고 하셨단다. 그래서 그 사전 하나를 다 암기하신 아버지. 나는 이 하나만으로도 아버지를 더없이 존경한다.

그 후로는 의학서적들을 독학하셨단다. 알고 보니 꿈이 바로 의사였다. 아버지가 자주 여닫는 책상 옆 궤에는 병원에서만 봤던 청진기·주사기·약솜·물약·알약·고약 등이 꽉 차 있었다. 나와 오빠의 감기나 설사 같은 작은 병들은 아버지 손을 보면 감쪽같이 나았다. 그 뿐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어지간한 병은 아버지한테 진찰을 받았다. 그것도 일체 무료로. 좀 더 말하자면 동네 가축들의 질병도 아버지는 거의 알아서 치료해주셨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를 “맨발의사”라고도 불렀다. 나는 이런 아버지가 있어 또래들 앞에서 얼마나 우쭐했는지 모른다.

“그 군이 뭘 잘 알기는 해도 학교를 제대로 못 다녀 아무 증서도 없는데 뛰어봤자 맨발의사지 뭐.”

나는 맨발의사가 위대한 호칭인줄 알았는데 혹간 이런 말을 얻어듣기도 했다. “도움을 자청할 땐 언제고” 하면서 화가 났지만 아버지의 그 이루지 못한 꿈이 서글프게 가슴에 와 닿아 저도 몰래 우울해졌다. 나로서는 이 정도의 우울함에 그치지만 아버지에게는……

이젠 알 것 같다. 아버지가 왜 자꾸 어머니와 다투려 하시는지. 왜 그 날 눈물을 흘리셨는지.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한으로 맺혀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한. 알아준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는 한. 하지만 그 한풀이를 받아줄 사람은 우리 어머니뿐이고.

“네가 의사 못 하겠니? 멋진 의사가 되어 보려무나.”

“아버지,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겁니다.”

“그러냐. 그럼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

이젠 칠십 고개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에게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마음껏 하고 싶은 공부를 다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한테 말씀드렸던 내 꿈도 이루어 10년 가까이 교사로 일해 왔다. 지금도 친지들과 술 몇 잔 마시고나면

“얘 할아버지 때부터 이 땅에 와서 고생한 보람이 있어유. 우리 가문에 영웅이 났어유.”

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자랑하시곤 한다. 그러시는 아버지의 표정은 평온하시기만 하다. 아버지의 입가에서 잔잔하게 설레는 희열은 내 가슴에 난류를 이루며 흘러들었다.

이것으로 우리 아버지의 한이 풀리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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