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이동렬 장편연재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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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유수(이동렬 장편연재 44)
  • [편집]본지 기자
  • 승인 2009.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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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는 새벽녘에 오줌이 마려워 깨여났다. 곁에 복선녀가 혼곤히 잠들어있다. 당신은 흡사 당신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했다. 당신이면 꿈이고 당신 아니면 생시일것이다. 입에서 혀차는 소리가 부지중 튀어나왔었다. 나는 흩어진 당신의 머리를 매만지였다.

문을 열고 나가자 발밑에 난데없는 쪽지가 떨어졌다.― 오빠, 잘 주무셨어요? 두분의 행복을 빕니다. 축하해요. 전 먼저 떠날게요. 이젠 절 찾지 마세요. 언니가 알아 어찌해 줄거니까. 진수오빠는 만나지 않겠으니 돌아가시래요. 제가 어떻게 설득해보고 련락드리겠으니 시름 놓으세요. 그럼, 안녕. 복선화 드림.

나는 얼뜨럼해 났다. 형이 그럴 리유가 뭔가? 속이 상하고 불가사의해 난다. 궁금증이 증폭되여갔다. 나는 어찌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다가 잠시 눌러있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신을 먼저 내려보내더라도 형을 찾아내야 했다.

낌새 채고 일어난 당신이 밖을 따라나왔다. 뒤로 다가와 내눈을 깜쌌다. 나는 손에 손을 겹쳐놓고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까칠한 살갗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금시 귀전에서 간지러워졌다. 당신은 앞에 나타나 애들처럼 몸을 옹송거렸다. 눈을 맞춰오다가 피하며 수줍게 귀밑을 붉혔다.

나는 오래간만에 그런 모습 보노라 감회에 젖어 말했다.

당신은 엊저녁만큼 달콤하게 자본적 없었노라 속삭이였다. .

우리는 손 잡고 숲속을 천천히 걸어갔다.

간밤에 내린 이슬로 산산한 공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희부옇게 스며든 새벽빛은 엷게 감도는 안개와 엉켜 치근덕거리고있다. 채 가셔지지 않은 어둠은 새벽빛에 밀리워 간신히 안개속으로 잦아들고있고 안개는 연연한 입김 모양 축축한 땅을 핥기도 하고 몽롱한 숲속을 흐르기도 했다. 산은 바야흐로 미지의 생명을 잉태해갔다.

홀연 내 눈에 돌탑 여럿이 밟혀왔다.

당신은 손을 내밀어 이슬 맺혀있는 돌탑을 만져갔다. 딱딱하고 차거운 감각이 내 가슴결에 섬뜩한 기운을 실어왔다. 죽은자의 느낌같았다.

당신이 돌아보며 가만히 흰이를 드러냈다.

안개는 더더욱 농밀해갔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나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 달가닥, 달가닥…

돌과 쇠가 부딪치는 소리, 언젠가 그런 소리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겁은 나지 않는데 몸이 이상하게 떨려났다. 이 깊은 산중에 웬소리일까? 산짐승일까? 등산객?…

결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당신이 한손을 입을 막았다. 내 옷깃을 끄당겼다. 우리는 동정을 살피며 살금살금 다가갔다. 웃음을 터뜨릴듯 어쩔듯 한 당신의 표정을 보고 나는 언녕 의심을 가져야 했다. 지금도 그때의 장면을 생각하면 당신이 괘씸해나고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진다. 도적이 거실을 빠져나가듯, 당신의 손을 잡고 발뼘거리며 다가갔다. 기실 나는 이렇게 신비하게 쓸 아무런 필요가 없다.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적으면 그만일것이다.

누군가 숲에서 삽질하고있다. 삽끝에 맞힌 돌들이 소리를 내고있다. 돌이 무더기로 쌓여있다. 탑이라도 쌓으려는 모양이다.

가만, 왜 하필이면 탑일까? 돌을 보면 꼭 탑 쌓을 생각을 할까?

나는 지리산풍경을 찍은 관광프로를 TV로 본적이 있다. 애들과 사람들이 내가에 앉아 돌탑을 쌓고있다. 갖가지 모양 쌓아놓은 탑들이 경관을 이루었다. 우리 민족 고유의 민속같았다. 소원을 쌓고 마음을 쌓으려는 불심과 천심, 그러니 부러 가꾸는 쉼터에 돌탑이 생겨났다고 이상해할것 없다.

안개가 좀씩 흩어져갔다. 상대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녀자가 아닌가? 그녀였다! 몸이 부르르 떨려났다.

당신이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입술에 안개같은 미소가 피고있다.

이윽고 맥이 진한듯 선화가 돌무지에 삽을 던지더니 어디론가 걸어갔다. 거밋한 형체의 귀틀집 한채가 저만큼 그린듯 솟아있다. 희미한 초불빛이 창가에 비껴있다. 이 산속에 귀틀집이라니? 선화가 왜 여기에 와 있단 말인가?

