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환대” : 불법체류사면 이후 조선족 동포/노동자의 일과 삶(2)

한국이민학회발표문- 권준희 논문

2008-12-02     [편집]본지 기자

IV. “우리는 같은 민족인데”: 추방정책에 대한 문제제기들

추방은 가능성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본 연구자가 인터뷰한 30명중 3명은 추방을 당하거나, 외국인보호소에 호송된 경험이 있었다. 그들에게 이 추방의 경험은 경제적인 근거를 완전히 박탈하는 동시에, 굴욕적이고 자기 존중감을 완전히 짓밟히는 기억이었다. 특히, 외국인 보호소로 호송되는 과정에서 당시 담당관들의 말투와 태도는 상당히 위압적이고 폭력적으로 기억되어, “어떻게 같은 민족한테 이럴 수 있냐” 라는 언설이 반복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다음의 사례들은 체포와 호송의 과정, 그리고 추방의 경험을 통하여 조선족 노동자들이 한국이라는 공간과 어떻게 관계를 조정하고 이해하는지를 보여준다.

연변에서 온 G 여성은 한국에 “시집온” 동생의 초청장으로 1991년 한국에 처음으로 입국했다. 남편은 중국에서 공산당 간부로 높은 직책에 있었지만, 알코올 중독과 가정폭력이 반복되면서, 이 여성은 한국으로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한국에 온 후, 여기저기 식당을 다니며 2년간 일을 했는데, 하루는 무작정 들이닥친 경찰에 잡혀서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사실, 추방을 당해도, 내가 불법체류자니까, 달리 할 변명은 없었지만, 그래도 추방당하니까, 정말 악이 나더라.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냥 여기 와서 돈 번 죄 밖에 없는데. 그래도 같은 민족한테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그런데 중국으로 돌아가니까, 어둡고, 더럽고, 버스도 낡고, 바람 불면 먼지 날려서, 살기 싫더라. 내가 이렇게 추방당했으니까, 결혼이라도 해서 다시 한국에 가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중국으로 돌아간 후 “좋은 한국 남자”를 수소문해서 결혼하기로 했다. 뭐 잘 안되면 “달아나버리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 결혼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결혼이후 바로 국적을 얻은 후, 이 여성은 당당하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너 그 능력에 한국 남자한테 시집 가냐”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래도 한국에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좋기만 했다. 식당에 취직할 때에도, “교포라고 안 쓰는 게 어디 있는가, 나 여기 시집온 사람이다, 이제 한국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더 당당해질 수 있었다고 했다. G 여성은 한국남성과의 결혼을 통해서, “추방된” 조선족노동자로부터, 한국국적을 가진 “한국사람”으로, “진짜 동포”로 본인을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일터에서 자신의 사회적 근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불법체류자 단속에 적발된 경우, 조선족동포들은 “동포”로도 “노동자”로도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한다. 일단 “걸리면” 나가야 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에, “안 잡히는 게” 최선이지만, 도처에 널린 감시의 시선 때문에, 단속을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에서 언급되었던 심양에서 온 E 여성은 불법체류자 단속을 나온 담당관과의 몸싸움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난 그때, 갈 곳도 없고 해서, 식당에서 의자 붙여 놓고 먹고 자고 했다. 그런데, 누가 불었는지, 갑자기 단속반이 들이닥쳤다. 난, 그랬다. 갈 때 가더라도, 인수인계는 하고 가야 할 거 아니냐, 하면서 법무부 남자랑 싸웠다. 몸싸움이 되었고, 서로 분이 안 풀렸다. 붕대까지 맨 법무부 남자는 내가 씨팔년 때문에 개고생 한다...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씹팔러 왔냐, 일하러 왔지, 중국에서 우린 그런 욕 쓰지도 않고, 도저히, 그런 욕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E 여성은 추방의 과정이 아주 굴욕적이었지만, 한편으로 돈도 충분히 벌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이 여성은, 아직 집도 못 샀고, 애들 학비도 대야 하는데, “빈털털이”로 집에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속상해 했다. 인터뷰 당시, 어떻게 “같은 민족”한테 그렇게 욕하고, 때리고, 무참하게 대우할 수 있는가 라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지만, 중국으로 돌아간 후, 가정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중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밀입국으로 한국에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그렇게 “무참한 고국”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특히, 추방이나 외국인 보호소에서의 굴욕적인 경험은,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있을 때, 더 배가 된다. 연변에서 온 H 여성은 2000년 한국에 입국한 이후, 체중이 64Kg에서 43kg로 급격하게 감소했다. 장시간 고강도의 노동을 견디어 내는 것도 생각보다 힘들었고, 티슈, 포크, 스푼 등의 영어단어도 못 알아들어 “바보”처럼 한동안 지냈다. 또한, 연변사투리가 티가 나면, 한국 남자손님들은 “중국년들이 돈 끌어간다” 고 뒤에서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일상생활에서의 고단함과 한국인들의 무시가 견딜 수 없었지만, 천만 원 빚을 생각하면 도저히 중국에 돌아갈 수 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식당 내 직원들을 성희롱하다가 해고당한 남성 직원이 “불법”으로 일하던 조선족들을 신고해서, 이 H 여성은 외국인 보호소에 수감되었다.

