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痕迹) <우광훈의 장편연재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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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고싶다. 창호는 그런 생각이 있다고 믿고있었다. 그러나 딱히 부를만한 상대가 생각나지 않았다. 누구인가와 오래동안 대화를 하고싶었다. 술은 다만 하나의 매개로 하고. 취하고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창호는 무의식에 가까운 동작으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창유리를 후려치는 비방울이 눈물처럼 유리를 흘러내리고있었다. 수화기에서 련결음이 길게 울렸다. 전화기의 번호표시판에 눈길이 가는 순간, 창호는 놀라듯 오른 식지로 전화스위치를 눌렀다. 엉뚱하게 집으로 전화가 걸린것이였다. 련결음이 끊어지고 대기음이 길게 울렸다. 왜 집으로 전화를 했는지 리해가 안되였다. 안해 금화와 술을 마시고싶었던건 아니였는데...
창호는 한국으로 가겠다고 하던 금화의 전화를 생각했다. 그러니까 금화의 말이 충격적이지는 않았지만 가슴에 남아있는것만은 사실인 모양이였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 없던 짓을 하겠는가? 술을 마시고싶다면서 집으로 전화한적은 없었다. 딸 미라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빠라고 부르고싶다던 레이훙의 까불거리는듯한, 그러나 어딘가 가여워 보이는 눈빛이 생각났다. 미라는 행복한 애였다. 적어도 창호는 그렇게 믿고있었다. 여유를 주지 못했지만 가난해서 불행할 정도는 아니였다. 창호의 빳빳한 월급의 주소비자는 미라였으니까. 내년에 고중에 입학하고 대학까지 점쳐놓고있었다. 미라는 아직까지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야 할 내일에 대한 생각조차 있는것 같지 않았다. 고중을 졸업하고 사회에 내던져진 레이훙에 비하면 미라는 행운이라 할만도 했다.
창호는 딸 미라와 레이훙이 비교되는것이 이상했다.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고있다는 자부심때문일가? 아니면 금방 레이훙에게 아빠가 없다는 말을 들어서일가?
창호는 천천히 사무실벽에 걸어놓은 중국지도앞에 다가섰다. 하나는 중국행정도고 하나는 지형도였다. 그리고 그옆에는 세계지도가 있었다. 창호는 중국지형도앞에 서서 레이훙이 고향이라고 말하던 곳을 찾았다. 이춘지방을 지나 **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산악지대였으나 해발고가 높은 곳은 아니였다. 이름조차 적히지 않은 강이 송화강쪽으로 합류하고있었다. 어떤 곳일가? 창호는 울울창창한 수림을 상상했다. 위도가 올라간것을 보아 침엽수림일것이였다. 겨울의 기온은 때때로 령하 40를 오르내릴것이고 어쩌면 신비로운 북극광도 볼수 있을것이였다. 레이훙은 아버지는 림장의 직원이였고 어릴 때 죽었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살았다면 림장의 직원이라는것은 이상할것이 없었다. 그러나 벌목중 죽었다고? 산골에서 산 경험이 있는 창호는 벌목의 위험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죽는 일은 자주 생기는것이 아니였다. 어릴 때 죽었어요. 전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요. 레이훙의 목소리가 귀가에 울리는것 같았다. 엄마는 소학교교원이라고 했지. 창호는 레이훙에게서 받은 첫 인상에서 엄한 교육을 받은 흔적을 읽었었다. 엄마가 교원이라니 그럴만도 했다.
담담한 동정같은 애수를 씹으면서 창호는 지도앞에서 돌아섰다. 이때 문이 열리며 인순이가 들어섰다. 얼굴에는 확연한 노기가 흔들거리고있었다.
<<앉으세요. 작은 일 가지고 너무 신경쓰는거 아니예요?>>
인순이는 숙녀답지 않게 소파에 털썩 앉았다.
<<렴선생한테는 작은 일이겠지만 저에게는 작은 일 아니예요.>>
창호는 좀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럼 얼마나 큰 일인데? 창호는 이 녀자가 무언가 착각하고있고 질투하고있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누구인가 보아요. 아직은 애란 말이얘요. 절 너무 심하게 보는거 아니예요?>>
인순이는 창호를 바라보다가 억이 막힌다는듯 픽 했다.
<<그럼 창호씬 저를 뭐 시시한 질투나 하는 녀자로 보았군요? 저 수준이 그만큼밖에 안돼보여요? 총명한척 하지 말아요.>>
창호는 걸상에 앉으며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런거 아니예요. 애들이니까 관대하고 달래는게 도리지 않아요. 아무리 부리는 애들이라고 종년부리듯 할수는 없지 않아요. 전 애들이 다 딸같아요. 부성의 장난이기도 하겠지. 그렇다고 해두세요.>>
창호는 간단히 넘어가고싶었다. 그러나 인순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목소리는 많이 차분해졌다.
<<애앞이니까 저 많이 참았어요. 한가지만 묻겠어요. 레이훙에 대해 왜 그렇게 집착하세요?>>
창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집착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인순이는 조소하는듯 입귀를 들었다.
