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離鄕)과 실향(失鄕)
<신길우의 수필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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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 吉 雨
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skc663@hanmail.net
고향을 떠나 살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슴 아픈 일이다. 그것이 스스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게 되든, 타의에 의해서 강제로 이루어지게 되든, 이향(離鄕)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서글픔이고 아픔인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해마다 명절이면 이북에 고향을 둔 이들이 임진각으로 통일전망대로 몰려드는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러기에, 외국에 나가서 살다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견디지 못하여 투신자살마저 하는 노인들까지 가끔 생기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향이 이토록 큰 슬픔인 것을 생각하면 고향 땅을 잃은 실향(失鄕)은 얼마나 더 뼈저린 아픔인가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향이 다만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타향에서 살아가는 이별의 아픔이라고 한다면, 실향은 그 정겨운 고향 산천의 모습이 파괴되고 없어져버려 다시는 옛 모습을 볼 수가 없는 상실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볼 수 있는 고향을 다시 찾아가 보지 못하고,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묻히기를 바랄 만큼 한이 되는 것이 이향의 아픔인데, 다시는 바라볼 수도 없고 죽어서까지도 쳐다볼 수 없는 실향의 한은 그 얼마나 사무친 것이겠는가!
실제로, 토지수용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 살아야 한다는 말을 맨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어린 시절 이외에는 줄곧 도시에 나와 살던 나로서는 그렇게 크게 서운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점차 하나 둘 고향 땅을 떠나며 울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든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우리집마저 고향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이향의 아픔이 얼마나 아리게 파고드는가를 느꼈다. 그리고, 그 아픔이 그리움으로 바뀌면서 자주 향수에 젖기도 하고, 때로는 달려가 높은 산 위에서나마 멀찍이 고향 땅을 바라보며 달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부터는 이향보다 더 큰 고향 상실의 아픔을 맛보아야만 하였다. 마을 집들은 무참하게 부수어져 내리고 곳곳에 서 있던 나무들은 베어졌고, 논밭은 사라지고 큰길이 나면서 여기저기에 커다란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언덕과 동산은 깎여지고, 시내와 골짜기는 메워져 잔디밭으로 바뀌어 버렸다. 옛것이란 어느 것 하나 남겨지지 못하고, 옛 모습은 어디서고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으며, 온 세상이 다른 천지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고향이 고스란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인제는 고향 땅을 다시 찾아가도 옛 고향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고향은 소멸되고, 고향이 타향이 되면서, 이향의 아픔이 가셔지기도 전에 더 큰 실향의 아픔을 더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그 실향은 이향처럼 다시는 되찾아질 수는 없는 것이기에 더욱 아리고 갈수록 쓰라리게만 하였다.
그런데, 이런 이향이나 실향의 아픈 일들이 오늘날 곳곳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다. 국토 개발이나 산업 현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작된 것이, 지금은 골프장을 만들고 유락(遊樂) 시설을 차리느라고 또 다른 실향민들을 양산시키고 실향의 아픔을 마구 안겨 주는 것이다.
설령, 그러한 것들이 국가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별수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수긍하거나 당연시한다 하더라도, 막상 그곳에서 꿈을 기르며 살아왔고, 희망을 키우면서 거기서 살고 있던 이들의 마음속은 실향이 뼈아픈 슬픔이 아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논밭에 공장이나 아파트가 들어서고, 뒷동산 언덕은 잔디밭이 되며, 내 건너 산자락에는 별에별 놀이 기구와 오락 시설들이 들어찬 모습일 때, 골짜기의 시내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널따란 호수물만이 넘실대고 있을 때, 그곳 고향을 잃은 또 다른 실향민의 가슴은 어떻겠는가 생각해 보라. 운수요 숙명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타의적이며, 충분한 보상만으로는 도저히 채워질 수 없는 아픔인 것이다. 아무 것으로도 달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위로될 수 없는 일이다.
단순히 고향을 떠나 살기만 하면 되고, 언제나 다시 돌아와 보면 고향의 옛 모습들을 바라볼 수 있는 이향만 하더라도 그 아쉽고 아린 마음이 큰 것이거늘, 다시 돌아와 바라보아도 옛 모습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실향의 아픔은 얼마나 크고 쓰라릴 것인가!
중국의 옛 시에 ‘호마는 언제나 북쪽 바람을 마주하여 서고, 월나라 새는 늘 남쪽 가지에 깃들인다(胡馬依北風 越鳥巢南枝)’는 구절이 있다. ‘여우도 죽을 때에는 고향 언덕을 향하여 머리를 둔다(首邱初心)’는 말도 전해 온다. 또한, 연어는 온 대양을 누비며 살다가 죽을 무렵이 되면 자기가 태어났던 냇물을 찾아 되돌아 와서는 알을 낳고 죽는다.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들까지도 모두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살고,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떻겠는가.
더구나,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리 강한 것으로 생각된다. 해마다 명절 때만 되면 고속도로나 국도나 할것없이 마구 밀려드는 차량들의 홍수를 보거나, 외국에서 살다가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고 작고한 이들의 유골을 수십 년이 지난 뒤에라도 상자에 넣어 들고 귀국하는 교포들의 모습을 보게 될 때에는 고향에 대한 그들의 애착심과 귀소의식이 얼마나 강렬하고 지극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고향은 단순히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난, 하나의 터전으로서의 작은 공간이나 지역이 아니다. 고향은 그대로 나의 역사요 전통이요 문화이며, 우리의 정신이고 신앙이고 정서인 것이다. 따라서 고향은 나의 어머니요, 마음속의 낙원이고 안식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향이나 실향은 누구에게 있어서나 서럽고 아픈 일이며 언제나 채워질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처럼 슬프고 아린 이향과 실향이 여기저기서 자꾸만 생겨진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국토의 개발도 좋고 건설도 필요하겠지만, 그 뒤에 무수히 남겨지는, 이런 고향 이별, 고향 상실의 아픔들은 어쩌란 말인가.
찾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두세 시간이면 갈 곳을 열 몇 시간씩 걸려서야 가게 된다는 귀향길이라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갈 수 있는 고향이 있고, 고향 산천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머지않아 명절이 또 다가온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향민들이 귀성길에 나설 것인가.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또 다른 실향민들이 이들의 긴 행렬을 바라보면서 이들을 부러워하며, 실향의 설움에 눈물을 흘릴 것인가. 나도 인제는 또 다른 하나의 실향민이 되어서, 올해에도 별수없이 귀성 인파의 모습들을 보면서 실향의 아픔을 달랠 수밖에 없다. 이런 때면 언제나처럼 창가에 서서 멀리 빈 하늘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