난 잡혔어도, 절대 중국에 못 돌아간다고 버텼다. 중국집에는 걱정할까봐 전화도 못하고. 24일 동안 외국인 보호소에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새까만 사람들이랑 같은 대우 받는 게 정말 너무 섭섭했다. 어떻게 그들과 내가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가. 우리는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인데. 같이 수감되어 있던 외국인들이, 너희 우리보다 더 억울하다고 하더라.

이 여성은, 24일 동안 수감된 이후, 한국인 보증인의 신분보증으로 보호소를 나오긴 했지만, 한 달 뒤 다시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재입국 사면 조치가 내려질 때까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했지만, 2004년 당시, 가속화된 추방정책 때문에, 벌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고, 그냥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기다렸다. 인터뷰 당시, 한국 사람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대다수의 “불법” 체류 조선족 동포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조선족 동포들은 거센 추방정책에 대하여 강한 반감과 억울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정부의 선처만을 무기력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 언급된 세 여성들의 사례는 “동포”이면서 “노동자”라는 복합적인 조건에 처한 조선족 여성들이 법무부의 추방정책과 직접 대면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자신과 한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규명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추방되었던 두 명의 여성은 결혼이나, 밀입국을 통해서 한국에 재입국한 이후, 어떻게 한국사회와 관련을 맺어갈지를 재설정하였다. 결혼을 통해서, 한국국민으로서 사회적 존재를 인정받게 된 G 여성은 본인의 “조선족”이라는 정체성과 “한국인”이라는 새로운 삶의 근거를 동시에 전면에 내세우면서 일터에서 한국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E 여성은 중국에 추방되면서, 경제적 근거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중국에 있던 남편과의 관계도 파탄나면서, 한국으로의 재입국이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절대적인 목표가 되어 밀입국을 선택하였다. 그녀는 추방의 과정에서 경험한 모욕 때문에라도, “중국사람” 티를 안내려고 노력하면서, 한국사회에 재정착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새까만” 사람들과 함께 수감된 H 여성은, 한국사회 내에서 조선족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절감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중국에는 되돌아 갈 수가 없었다. 이 세 여성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라는 조건이, 노동시장에서도, 법제도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조선족의 대우를 개선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004년 서울, 수십만의 “불법” 조선족 노동자들의 미래는 예측 불가능 했고, 어떠한 법도 그들을 “동포”라는 이유로 보호해 주지 않았다.