<<왜 놀라세요? 집착이라는 말 심했어요? 면접하던 첫날부터 창호씬 이상했어요. 레이훙을 보는 눈길에서 정이 철철 흐르고있었단 말이예요. 기억나요? 제가 따버리라고 했을 때 창호씨는 생각도 하지 않고 칼로 베듯 안된다고 했어요. 다른 애들한테도 그랬어요? 좀 생각해보시라구요.>>
창호는 대답을 잃었다. 인순이의 말이 거짓인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인순이의 말처럼 특수생으로 대하고싶거나 그래야 하겠다는 자각이 있어서도 아니였다. 다만 레이훙이 한족이라는것을 아는 순간에 마음은 이미 여려져있었을뿐이였다. 사실 창호는 그것을 느끼지도 못했고 레이훙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부성과 같은 흐믓함에 만족하고있을뿐이였다.
<<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 애가 귀엽다는 느낌이 많아요. 인순씨도 너무 애한테 몽둥이만 들고 달려들지 말아요. 애가 불쌍한 애예요.>>
인순이는 고개를 돌렸다.
<<불쌍해요? 어디가요? 식당복무원을 해서요?>>
창호는 짜증스러 대답했다.
<<그래서 그러는것 아니라구요. 애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어요.>>
인순이는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랬대요? 누가 그래요? 레이훙이 그래요? 그애 말 어떻게 믿어요? 애는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고있었어요. 잊으셨어요? 처음부터 애는 식당이 처음이라고 했어요. 그날 우리가 그 식당에서 마주띄웠으니 말이지 그렇지 않으면 우린 그애가 정말로 우리 식당에서 처음 일하는 애인줄로 믿겠지요?>>
<<그런걸 가지고 사람의 성실성을 론할건 아니지 않아요. 아직은 어리니까 그럴수도 있는거잖아요.>>
인순이는 기가 막힌다는듯 입을 벌렸다.
<<어려요? 애가 몇살인데 어려요?>>
<<이재 스물두살인데 어리지 않아요? 정상적이라면 대학 2학년정도지 않아요?>>
인순이는 쌀살한 미소를 띄우며 날쉼을 크게 내뿜었다.
<<애가 그래요? 스물두살이라고? 다른 애들과 물어보세요. 몇살인가. 애가 나이를 속이고있는거예요. 알아요? 애 나이가 자그만치 스믈여섯이라구요. 영애하고 물어보세요.>>
창호는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애가 나이를 속일 필요가 없지 않아요? 왜 나이를 가지고 거짓말을 하겠어요?>>
인순이는 조소하듯 말했다.
<<그건 본인하고 물으세요. 창호씨, 작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큰 거짓말도 하게 되여있어요. 너무 무작정인거 아니세요? 창호씬 아직도 좀더 오래 살아야 하겠어요.>>
창호는 할말이 없었다. 화가 치밀었지만 인순이한테 터뜨리기는 리유가 없었다.
<<알았어요. 이제 천천히 알아볼게요. 만일...>>
창호는 만일 정말이라면 잘라버리겠다고 말하려다가 일찍 결론을 내리는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말머리를 돌렸다.
<<그럴만한 리유야 있겠지만 그냥 두지는 않을거예요.>>
<<정말 못말리겠네요?...>>
인순이는 상대도 안된다는듯 창호를 흘기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창호는 잠간 생각에 잠겼다. 인순이 말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심각한것이라는 결론은 내릴수 없었다. 녀자애가 나이쯤 속이는걸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인순이에게 오히려 고까운 생각이 들었다. 성적으로 관계가 있은 녀자의 질투쯤으로 밀어붙이고싶었으나 인순이의 마지막 말이 찜찜했다. 작은 거짓말을 할수 있으면 큰 거짓말도 하게 되여있다?
창호는 전화를 들었다.
<<식당이예요?... 레이훙 있어요? 그럼 애보고 당금 사무실로 오라고 해요. 잠간 볼일이 있다고 해요.>>
잠간이 지나 작은 노크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우산을 쓰고 오지 않았는지 머리칼에 묻은 비물을 훔치며 레이훙이 들어섰다.
<<무슨... 일이얘요?>>
창호의 눈치를 살피던 레이훙은 웃음기를 거두며 긴장한 빛을 띄웠다.
<<일단 앉아봐.>>
레이훙이 소파의 끝에 조심스레 앉았다. 까만 눈에 총명과 령리함, 그리고 내심의 깊은 무엇이 숨어있는것 같았다. 창호는 한동안 레이훙을 뜯어보았다. 레이훙의 몸이 점점 움츠러들었다.
<<왜 그러세요? 저가 뭐 잘못한 일이라도 있어요?>>
레이훙은 점심에 있었던 일을 짐작하고있는듯싶었다.
<<너 도대체 몇살이니?>>
불쑥 들어오는 질문에 레이훙은 흠칫 했다.
<<나이-요?>>
<<그래.>>
레이훙은 주저주저 했다.