내 손은 뒤통수에 가 붙었다. 모든것이 명백해졌다.

괘씸하게도 당신은 눈을 찡긋해 보였다. 배신감이 가슴을 허벼왔다.

그때까지도 선화는 낌새를 못채고있었다.

림시 지어놓은 귀틀집안은 비좁은 편이다. 익숙한 냄새가 페부를 찔러왔다. 별로 크지 않은 그림 한폭이 시선을 끌었다. 풍만한 엉치와 젖무덤이 질퍽한 웬녀인의 라체, 요사한 관능이 살아움직이고있다. 오랜 세월속에서 숙성시키고 익혀온 선화의 관능, 나는 고향집 이불속에서 불타고있던 꼬마요정의 모습이 새삼스러워났다.

― 형, 형님, 내가 왔소!

입에서 금방 부르짖음이 터져나올것 같았다.

사내는 꼼작도 하지 않고 문쪽을 향해 모로 누워있었다. 더부룩한 수염이 턱과 뺨을 잔뜩 덮고있어 모습이 전혀 알리지 않았다. 가슴이 형언할수 없이 쓰려났다.

선화가 우리를 발견한것은 그때였다.

"오―빠? 언니?…어찌된 일이야?"

"쉬잇, 그렇게 됐다. 이젠 진규씨도 알아야하니까."

"아이, 그럼 어떻게 해?"

선화가 무작정 나를 밖으로 끌고나가려 했다.

마침 형이 두어번 기침을 깇었다. 낮고 가는 목소리가 여럿의 발목을 잡았다.

"흠, 그놈은 귀신이네라, 선화야 그만두거라."

나는 대뜸 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간신히 기대여앉은 형은 입술이 초들초들 말라있고 두뺨이 홀쭉 여위여 말이 아니였다. 병이 고황에 든것이다. 손을 끄당겨잡으니 바싹 말라있었다. 병원에 안가고 이게 무슨 역사인가? 나는 연방 혀를 찼다.

"형님…"

"귀찮다, 울긴?…괜찮다 마."

나는 유화 한폭을 보고있다. 형무소에서 복역하고나온 19세기 러씨야 죄인의 모습과 같은, 반짝이는 눈빛만이 살아있는 형을 의식시켜주었다.

형은 입안에서 가래침을 뗐다. 싱겁지 않느냐는듯 질문했다.

"왜 날 찾았느냐?"

"그야 뭐, 당연한 일이 아니오?"

"흠, 나좀 편히 놔두면 못쓰냐? 내가 할수 있는 일을 조용히 하게 말이다. 여긴 선화도 있구 정사장님도 있구, 선녀도 이젠 알았으니 다들 날 잘보살펴 줄게다. 내 꼴을 봤으니 이젠 안심하고 돌아가거라."

나는 억울하고 기가 막혀 말이 안나갔다.

형이 피식거리더니 톤을 낮춰 느릿느릿 동을 달아갔다.

"그래, 그래, 찾아올법도 하지. 리유가 있지, 우린 한 피줄을 타고난 이복형제니까! 넌 내 동생이 틀림없다. 나도 결코 널 잊은적이 없다. 널 보면 불쌍한 우리 아버지가 생각난다. 니네엄마도 할매도 인애도, 그리고 뼈아픈 동년시절이 떠오른다. 그러니 우린 만날 리유가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이 있지? 우리 집안은 늘 그랬잖느냐? 나는 항상 외면 당하고 집사람에게 잊혀져있었지!….

아무튼 감사하다. 니가 찾아올줄 알고 정사장님한테 부탁해둔 그림이 있네라. 그것 한폭 소장해두거라. 의미를 두는것보다 나같은 형님도 있었구나, 기억해주면 고맙겠구나.

난 이제야 알았다. 개미가 부지런히 기어다니고 연치가 숲에서 끊임없이 울어대듯, 그림 그리는것 또한 내가 살아가는 진정한 리유라는것을. 내 생애에 진정 할일은 그것 밖에 없었는데…이젠 늦었구나, 늦었어…선화야, 저 초불도 끌때가 되지 않았느냐? 음."

"흑, 형님…"

"오빠 또 보래? 왜 그래? 쩟쩟, 이제까지 잘 견디다가 갑자기 왜 또 마음 약한 소릴하지? 모처럼 동생이 찾아왔으니 기뻐해야할게 아닌감?"

선화가 성내듯 께겨들었다.