V. 뒤늦은 환대: 불법체류자, 벌거벗은 생명, 예외적 포함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대표 저작,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일단, 인간은, 그들의 고향을 떠나게 되면, 홈리스가 되고, 나라를 떠나게 되면, 그들의 인권은 박탈되어, 권리가 없는, 이 땅의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아렌트 2004:267)라고 언급했다. 특히, 아렌트는 시민권과 인권을 구분하지 않고 논의하면서, 국가의 법적 제도적 통치성이 인간의 조건을 보호하고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임을 강조한다. 아렌트의 이러한 주장은, 1차, 2차 세계대전 이후, 유태인에 대한 대규모의 학살과 폭력이 팽배하던 당시, 국민국가만이 국민을 보호해줄 수 있다는 절박한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특정한 국가의 국민으로 소속되지 않고서는,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렵다는 것은 지구화가 가속화되는 현재에도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국가의 통치권 밖에 놓인 자들은 어떻게 국가와 관련을 맺을 것인가?

이 질문은 근대국가가 개별적인 개인이 아니라, 추상적인 대규모의 인구를 관리하고 통치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한 미셀 푸코의 논의와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근대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폭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기구(베버 1946)이지만, 그 방식은 비단 물리적인 폭력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 이나 <통치성 Governmentality>라는 대표 저작들을 통해서, 국가가 특정한 주체를 통해서 폭력과 권력을 행사하기 보다는, 철저하게 정교화 된 감시체계를 통해서, 인구와 그들의 신체에 관련된 지식을 확보하고, 체계적인 관리를 유지할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근대 국가는 폭력에 기반을 둔 통치성을 넘어, “자동적이고”, “항상적이고”, “효율적인” 미시통치체계를 구축하여 인구관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렌트와 푸코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종합한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Homo Sacer> 라는 책에서 “벌거벗은 생명 bare life”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아감벤은 근대국가는 법적 제도적 권력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관리까지 포함하는 정치권력(biopolitics)을 확장 발전시키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zoe”라는 개념-인간의 특별한 속성, 즉, 사회적 선을 함께 추구하는 정치적 속성-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국민국가 내 정치적 활동 범위 내에 포함되지 못하는 호모 사케르의 삶의 조건을 소개한다. 호모 사케르는 죽여질 수는 있지만, 종교적으로 제물화 될 수 없는 인간이다. 로마법에 의하면, 이 인간은 죽여짐으로써만, 즉, 사회적으로 배제됨으로써만, 법적인 체계에 포섭될 수 있다. 이를 국가의 통치성 논의와 연결시켜본다면, 국가는 법의 내부와 외부에 모두 존재하면서, 통치성을 확대하고, 때로는 통치를 위하여 “예외 State of exception"의 환경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예외는 ”무질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 조치가 유예된 지점이다. 통치성이 이 예외의 상황을 만들고, 이 예외의 상황은 통치성과 연결되어서만 존재한다(Agamben 1998: 18).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 bare life", "배제적 포함”, 그리고 “예외 state of exception"라는 개념들은 로마법과 서구적 맥락에서 논의가 발전된 것이지만, 불법체류자로 살아 온 조선족들의 삶을 분석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위에서 언급된 조선족 여성들의 사례가 보여주듯, 대부분의 조선족 동포들은 한국 사회 내에서, 법제도 밖에서 존재하는 벌거벗은 생명 bare life 으로써, 오랫동안 추방에의 위협과 사회적 배제와 차별을 견디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이들은 "동포”라는 개념을 적극 활용하면서 포함의 지점을 찾기 위해서 주장하고, 농성하고, 그들의 입장을 지속적으로 정치화시켜 왔다. 특히, 재외동포법 개정 이후 지속된, 자진입국유도와 사면화 조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통치권을 적극 활용하여, 국가의 예외조항을 만들어 냄으로써,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주변화 되고 배제되었던 “불법” 체류 조선족 동포들을 포함시켜 낸 것이다. 하지만, 국가가 통치권의 예외조항을 반복적으로 행사하면서, 안과 밖, 포함과 배제의 경계가 애매모호해진다는 아감벤의 논의(Agamben 1998:85)는 조선족의 삶의 조건을 해석하는데 적절한 것인가? 한국사회는 이 재입국 사면화 조치를 통하여 조선족들을 “동포” 또는 “노동자”로써 사회적으로 통합하고, 환대하게 되었는가? 여기에 데리다의 “환대”라는 개념을 빌려와 논의를 확장시켜보자. 프랑스 철학자 쟈크 데리다는 <환대에 관하여 On Hospitality>라는 책에서 손님에 대한 환대의 개념을 국가의 이방인에 대한 관계까지 적용하고 있다. 환대 hospitality는 집의 주인과 손님을 구분한다. 즉, 주인은 본인의 집에 대한 재산권과 여타 권리를 소유하고 있고, 들어온 손님이 그 집을 다른 수단을 통해서 장악하지 않도록 손님을 감시하고 관리해야한다. 따라서, 손님과 주인의 경계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하며, 손님은 여전히 타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조선족들은 2006년 사면화 이후, 더 이상 불법체류자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법적인 체계에 통합이 되었고, 외국인등록증을 받고, 이동의 자유를 얻게 되었지만, 이들은 어떠한 조건으로 통합된 것인가? 조선족들이 처했던 “벌거벗은 생명 bare life” 의 삶의 조건은 한국사회 내에서 배제적으로 포함되었는가? 조선족은 과연 “환대”받는 동포이거나 노동자가 되었는가? 다음은 2006년 대규모 사면 조치이후- “뒤늦은 환대”- 조선족들이 한국사회와 어떠한 지점에서 통합하고, 또 어떠한 지점에서 그 통합을 유예 또는 거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VI. 합법적으로 싼 동포 노동자: 방문취업제와 H-2 비자

