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조정호 수기]

한국산업인력공단 수기공모 우수작

2008-11-22     [편집]본지 기자

하얼빈 공항에서 이륙한 아시아나 항공여객기는 세찬 진동과 함께 그 육중한 몸체를 천천히 들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여객기 홀로 이따금씩 어여쁜 항공아가씨들이 오갔고 소형 TV에서는 여행도중 손님들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주의사항들을 알기 쉽게 방송하여주었다. 비행기는 계속하여 구름층을 뚫고 올라갔다. 만여 미터 상공에 오르자 햇솜 같고 뭇 양떼 같기도 한 구름바다가 한눈에 펼쳐지며 발밑에서 흘렀다.

나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부디 몸조심하고 돈 많이 벌어 돌아와 주세요. … 》

오랜 질병으로 뼈만 남은 앙상한 손으로 나의 평생 농사일에 참나무 껍질처럼 거칠어진 손을 꼭 잡으면서 신신 당부하던 아내의 말이다. 병마의 시달림 속에서 돈을 많이 벌어와 달라는 애원 같은 목소리가 귀전에 울려올 때 남편으로서 평생 돈고생만 시킨 그에 대해 어딘가 죄책감으로 눈시울이 뜨거워나며 자기에 대해 엉뚱한 질문도 들이댔다.

(네놈이 이때까지 해놓은 것이 무엇이더냐. 소처럼 일하는 것 외에 자기 따라 시골에서 다른 아낙네들이 다 하는 화장 한번 변변히 해보지 못한 아내를 진정에 넘치는 넓은 품으로 꼭 껴안아 준적이 있었던가, 마을 촌장은 고사하고 흔해빠진 촌민위원도 못해보고 살아온 네놈도 불쌍하지만 더우기 이런 멍청한 남편따라 평생 뼈빠지게 일만하다가 이제 병석에 들어누워 있는 네놈의 아내 더욱 불쌍하다.)

인천공항에서 나를 맞아준 것은 나의 조카네 부부이었다. 조카가 키 작은데다가 한국인 조카사위마저도 키가 자그마한 것이 마치 형제간 같았다.

밖은 불비를 퍼붓는 것만 같았지만 공항 버스안은 마치 얼음궁전에 들어온 것처럼 시원했다. 이따금씩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조각해놓은 예술품처럼 아름답고 정교한 고속도로 공중다리며 수풀처럼 일떠선 질서 정연히 늘어선 고층아파트단지들이며 또 그 사이로 펼쳐지는 진 푸른 녹색으로 곱게 단장을 한 면면한 뭇산들이며 환경미용사들의 손에 의해 곱게 다듬어진 도로 양 켠의 꽃바구니들이며 실로 대한민국의 문명과 발전은 나를 놀라게 했다.

(오늘의 세상이 좋기는 하지, 나 같은 농사꾼이 비행기 타고 서울 와보다니, 빚을 내서와도 인생에 이런데 와보니 임시는 좋기는 하다.)

자기 좋은 생각만 굴리는 사이 어느새 차가 멈춰 서자 우리는 내렸다. 조카네 집 역시 월세 단칸방이라 세 사람 눕고 나니 돌아눕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나의 코고는 습관은 두 번째로 가라면 섭 해 할 지경이다. 저녁 잠자리에 든 나는 종시 잠 이룰 수 없었다.

내일부터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수중에 중국 돈 2백 원도(한화 3만원) 남지 않았다. 초청해준 것 만해도 고마운데 그렇다고 조카보고 돈 달라고 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계속하여 이 비좁은 집에 비벼 있는 다는 것도 안되는 일이다. 아무리 조카가 초청했다고 해도 이제 벌어서 감사의 뜻으로 질 좋은 냉장고라도 바꾸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국 실정에는 깜깜이다. 50을 넘도록 농사일만 하다 보니 별다른 기술은 없다. 그렇다고 한국 와서도 농사일을 한단 말인가, 듣는 말에 의하면 한국 농사일은 우리와도 틀려 그것도 잘 할 것 같지 못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을 착수해야 하는가, 생각 할수록 절벽을 마주하고 선 것처럼 앞길이 막막하여 답이 나오지 않았다.

조카의 말대로 하면 이제 취업교육까지 받자면 20여일이 얼결에 지난다. 우선 돈이 수요 되기에 외국인등록증을 신청해놓고 취업교육 받을 때까지 용역부터 다니기로 작심했다. 마침 조카네 집 근처에 용역회사가 있기에 큰마음 먹고 전날 찾아갔더니 이튿날 일찍 오라는 것이었다.

이튿날 나는 아침 다섯 시가 되자 조카들 깨어날가봐 조심조심 행장을 차려 집 문을 나섰다. 그래도 운이 좋았던지 새로 지은 아파트를 청소하는 일을 배치 받았는데 저와 한 한국 사람이 한조로 되어 있었다. 나는 눈치를 보아가며 그가 빗자루에 나무 막대기를 동여매면 나도 동여매고 하며 그가 하는 데로 그의 뒤를 라 20여 층 되는 아파트 제일 위층에 올라갔다.

매 층마다 삼세대가 살게 되어 있었는데 그분이 두세대를 청소하면 나는 한세대를 해야 했고 그 아래층에 가서는 내가 두세대를 하고 그분이 한세대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엇바꾸어 가면서 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땀벌창이 되어 아무리 애를 써도 그 60이 넘는 늙은이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온 얼굴은 먼지투성이고 땀에 푹 젖어 적삼이며 바지며 볼품없게 되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바짓가랑이가 터져 팬티가 내보일 지경이었다.