"그래, 진규를 봤으니까 시름 놓겠다…난 요새 선화를 시켜 탑 쌓을 돌들을 모아두게 하고있거든. 내가 탑을 쌓고 죽겠는지 내 뼈가 탑에 쌓여지겠는지 알고싶구나. 허허, 그만 하자, 이런 소린…그런데 네놈은 왜 공사장을 찾지 않고 신선놀음을 하고있지? 혹시 너 오사까에 간 녀편네한테 버림당한것 아니지? 헛헛헛."

형은 오래만에 호탕하게 웃었다. 안스레 웃는 시늉을 한다.

문밖에 벌써 새벽빛이 훤히 밝아오고있다. 우리는 형을 부추켜 밖을 나갔다. 나무걸상에 앉은 형의 모습은 이 새벽을 밝히느라 꼬박 밤을 새운 허수아비같았다. 마음을 비운 허수아비라야 어렵사리 밤을 지새우고 날을 밝힐수 있을것이다.

내가 걱정스런 눈치를 보이자 선화가 낮게 말을 흘렸다.

"정기검사를 제때에 하고있으니 근심 말아요. 오늘도 정사장님과 병원에 가 보기로 스케줄 잡아놓았던요. 이젠 하고싶은 일이나 하게 보살펴 드려야지 말릴수 없어요, 그지 오빠?"

"뭐라구? 이눔 기집애, 지금 내 흉을 보고있냐?"

"아니, 아니야, 어제 사찰에 갔다온 이야기를 했다, 괜스리 의심은? 히히."

말투 들어보면 두 사람은 동년으로 돌아가 있듯 싶다.

"사찰에 갔다온 이야기? 허허, 이놈을 피해 여길 왔더니 이렇게 잡힐줄이야? 이도 아마 인연인가 보구나, 안그러냐, 선화야?"

형은 어이없다는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조금 풀린듯한 시선이 내 얼굴에 옮겨왔다.

"흠, 내가 왜 원각사와 이 쉼터를 선택한줄 아느냐?"

나는 알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노라 대답했다.

"그래 알수 없지, 선화한테도 얘기한적이 없으니까. 한 이년전의 어느날 이맘때 쯤였지. 우연히 원각사스님을 만나게 되였네라. 술에 취해 길을 가다 스님을 다쳐놓고 넘어진거다. 몸도 안좋아 비칠거리는데 스님이 나를 부추켜 세워주더라. 나무아미타불, 외우던 스님이 갑자기 한마디 던져오더라. 보아하니 전생에 불(佛)과 인연이 있는것 같은데 한가지 물어봐도 괜찮느냐고? 그래서 괜찮으니 말씀하시라고 했지!"

형은 좀 뜸을 들이다가 입을 떼갔다.

"허허, 스님은 짧고도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하더라. 안해를 네명이나 둔 사내가 있었는데 죽을때가 되여 안해들에게 이렇게 물었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겠냐? 이제껏 나를 섬겼으나 나를 따르겠소? 그러자 남편에게 음식과 수발을 들었던 첫째안해가 랭담하게 거절했데. 서로 만나면 늘 기뻐하고 헤여지기를 극도로 싫어하던 둘째안해도 역시 그러했고, 가끔 만나 지난일을 회상하며 즐겁게 보냈던 세째안해도 거절했단다. 그러나 그간 별로 돌보지 않던 네째안해가󰡐이미 평생을 같이 했는데 무엇을 못하겠습니까?󰡑고 따라 나서더래. 스님은 곧 부처님께서 이 비유에 대하여 말씀하신게 있는데 들어본적이 있느냐, 네 안해는 사람의 무얼 가리키는지 아느냐 묻더라. 음, 너희들도 한번 맞춰보지그래? 허허."

물론 우리는 모를수 밖에 없다.

형이 빙긋 웃더니 해석을 덧붙혔다.

"음, 부처님께서 비유한것은 첫째 안해는 사람의 육체요 둘째 안해는 재산이며 세째안해는 친지이고 네째 안해는 사람의 마음이다. 우리가 오직 가지고 갈수 있는것은 닦은 마음뿐이다, 하시더라. 마음을 닦는 일, 그게 내가 이곳에서 또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곁에서 도와주니 창작에도 도움이 되고 모두에게 감사하다. 나무아미타불, 허허."

형은 오른손을 스님들처럼 치켜세우셨다. 이마 숙일사하고 념불을 하신다.

선화가 참지 못하고 손벽치며 깔깔거렸다.

"저런, 오빠에게도 불심이 있나? 와 놀랍네, 다시 보게 되네."

"빌어먹을 기집애, 사람을 놀리려드냐?"

형의 말은 의연히 거칠고 상스러웠다. 도를 닦은들 본질이야 어찌 고치랴? 그래도 비유가 너무 맘에 든다. 나는 오래오래 음미해보았다.

막강한 새벽빛이 숲속에서 각일각 밝아지며 활개쳐왔다.

동이 트고있었다.

<다음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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