2008년 7월. 본 연구자는 한국에 재입국한 조선족 동포들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투쟁하고, 농성을 통해 얻어낸, 재외동포법 개정으로 이렇게 “좋은 정책”, “좋은 비자”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투쟁에 참여했던 본인들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면서, 한국정부의 “환대”에 감사해했다. 이 환대의 결과, 조선족 동포들은 자유로운 왕래와 자유로운 구직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불법체류자 추방에 대한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2004년, 개정된 재외동포법에 따르면 재외동포는 1) 외국에 영주할 권리를 가진 재외국민 2) 부모 또는 조부모 일방이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한 적이 있었던 이들(대한민국 건국 이전까지 소급)을 포함함으로써, 1948년 이전에 중국으로 이주했던 대부분의 조선족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법의 개정이 직접적으로 조선족 동포들의 출입국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법무부는 2007년부터 방문취업제라는 제도를 도입하면서, 재입국하는 동포들과 무연고 동포들을 H-2 비자로 통합하여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동포들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법무부는 이 비자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의 실질적 적용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받아온 중국 및 구소련 동포에 대한 차별해소 및 포용정책의 일환으로 도입 2) 이들에 대한 입국문호 및 취업기회 확대 등으로 한민족 유대감 제고 및 고국과 동포사회의 호혜적 발전의 계기 마련. 한국정부의 이 “환대”의 조치는 불법체류자들을 대규모로 사면하면서 동시에, 중국내 무연고 동포들이 한국에 입국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환대의 조치이후 조선족 동포들이 삶은 어떠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을까.

87일간 재외동포법 개정 농성에 줄곧 참여한 A 여성은 7년 만에 중국에 돌아갔다. 그동안 큰아들은 대학을 졸업해서 직장인이 되었고, 중학생이었던 둘째 아들은 청년이 되었고, 남편은 많이 늙고 병들었다. 연변도 많이 발전하여, 높은 건물들도 많아지고, 도로포장도 예전보다 훨씬 잘 되었고, 빠른 길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연변에 돌아가니까, 답답하고, 더럽고, 불편하고 첫 석 달은 계속 짜증만 났다. 일도 못하고, 돈은 못 벌고 쓰기만 했다. 또 씀씀이가 커져서 벌어온 돈은 금새 바닥이 났다. 한국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한국은 부엌도 편리하고, 야채도 잘 다듬어진 것을 팔아서, 여자들이 살기 정말 편한 곳이다. 그녀는 반복적으로 한국과 연변의 생활과 상황을 대조하면서, 본인의 생활이 얼마나 한국화 되어 있는지를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오랫동안의 한국생활과 동포에 대한 법적포용에 의하여, 그녀는 한국사회에 성공적으로 통합되었는가? 그녀는 재입국 이후 한국과의 거리를 다음과 같이 재조정했다.