일이 끝나자 그는 언제 일했나 싶게 몸을 씻고 여벌로 가져온 깨끗한 옷을 가라 입고 구두를 갈아 신었다. 나는 얼굴은 씻었는데 그만 아래 우 옷을 여벌로 가져오지 않았다. 그날따라 퇴근할 때 보슬비까지 잔잔히 내렸다. 나는 더없이 부끄럽고 난감했다. 몸에서는 하루 동안 땀에 절은 냄새며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그를 떨어지면 집도 찾아올 수 없으니까 곱다하던 밉다하던 부지런히 따라나서야 했다. 갈 때는 용역회사의 차에 실려갔는 데 올 때는 방정맞게도 전철을 타야 했다. 희한한 것은 전철에 올라 바지가랭이 터진 부위를 감추려고 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좌우 옆에 앉아있던 사람들이며 주위의 아가씨들이며 모두 피해 저 멀리 가버리는 것이었다. 사람마다의 꺼리는 눈길보다도 나의 자존심에서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체면에 일어서서 구석진 곳에 가서 섰다. 하지만 돌아와서 하루 일당 6만에서 용역회사에 소개비로 6천원을 떼고 5만 4천을 받아쥐니 바지가랭이 터지던 말던 몸에 땀내 나던 말던 한국 와서 돈을 벌었다는 의미에서 무등 자기에 대해 만족스럽고 흡족했다. 그 후부터는 일 나갈 때면 깨끗한 옷이며 구두를 여벌로 갖추어 가지고 다니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이튿날에는 지하철건설현장에 갔댔는 데 운수 사납게도 형틀목수들의 데모도로 신부름을 하게 되어 있었다. 한 30대 젊은이가 날 보고 아저씨 반생이를 올려 보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얼 말하는지 몰라 망설이었더니 그 청년은 얼국색이 좀 변하더니 그 높은데서 내려와 물건들을 동일 수 있게 일정한 토막으로 끊어놓은 철사뭉치를 들고 다시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청년 보기에 더없이 송구스러웠고 미안했다.

그 외에도 오백기, 카타, 몽끼, 합판…등 난생 들어보지도 못한 명사들이 연이어 나오는데 외래어까지 섞어 쓰니 어찌나 알아듣기 어려운지…내가 말을 너무 알아듣지 못하니 아마 현장 책임자 같은 한 젊은이가 오더니 아저씨는 물 신부름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모멸감과 무시감에 또 한 번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것만 같았다.

그후 그 현장에서 10여일 간이나 다녔는데 마음먹고 현장에서 늘 쓰는 명사들을 기억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모르면 물어보고 하여 점차적으로 의사소통이 되고 마지막에는 서로 얼굴도 익숙하여져서 그 현장에서 용역회사에 저의 이름을 지정하여 보내달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이십여 일 지나니 외국인 등록증도 나왔고 취업교육 일정도 마쳤다. 이사이 나를 삼촌이라고 잘 대해준 조카는 물론 저에게 언제나 넉넉히 필요한 경비를 두말없이 넣어준 조카사위 더없이 고맙고 감사했다.

3일간의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취업교육은 나의 캄캄한 머리에 밝은 빛을 던져주었다. 선생님들의 마디마디 말씀은 저와 같은 사람에게 더없이 즉시적이고 필요한 것으로 이제 내가 한국사회에 발붙이고 자기에게 알 맞는 선택을 하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머리를 터득시켜 주었고 앞길을 열어주었다. 학습전반과정에 나는 마치 목마른 사람 생명수 찾듯이 정신을 가다듬어 선생님들의 강의를 한 마디라도 빠뜨릴세라 열심히 귀담아 들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취업교육을 통하여 나는 취업비자로 계약 없이 용역 일을 다니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여 기술도 배우고 돈도 빨리 벌기위하여 힘들더라도 단가가 높은 고정적인 철근 일을 골라잡았다.

한국의 한여름 태양은 중국의 태양과 달리 금방 머리 위에서 열기를 퍼붓는데 뜨겁게 달아오른 철근을 다루기란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웃옷을 벗어 짜면 마치 물에서 건져낸 것처럼 땀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월말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아 쥘 때면 새 힘이 솟구치군 했다. 모든 고생을 씹어 삼키고 열심히 일한 보람으로 오늘 묵은 빚은 깨끗이 청산되었고 중국 도회지에 아파트까지 사놓았다. 딸도 대련 한 무역회사에 근무하였었는데 금년 봄 결혼식을 올렸다.

장기 환자로 병석에 누워 있던 아내도 지금은 신체가 기본상 회복되었다. 나는 언녕 기술숙련공으로 되어서도 나이에 비해 힘은 부치기는 하지만 마음이 편해서 좋다. 한 회사에서 줄곧 함께 일하며 지내는 동안 사장과 주위 사람들과도 친숙해져 지극히 믿어주고 형제와 별다름이 없다.

대한민국은 우리 가정에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을 부여하여 주었다. 고국인 한국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우리 가정은 아마 파산의 변두리에 이르렀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회사의 회식외에는 음식점에 거의 나들지 않고 있다.

오로지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맡은 일에 충실해 돈을 벌자, 자기의 신근한 노동으로 생활을 더욱 윤택이 나게 남부럽지 않게 잘 가꾸어보자, 이것은 나의 드팀없는 삶의 신조이고 추구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니, 이 인생을 다 할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생명이 있는 한 영원토록…!

2008년 7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