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길 (닛따 히로끼 수기)

(노동부 외국인근로자 고용/ 취업 미담수기 공모전 장려상)

2008-12-20     [편집]본지 기자

1. <방한 동기>

안산시에 위치한 자동차부품생산회사 사장의 요청으로 현해탄을 넘은 것이 2002년 벚꽃이 필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이 회사가 생산하는 부품의 품질향상에 대한 기술협력을 하는 일본의 프리랜서 엔지니어입니다.

철이 들 무렵부터 한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저를 포함한 많은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한국인을 멀리하는 생각’들이 확실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어렸을 때 한국인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어 한국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역사적인 사실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일본이 과거 한 때 한국을 식민지화했던 것은 사실이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발발한 6.25동란의 특수경기로 인해 경제적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소련이 붕괴된 현재,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공산주의를 억제하고 있는 것은 한국의 군대가 아닌가.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경제적인 협력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청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1982년부터 만으로 약 6년간 미국에서 근무했을 때, 한국인이 아무것도 몰랐던 저희 가족을 아주 친절하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이 때부터 저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던 한국인에 대한 생각들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은 과연 무엇일까? 한국인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가슴에 품고 그 원인을 찾고자 하는 마음과, 저의 보잘것없는 기술협력이 한국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그 미안한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저를 한국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2. <민비>

지금은 공사 중이지만 저는 경복궁에 갈 때마다 민비의 묘비에 참배를 합니다. 1895년 조선주재 일본공사에 의해 참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만행입니다. 독립국의 그것도 여왕을 참살할 권리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묘비는 궁전 뒤뜰의 연못 근처에 있는데 일요일에도 일본인 관광객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는 벤치에 앉아 연못을 바라보면서 먼 옛날의 일을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복궁의 관광안내원에게 ‘왜 민비의 묘비에 일본인을 안내하지 않나요?’하고 물었더니 그녀는 눈을 떨군 채 ‘저희들에게는 힘이 없으니까요…”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안내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고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몰랐습니다. 그 얼굴에는 과거의 일이라고는 하나 명백한 분노와 슬픔이 어려있었습니다. 저는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지만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100년도 훨씬 이전의 역사상 사건이 마치어제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40세 중반이라는 민비의 나이는 인생에 있어 한창 나이이며 그 억울함은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도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는 듯 합니다.

3. <남대문 소실>

남대문은 지어진 지 600년이 흘렀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국보 1호로 지정,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유산이기도 합니다. 당당하게 자리를 지켜왔던 귀중한 국민의 재산이 이렇게도 쉽게 무너져도 되는 것일까요? 명동 근처에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았던 남대문은 이제 없습니다. 불타오르는 남대문을 보면서 남대문에게 용서를 비는 사람들, 그 자리에 쓰러져 우는 사람들… 다음 날 남대문의 제단에 하얀 꽃다발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참살된 한국 최후의 여왕 민비의 묘비 앞에서 본 광경과 일치한다는 생각에 저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을 때처럼 흥분되었습니다. 100년 전의 역사적인 사건에 바치는 하얀 꽃은 한국인의 슬픔과 함께 용서를 구하는 상징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지금도 맥맥히 흐르고 있는 민비에 대한 사모와 회한. 그리고 생명이 없는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죽은 것처럼 생화를 바치는 사실은 남대문이 얼마나 한국의 자랑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앞에서 말은 어느 정도의 힘이 있을까요? 사실 앞에서 말은 필요 없다는 것을 저는 지금 확실히 알았습니다.

4. <독립기념관>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혼자 버스를 갈아타고 간신히 독립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양손을 높이 든 형상의 건물은 자유와 독립을 쟁취한 기쁨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문을 표현한 밀랍인형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눈을 돌리지 말고 똑바로 바라보자고 마음먹고 올 봄 다시 독립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사진촬영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 3,4호관을 제외하고는 괜찮다고 하였습니다.

-촬영할 수 없는 이유는 뭔가요?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왔는데요.

-규정이 그렇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저를 경찰에 신고하나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지만 사진은 찍지 말아 주세요.

경비원이 저를 찾았던 모양인데 발견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사무실에 들렀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사진은 찍으셨나요?

-찍었습니다.

-이 기념관은 한국 국민의 기부금으로 건설되었습니다. 반일감정을 부추기기 위해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사무실에 있던 여성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사물에 대해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초등학생도 견학을 하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들이 보아도 반일감정을 갖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나요?

저는 그렇게 말하고 복잡한 심정으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어떤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독립기념관에 있는 밀랍인형 전시는 좀 지나치지 않나요?

-히로시마 원폭기념관에 가보세요. 그곳에 무엇이 있나요? 원폭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표현한 밀랍인형이 있지 않습니까?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자란 제가 원폭기념관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토에 귀무덤(미미즈카)이 있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저는 한국에 와서 두 번째로 말문이 막혔습니다. 저는 그 때의 무례함을 사죄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독립기념관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5. <유관순 기념관>

‘유관순열사의 상’은 지금도 저의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제 기억에 ‘용서해 주세요’라고 썼던 것 같습니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맑고 평화로웠습니다. 1919년 이처럼 아름다운 마을에서 그녀는 어떻게 체포되었을까.

최근 TV에서 미국의 종군기자가 몰래 촬영한 나가사키 원폭 직후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죽은 동생을 등에 업고 꼼짝하지 않는 소년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촬영한 종군기자는 40년 넘게 극비로 간직하고 있던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 소년에게 무슨 죄가 있나요? 미국은 명백한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공언하고 타계했다고 합니다. 퇴역군인들이 원폭투하의 정당성 및 업무명령위반(극비리에 실시한 목적 외 사진촬영)에 대해 비판하는 인터뷰도 TV에서 동시에 볼 수 있었습니다. 새삼 확인할 필요도 없지만 자유주의사회에서 개인의 의견은 자유입니다. 다양한 의견이 있고 이를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겠지요. 그러나 사람에게는 인간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 있고 허용되는 범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가 인간으로서 행한 행동(극비리에 실시한 목적 외 사진촬영)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진 속의 소년과 유관순열사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가냘프고 연약한 소녀를 감옥에서 죽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16살의 소녀를 잡아서살해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녀는 미성년자였고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의무에 충실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인간으로서의 길이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체제 속에서 잘못된 것을 강요 받을 수 있으며 반대할 수 없는 환경도 존재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길을 벗어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있습니다.

당시 열강에 둘러싸인 일본에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에 일본인이 한국인들에게 준 여러 고통은 현재를 살아가는 저의 직접적인 책임은 아니지만 사실을 사실로써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며 이는 우리 일본인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얼마나 한국에서 지내게 될 지 모르며 저 한 사람의 힘은 아주 미약하지만 이러한 뜨거운 마음을 가슴에 품고 매일 매일 일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한국에 도움이 된다면 제가 갖고 있는 마음의 부담이 조금은 덜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도 조금씩 치유되어 결국은 없어지리라 확신합니다.

PS:중앙동 구두수리점에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백호부대의 용사가 살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 사진과 함께 상장을 가게에 붙여놓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찾아가면 기뻐하며 소주를 사주기도 합니다. 그는 일을 하면서 저와 함께 소주를 마시고 일본어, 한국어, 영어가 섞인 대화를 나눕니다(지금도 한국어가 서툰 저에게는 이처럼 여러 언어를 섞어가면서 하는 대화가 편합니다). 젊은 여자 손님들이 이상한 눈으로 저희들을 바라보곤 하지만 이곳은 저의 마음이 편해지는 안식처입니다.

2008년 9월 10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