난 한국남자, 여자 다 싫어요. 사람들이 정이 없어. 한국은 그저 돈 벌기 좋은 나라니까 좋지, 나는 그냥 돈만 벌겠다는 생각뿐 이예요. 이번에 와서 돈을 좀 모았지, 지금 600만원 보내고, 이번에 집에 갈 때, 내가 500만원 가져가고, 지금까지 1300만원 모았으니까, 우리 연길에다가 곧 아파트 살 수 있게 될 거예요. 엘리베이터 있는 아파트로 사고 싶은데. 우리 식구들이 다 연길로 나가서 살아야지. 돈을 모아서 뭘 할까, 그 생각뿐이지. 이번에 5년 다 차면, 또 한국 나와야지. 내 힘이 닿을 때까지 한국에 계속 있을 거야. 연길에 아파트 사놓고, 거기에 아저씨 살고, 애들 왔다 갔다 하고, 난 한국에서 계속 일할거야. 애들도 남편도 알지, 아버지가 몸이 약하니까, 내가 혼자서 고생했다는 거, 99년에 한국에 올 때, 큰 아들 대학 들어갔으니까, 내가 번 돈으로 큰 아들 장춘에서 대학 공부시킨거지

이 여성은 7년 이상의 한국생활을 통해서, 한국 사람들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터득했다. 그녀에게 한국은 돈 버는 “수단”으로서의 공간이며, 미래를 향해 나가는 발판으로서의 공간이지,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관계를 맺고, 사회적 근거를 만드는 공간은 아니다. 또한 이 여성은 재외동포법 개정을 위한 농성에 열심히 참여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정캇 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며, 일당이 높고, 일이 쉬운 식당을 찾아다니면서, 본인의 미래를 준비하고 책임지는 원자화된 도시노동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이 여성은 동포라는 정체성을 전면으로 내세우기 보다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식당 노동자가 되는 것을 훨씬 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역시 농성에 참여했고, 사면화 조치로 재입국한 H 여성도, 한국에서 번 돈으로 아파트도 사고, “한국식”으로 내부 장식도 하고, 아들도 천진에 있는 대학에 보냈다. 원하는 건 대부분 이룬 것 같은데, 재입국 기회가 있어 또 나왔다.

내가 누워서 생각하지. 내 가슴을 치면서, 이 미친년, 돈이 뭐라고 이렇게 또 나왔어. 그만큼 벌었으면 됐지. 무슨 영화를 보자고 한국에 또 나왔어. 그래도 내가 연변 있으면 뭐해, 할 일도 없는데. 그리고 늙으면 그 퇴직금으로 살 수도 없는데. 이제 중국도 물가가 비싸서, 돈 있는 거 금방 다 까먹어. 그러니, 내가 오십도 안 됐는데 부지런히 벌어야지

