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직업을 갖고 살아가기

<안해금 수기>

2008-11-12     [편집]본지 기자

어느새 가을인데도 요즘 날씨는 가을 같지 않게 이상하다. 여름의 연장선이라고 할까? 낮 기온이 23도를 웃돈다니 말이다. 감성의 계절 가을이여서 그런지 가을을 많이 타는 질병들인 우울증 때문에 세상을 하직한 스타들도 여러 명 보여서 그만큼 삶의 무게가 무거웠으리라는 추측을 해본다. 나 역시 30대를 넘기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7살난 딸애가 대학까지 가려면 13년이 지나야 하는데 그동안 애의 학자금을 넉넉히 마련해야 하는 문제. 내 집 마련, 등 이슈가 있다. 게다가 중국에서 줄곧 직장을 다녀온 터라 집에서 남편오기를 기다리는 해바라기가 되기는 너무나 고역이었다. 그래서 결심한 게 직업갖기 프로젝트였다.

한국에서 직업을 갖기 위해 본 첫 면접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2003년 4월에 한국에 와서 1년은 엄마로서의 역할에 충실했고 애가 돌이 되려던 무렵에 강남역에 위치한 한 벤처기업면접을 갔었다. 줄곧 집에서 있어서 그런지 나의 구직욕은 강렬해서 꼭 합격하려는 생각으로 면접을 기다렸는데 복도에는 면접대기중인 사람들이 줄줄이 서있었다. 합동면접이여서 3명인가 한 번에 면접을 보았는데 나머지 두 명의 스팩이 만만치 않았다. 한명은 한국 외국어대의 석사졸업생이고 한명은 한국인이었던 것 같다. 바이오에 관련된 전문술어가 가득한 중국어문장을 내놓고 번역을 한 뒤 면접을 보았는데 주로는 자기소개였다. 중국에서 대학도 나왔고 5년 동안 직장경력을 바탕으로 자신감을 갖고 갔는데 세 명이 동시에 면접을 보니 나의 단점이 보였다. 그것은 한국사정에 익숙치않다는 거였다. 그래도 운 좋게도 최종면접까지 갔고 입사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애가 걸렸다. 자주 출국하는 남편에 거의 혼자서 애를 보던 나였기에 퇴근시간은 칼같이 지켜줘야 하는데 그 업체는 그게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직 돌이 겨우 된 애를 떼고 늦게까지 근무한다는 것은 나의 욕심이었다. 높은 연봉의 유혹도 있었지만 육아문제에 걸려 첫 구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후 이런저런 곳에 가봤지만 모두가 애 때문에 거절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유부녀가 취직할 수 있는 문턱이 정말 높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가진 때였다. 애도 어리고 나도 직업을 가지고 싶어서 비장한 결심을 내리고 중국의 친정에 애를 맡겼다. 내 직업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후에 애를 데려오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게 된 두 번 째 면접은 강남의 시사중국어학원이었다. 당시에도 유학생이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6명인가 한조가 되어서 단체면접을 보았었는데 운이 좋아서인지 합격을 하고 출근하게 되였다. 학생이 많을수록 월급이 많아지는 성과급이여서 강남의 모든 직장인을 다 배워주려는 듯이 의욕에 찼었는데 웬걸 출근해보니 처음 하는 선생에게는 학생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고급반을 담당하게 하였다. 중국에서 온 원어민이라고 고급반을 맡긴 것 같았다. 학생은 5명 정도인가 되었었는데 초반에 나오다가 힘든지 점점 학생이 적어져서 1달이 지나니 2명만 다니게 되었다. 주말반이기에 4시간씩 두 명에게 강의한다는 게 참 마음의 평형을 잡기 어려웠다. 지난달 월급은 30여만 원이 나왔는데 이달에는 더욱 적어질 것 같았다. 들리는 말로는 초보선생에게는 강의를 많이 안준다는 것이었다. 바닥부터 시작해야 된다는 중압감에 숨이 막혀왔다. 중국에 애를 맡기고 다니는 직장인데 한 달에 박봉으로는 다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미래가 보장된 것도 아니고...마음의 변화가 생겨서인지 다음달 수업이 시작되니 폐강을 선택했다. 한국의 좁은 취업시장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후 한 출판사의 여행서적을 번역했는데 알고보니 나는 알바이기에 내 이름은 없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출판이 되는 거였다. 참 씁쓸했다. 노동의 대가로 얻은 원고비 50만원으로 아예 하우젠드럼세탁기를 사버렸다. 자그나마 추억을 남기려고 말이다. 다행이 지금도 세탁기는 잘 돌아가고 있다. ^^내가 아무리 취직을 하려고 안깐힘을 써도 어색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한국 실정에 어두워보여서 그런지 좀처럼 월급이 백만원을 넘기는 직장은 찾기 힘들었다. 일이 안 될라니 음란사이트의 관리를 맡겼나는 전화도 왔다. 구직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리니 별일도 다 있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궁해도 명색이 선비인데 그런 일을 할 수야 없었다.

