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이야기, 르우벙, 버스 (쩐띠녹뚜엣 수기)
쩐띠녹뚜엣 (효성산업) (노동부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 미담수기 공모전 장려상)
< 계란이야기>
거의 9년 전 1999년 10월 1일, 나는 처음으로 한국이라는 땅에 발을 디디었다.
나는 대구에 있는 회사에서 일을 하였다. 회사에서 처음 일을 시작할 무렵 우리들은 한국음식을 입에 댈 수 없었다. 점심식사 시간이 되면 식당음식냄새로 음식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거의 눈물로 밥을 먹곤 하였다. 그래도 다행히 우린 계란은 먹을 수가 있었다.
뭐라고 하든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가장 재빠르고 극성스러웠던 아이였다.
식당아줌마에게 계란이라는 걸 온갖 제스쳐로 표현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아이디어가 번득였다. 나는 즉시 약 40명의 공장직원이 있는 식당 안의 사람들 앞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들어올려 엉덩이를 “꽥꽥”손을 퍼득거리며, 엉덩이로부터 두 손가락을 동그랗게 만들어 계란의 모양을 묘사해 보였다.
그걸 보는 사람들은 모두 식당에 암탉 한 마리가 알을 낳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식당 안은 먹지 않아도 배부를 만큼의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나 난 얼굴이 빨개지고 창피해 어디라도 숨어들어갈 구멍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린 매일 갖가지 계란요리 삶은 계란, 계란찜, 계란후라이, 계란볶음...등 으로 식당아줌마의 보살핌을 받았다.
9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매번 문득 계란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면, 혼자 웃음을 짓곤 한다.
이제는 한국어로 말하고 들을 수도 있게 되었다. 현재 나는 안산노동자지원센터에서 한국어수업을 받고 있다.
내년에 계약기간이 종료되어 베트남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내 가슴속에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늘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 계란 이야기속의 주인공이 바로 나이다. 그 이후로 우리 공장사람들은 나를 닭 뚜엣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한국음식을 먹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맛있게 음미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 글을 독자 여러분들이 읽고 어떻게 느끼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힘들게 근무하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기쁨을 가져다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르우벙 : luu vong � 멀리 생계를 위해 고국을 떠나 근무하다가 근로계약이 종료되어도 귀국하지 않고 머물러 사는 것, 또는 그런 사람을 의미함 >
장난끼 많고, 독단적이고 또 자립심이 강하며 개성이 뚜렷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의 문을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웃집 몇몇 사람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 나는 그때 왜 그들이 자식과 아내와 멀리 떨어져야 하는 지 알 순 없었다) 나는 내가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 멀리 떨어질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때 어머니는 나에게 물었다
“ 너 외국에 가고 싶니 ? “ “ 왜요 엄마 ? “
어머니는 말씀하시길 남들이 가니까 우리도 한번 가보자꾸나! 그래 ! 가자 ! 어쨌든 집에 있는 건 지루하니까 !
그래서 바로 다음날 부모님께서는 서류를 사다가 나에게 건네주셨다.
서류를 제출하러 나 혼자 길을 나섰다. 입학을 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출국을 위한 비자통보서가 나왔다.
이제 나도 남들처럼 외국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간이 너무 짧아서 한국어를 많이 배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수업을 받은 기간 동안 한국어선생님께서는 한국에 가서는 절대로 르우벙들과 친해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을 알게 되면, 우리들을 괴롭힐 것이고 일을 해서 그들을 먹여 살려야만 한다고 하셨다.
내 머리속에선 르우벙은 가장 두려움의 존재가 되었고, 반드시 피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나의 회사는 대구에 있었다. 나와 친구 그리고 한 명의 언니가 동행을 했다.
나는 그때 핸드폰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와 함께 집에 전화를 걸기 위해 공중전화 박스가 있는 곳으로 나갔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한 베트남 남자가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밖에서 기다렸다.
베트남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르우벙을 피하라는 말을 명심하고, 아무말도 걸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남자는 우리가 한국에 막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우린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 남자는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회사가 우리회사 근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얘기를 잠깐 하다보니 내가 머릿속에 늘 그려왔던 그런 르우벙과는 달리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남자에게 여기 온지 오래되었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는 한국에 온지 3년이 넘었고 르우벙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우리 둘은 마치 손에서 손으로 힘을 전해주기라도 하는 듯이 두 손을 꼭 잡고 온 몸은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그 때 우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손을 잡고 회사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리곤 문을 꼭 잠그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온 언니들은 우리더러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 봤지만, 우리로부터 아무런 답도 들을 수 없었다.