<<진짜 나이요?>>
창호는 인순이의 말이 맞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그래 나이에 가짜와 진짜가 있니?>>
레이훙은 창호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스물 여섯...>>
<<그럼 왜 거짓말을 했어?>>
레이훙은 창호을 할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나이를 속인 리유가 뭐니?>>
한동안 머리를 숙이고있던 레이훙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결심을 내렸는지 많이 당당해져있었다.
<<면접시험을 보던 날 다른 애들과 물으니 저의 나이가 제일 많았어요. 그래서 합격이 되지 않을가봐 나이를 줄여서 말했어요.>>
리유라면 틈이 없었다. 창호는 그만 웃어버리고말았다.
<<그럼 아까는 왜 그냥 스물 둘이라고 했어?>>
긴장을 푼 레이훙은 대담하게 창호를 바라보았다.
<<어리다면 좋으니까요. 나이 많으면 시집가라고 할가봐...>>
엉뚱한데가 있었다. 창호는 실소를 했다.
<<때가 되면 시집도 가야지. 친구가 있니?>>
<<아직은 없어요. 아저씨 소개해주실래요?>>
창호는 한술 더 뜨는 레이훙에 껌뻑 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소개를 해? 난 조선족남자는 잘 아는데 한족남자는 잘 아는 사람이 없어. 그래도 똑똑한 놈이여야지?>>
레이훙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아저씨하고 소개를 하라는거죠. 저 조선족이 더 좋아요.>>
창호는 레이훙을 눈여겨 보았다. 물기를 머금은듯한 눈이 매력적이라 할만큼 이뻣다. 레이훙은 뜯어볼수록 이쁜 그런 형이였다. 창호는 푸근해진 마음으로 의자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조선족이 더 좋아? 그렇지만 신랑감으로는 백점이 되기 어렵겠는데? 대남자주의고 집에 대한 관심이 적고...>>
<<남자가 남자다와야지 않아요? 전 녀자앞에서 주눅이 들어있는 남자는 싫어요. 한족남자들 대부분이 그래요. 녀편네가 기라면 기고 앉으라면 앉는 남자, 그런 남자는 큰 일을 못해요.>>
창호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건 너 몰라서 하는 소리야. 조선족남자들 큰소리 텅텅 치고 다니지만 속은 사실상 비였어. 호주머니에 돈 5원 달랑 넣고도 택시를 불러 타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 조선족남자들이야.>>
레이훙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아저씨도 그래요?>>
<<나야 좀 틀리지. 적어도 돈 5원 달랑 넣고 다니지는 않으니까.>>
<<그럼 아저씨같은 사람한테 시집가면 되죠. 딱 아저씨같은 사람 소개해줄래요?>>
<<엉?...>>
창호는 레이훙의 말속에 담긴 다른 의미를 읽었다.
<<조선족남자한테 시집 가겠다는데 뭐 다른 리유가 있니?>>
이번에는 레이훙이 갸우뚱 했다.
<<조선족남자가 좋은데 뭐 다른 리유가 있어요?>>
<<그래도 왜 그런 인상을 받았는가 하는거지.>>
레이훙은 장난기 섞인 눈으로 창호를 보며 대답했다.
<<리유야 많지요.>>
<<많아?...>>
<<비밀이래요.>>
창호의 머리속에서 카이란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한사람이 좋다라는데 꼭 리유가 있는건 아니였다. 마치 지금 앉아있는 레이훙을 보면 리유없이 마음이 푸근해지듯이.
<<하긴 사랑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리유지...>>
창호의 뇌리에서 섬광같은 추리가 피뜩 스쳤다. 아버지가 없다. 스믈 여섯이다... 카이란과 헤여져 금년이 바로 스물 여섯해였다! 창호는 가슴에 무엇인가가 딱 맞쳐오는감을 느꼈다. 레이훙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듯 창호는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생각지도 않던 질문이 튕겨나갔다.
<<엄마 성씨 어떻게 쓰지?>>
레이훙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엉뚱한 질문에 두눈을 깜빡거렸다.
<<엄마... 성이요?...>>
<<그래.>>
창호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러웠다.
<<엄마의 성은 진나라라는 진인데요. 왜요?>>
창호는 다시 등을 의자에 기댔다. 가슴에 솟아오르던 무엇이 서서히 내려가고있었다.
<<아니, 뭐... 내가 잘 알고있는 사람이 성이 레이였어...>>
<<그래요?...>>
창호는 첫날 레이훙을 면접하는 날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는걸 생각하자 자신이 어이가 없어졌다.
<<이제 조선족총각 하나 소개를 해야겠네? 그리구 조선족한테 좋은 인상을 가지고있다는걸 장려해서 한번 맛있는걸 사주어야겠다.>>
<<아, 좋아. 저요, 양고기뀀 먹구싶어요. 오래동안 못먹었어요.>>
창호는 원상으로 돌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그럼 왕창 사주어야겠다. 오늘? 아님 래일?>>
레이훙은 소파에서 일어나 손벽을 쳤다.
<<아, 좋아. 오늘요. 오늘 저녁 퇴근하구요...>>
<<그래. 날씨도 칙칙한데 잘됐다. 많이많이 먹어야 돼?...>>
<<아저씨 호주머니 훌훌 털어 빌 때까지...>>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