중국에 있는 애도 보고 싶고 의기소침해있을 무렵 한 디지털프린팅잡지사에서 중국 관련기자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오랜만에 듣는 그럴듯한 직업,,,중국에서 해온 일도 그거라 별 부담감이 없이 양재동에 있는 잡지사로 갔다. 자그마한 잡지사였는데 사장님이 좋은 사람 같았다. 그래서 가족같이 일할 분위기라 판단이 되어 일을 시작했는데 배울 것은 정말 많았다. 사장님의 부지런한 근성, 돈보다는 업계의 공정한 언론을 주도하고 자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그때 카메라를 들고 한국의 거리에서 개성이 있는 간판들을 주말에도 찍으러 다녔고 디지털프린팅의 다양한 영역에 대해서도 섭렵하게 되였다. 한국의 광고산업과 연관이 있는 터라 나의 취미와도 맞는 것 같았다. 동대문 apm의 실사출력물도 분석해보고 중국의 유명한 출력물도 잡지에 실어보고 나의 하루는 분망했지만 의미가 있었고 너무나 재미있었다. 마감 때는 12시 지하철 막차를 타고 퇴근을 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였다. 설문조사를 하기 위해 충무로의 실사출력가게들을 샅샅이 뒤집던 기억도 난다. 열정스럽게 뛰다가도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마주칠 때는 너무 화가 났다. 한 신사동에 위치한 작업실을 취재하려고 했는데 나의 어투 때문에 반감을 갖고 인터뷰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게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시련이라고 마음을 비웠더니 그래도 한국사회에는 호의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지금도 눈에 피발이 지면서 원고를 심의하던 사장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업무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주말에 업계의 전문용어를 배워주는 시간까지 낸 사장님의 의지를 생각하면 꼭 성공하시리라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지금도 사장님부부를 보면 고마운 감정을 느낀다. 그때 말투도 어눌했고 많이 부족한 나를 편견 없이 잘 이끌어줬다는 생각에 내심 고맙다. 열심히 일했지만 그때 잡지사의 광고가 많이 들어오지 않아서인지 작은 잡지사의 자금사정이 어려워지고 사장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전직보다 프리랜서로 일했으면 좋겠다고 미안해하시면서 말했다. 그후 삼성전자의 기술통역을 하면서도 주말에는 잡지사의 프리랜서도 원고를 썼던 기억이 난다.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원고료랑 임금이랑 챙겨주었던 사장님이여서 그런지 신뢰가 간다. 삼성전자의 통역일도 끝나고 겨울이 되었는데 중국에 두고 온 애가 너무 보고 싶었다. 중국에 가서 오매불망 보고 싶었던 딸 미정이를 보니 연변사투리를 구사하고 있었다. 아무리 직업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해도 아이도 옆에 두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을 초청해서 한국에 왔고 부모님의 도움으로 나는 보험업계의 신문사에 근무하게 되었다.

신문사에서 1년 정도 있는 동안 중국출장을 두 번 다녀오면서 급속도로 발전하는 중국의 보험시장을 보게 되였고 중국보험감독위원회의 부주석이 한국에 올 때 인터뷰도 했다. 그때 우리 신문사가 독점취재를 하였지만 매일경제신문을 비롯한 큰 신문사에서 인터뷰내용을 전재한 걸 보고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과 중국의 보험업계 최고지도자들이 모인 포럼에서 통역도 하고 중국에 진출한 한국보험사들인 삼성생명, 현대해상, 대한생명, 교보생명 등 회사들의 책임자들도 만나 인터뷰를 하다 보니 새로운 길이 보였고 역동적으로 발전해가는 보험산업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생겼다. 또 한국의 대형보험사들에서 성공한 보험설계사들을 취재하면서 보니 나도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겨 지금은 내가 선택한 제일 좋은 보험사에서 일을 한다. 한사람의 인생을 컨설팅하는 보람을 느끼면서 이 일을 한지도 어언 3년째 된다. 그동안 애도 많이 컸고 일에 대한 자부심도 생겼다. 이 일을 될 수 있는 한 오래하고 싶기도 하다. 나를 믿고 계약해준 고객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그들의 주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언제든지 있는 사람으로 오래오래 남고 싶다.

노력은 땀방울을 배신하지 않는 것 같다. 작은 노력도 언제든지 노력만큼의 성과로 나를 성취감에 젖게 한다. 부족한 개인의 경험담이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귀감이 된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 모두는 태어난 고장이 틀리지만 다 같은 중국에서 왔다. 그래서 겪는 고민들이 동질성을 띠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얻은 자신만의 보석 같은 경험들을 이 자리로 모두 갖고 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서 높은 가을하늘만큼이나 우리에게 삶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을 안겨줄 수도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힘없는 약소계층이 아닌 우리의 성취로 긍정 받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다만 성실한 노력으로 말이다. 일확천금이 아닌 농부의 마음으로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열매를 맺고 그런 지극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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