방안에 있던 우리 둘은 겁이 나서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날은 우리가 한국에 온 후 맞는 첫 번째 토요일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머물고 있던 기숙사에 언니들 친구가 놀러 오게 되었다.
언니들은 우리들 방으로 와서는 언니들 방으로 건너와 놀자고 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생각없이 우리들은 언니들 방으로 건너갔다/
방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손님이라고 하는 사람이 바로 얼마 전 우리가 만났던 그 르우벙의 남자가 아닌가...
방에 들어서, 우리가 인사를 건네야 했지만, 대신 언니가 여기 온지 얼마되지 않았다고 소개를 해주었다.
우리는 침묵했고 그 남자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는 모습이었다.
며칠 후 아마도 그 남자는 이전의 우리가 도망갔던 이야기를 언니들에게 전해주었고, 우리들도 언니들에게 ‘르우벙 이야기’를 언니들에게 해주었을 때 모든 것이 다 밝혀지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 우리와 르우벙과의 관계는 좀 더 가까워지고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사실 르우벙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쁜 그런 사람이 아니였다.
지금은 우린 하나가 되었고,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사랑스런 아들의 아버지이다.
잘생기고 착한,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친절한 남자
우린 이제 막 1학년으로 입학한 아들이 있다.
지금도 우리 남편은 여전히 르우벙이며, 나는 당당히 합법적으로 새로운 근로계약을 맺어 일하고 있다.
나는 우리를 이렇게 만나도록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선생님의 르우벙이라는 각별한 당부의 말씀으로, 그래서 우리가 작은 가족의 구성원이 될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나는 정말 행복한 아내이다. 르우벙은 내가 늘 생각해왔던 것처럼 끔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다 그들도 먹고 살기 위해 , 돈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을...
나의 남편친구들 모두 르우벙이다. 그들은 다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다.
이제 내 머릿속에는 더 이상 어떤 편견도 남아있지 않다.
모두다 그저 좋은 친구들일 뿐이다.
< 버스 >
한국에 와 1주일이 지난 후, 나는 혼자 버스를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버스에 올라 탈 때면, 나는 그 당시의 기분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한국에 나보다 한달 먼저 온 아저씨를 알게 되었는데, 아저씨는 우리 회사에서 한 시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한국에 와 이틀이 지나서야 아저씨와 연락이 되었고, 아저씨는 우리회사에 와서,
우리 회사에서 아저씨 회사까지 버스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일요일이 되었다. 아저씨는 나를 데리러 올테니 아저씨 회사에서 놀자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 저 혼자 갈 수 있다니까요~ 아저씨는 먹을 거나 준비하세요~ “ 라고 말했다.
저녁 10시가 되어서도 난 도착하지 않았다. 전화기도 없었다.
아저씨 집까지 가려면 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나는 아저씨 집으로 가는 곳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고 만 것이다.
버스에 앉아 2시간이나 지난 뒤, 난 버스를 잘못 탄 것임을 알아챘다.
그러자 난 겁이 나서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버스운전기사 아저씨에게 다리를 동동 구르며,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내리겠다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시간은 이미 밤 9시가 다 되어가고, 주변의 거리는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질 않았다. 온통 산과 허허벌판 뿐...길가의 희미한 가로등조차 없었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무서운 나머지 울 것만 같았다. 아니 정말 울었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마법이라도 부릴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법이 정말 이루어졌다. 자동차 한대가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겁도 없이 길 한가운데로 달려들어가 차를 세우려고 했고, 그 차는 멈추었다.
차 주인이 상황을 파악할 사이도 없이 나는 추위에 떨고 울면서 그 남자의 차로 달려들었다.
그 남자는 나에게 뭔가를 물었지만, 나는 울면서 “자인(아저씨가 있는 곳 이름)” 이란 말만 할 뿐이었다. 아마도 그 남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하는 듯 했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그 남자는 나에게 많은 질문을 했지만, 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한국에 오기 전 “ 도와주세요 “ 라는 말을 선생님께 배워서, 난 계속 “ 자인 도와주세요” 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 남자는 알아들었는지 아저씨 집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나는 아저씨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차 주인에게 연신 고개를 정말 많이 숙이고 또 숙이면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만 몇 번이고 하였다.
아저씨는 “ 다 운이 좋아서 저런 좋은 분을 만난거란다~ . 다시는 혼자 다니지 마라~ 알았니? “ 라고 하셨다.
그 이후로 나는 어디를 가든지 꼭 지인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아저씨집에 갈 때는 내가 탈 버스를 정확히 확인하는 걸 잊지 않는다.
고마워요 아저씨 ! 고마워요 친절한 한국아저씨 !
그날 사건 이후 난 버스를 타도 길을 다시는 잃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