불법체류자로서 외국인보호소에 호송되었던 이 여성 역시, 6년 만에 중국으로 돌아간 후, 중국에서 지내는 게 너무 어려웠다고 했다. 연변 공장에서 일했던 그녀는, 중국 돈 천원(한국 돈 약 15만원)도 안 되는 퇴직금을 받는다. 하지만, 오랜 한국생활 탓인지, 씀씀이가 커져서 그 돈으로는 중국에서 한 달도 살 수 없다고 했다. 중국에서는 경제적 근거가 없어져버렸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경제가 악화되고, 환율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한국은 더 이상 풍요와 발전을 약속하던 희망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연변에서 재입국한 I 여성의 이야기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옛날에는 한국가면 돈 왕창 번다 그래서 무조건 오고 싶어서 왔지. 나도 돈을 많이 벌었고. 농촌에서 나와서, 도시에다가 아파트도 샀고. 연변 사람들 다 그렇게 나와서 돈은 많이 벌었지. 하지만, 이렇게 나오는 게 화를 불러일으킬지도 몰라. 나는 농민인데, 사회보험도 없고, 퇴직금도 없고. 내가 늙고 병들어서 중국에 돌아가면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을까. 자식이 잘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어. 그래서 나는 우리애가 대학 졸업하고, 자리를 잘 잡도록, 부지런히 벌어야지. 벌수 있을 때까지.

특히, 농민들의 경우, 특별한 사회보장 및 퇴직금을 받지 않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준비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돈 버는 기계”로 규정하면서, 제한된 수입과 일할 수 있는 기간을 철저히 계산해서, 경제적 수입과 지출을 숫자화 시킨다. H-2 비자가 허락하는 5년 동안, 돈을 얼마나 모으고, 어디에 어떻게 써야할지 계산한다. 즉, 그들은 방문취업제 이후, 조선족 노동이 합법적으로 싼 노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한국 내 조선족 노동시장에서 형성된 최고의 임금을 찾아다니면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동포들에게 “한국바람”은 더 이상 예전처럼 꿈과 희망을 주지 못하지만, 경제적 근거가 상실된 중국에도 쉽게 돌아갈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자유왕래가 보장되었지만, 그들의 경제적 근거는 도시 식당노동자로 “통합”되면서, 다른 삶의 가능성들이 차단당한 채로 희망을 짜내고 있다.

VII. 마치며

본 논문은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에 지속적으로 유입된 중국 조선족들이 저임금 동포 노동자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을 보이고자 했다. 조선족의 대규모 유입에 대한 한국정부의 제도미비로 인하여, 조선족 노동자들은 기존의 친족관계에 의존하거나, 결혼을 통한 새로운 가족관계를 형성함으로써, 한국으로 입국할 새로운 통로들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불법 브로커에 의한 이주노동시장이 확대 재생산 되었고, 그 결과 어떠한 형태로든 다수의 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이 만연했었다. 불법체류자로서의 긴장과 갈등으로부터 수년간에서 십수 년간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족동포들은, 2004년 재외동포법 개정이 발표되고, 2006년 자진출국 유도 및 대규모 사면화 조치로 인하여, 합법체류자 신분이 되었다. 무연고 동포들의 방문취업제 실시와 더불어 자유로운 출입국이 가능해진 조선족동포들은 단순노동취업을 위한 H-2 비자로 일괄 통합 관리 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환대 조치에 대하여 조선족동포 노동자들은 “감사”하고 더욱 열심히 일할 것을 다짐하면서도, 한국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의 공간으로 규정하고, 저임금 도시 육체노동자로 원자화되면서 탈정치화 되었다. 또한 후기사회주의 중국의 현저히 감소된 복지정책을 대체하기 위하여, 조선족동포들에게 한국은 미래의 풍요와 개인의 복지를 마련하기 위한 장으로 간주 되었지만, 20년 전 한국이 제공했던 풍요와 발전에 대한 이미지는 한국경제 부침과 중국의 경제성장에 따라 흔들리게 되었다. 오랫동안의 “벌거벗은 생명”의 상황에 처했던 조선족 동포들은 H-2 비자를 통하여, 단순노동취업만이 가능한 육체노동자 동포집단으로만 통합되면서, 식당아줌마, 가정보모, 건설노동자등의 이미지와 삶의 조건은 더욱 고착화 되었다. 데리다가 주인과 손님의 역설에서 보여주었듯, 이 환대의 조치는 조선족에게 영원히 관리되고 감시되는 “손님”의 자리를 내주면서 조선족 동포를 한국사회 내 배제적인 방식으로 포함시키고,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