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이렇게 생긴다 <김애금 수기>

<한국산업인력공단 수고공모 가작>

2008-09-24     동북아신문 기자

몹시 앓고 있는 아들 때문에 거액의 돈이 필요했던 나는 만사불구하고 한국에 나온 사람이다. 좋은 외국인정책의 덕택에 축국의 꿈은 이뤄졌지만 걱정은 태산 같았다. (중국에 있을 때 교편을 잡았던 내가 한국취업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한국에 친척도 없고 친척 중 한국엔 나온 사람도 없는 내가 끝까지 버틸만한가? 하는 걱정 때문에 잠도 이룰 수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 아니 행운스러운 것은 동생의 소개로 임시거처를 정한 서울 송파동에 사는 한국할머니, 할아버지집이 내 집이나 다름없는 따사로움을 갖다 줬다는 것이다.

“야, 이 축구(바보)야, 그 좋은 직업을 버리고 한국에 왜 왔어?”하고 할아버지는 나를 놀려준다. 할아버지의 농담에 할머니의 부드럽고 싹싹한 태도가 나의 마음에 한 가닥의 난류가 흐르게 하여 걱정을 얼마간 가셔주었다.

그때 내가 생각한 것은 정말 들은 바와 같이 한국에 좋은 사람들도 많구나하는 것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것, 있을 데가 보장이 되어 걱정은 덜었다지만 취직하여 일할생각을 하니 무섭기도 하였다. 하지만 하루속히 경제적으로 힘이 필요했던 나는 할머니더러 일이 힘들어도 괜찮으니 월급이 높은 데로 소개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처음 취직한곳이 가락시장구내 식당이었다. 지금 와서 알았지만 함바식당, 구내식당은 사람의 뼈를 녹이는 힘든 곳이었다.

내가 하게 된 일은 주방에서 주방장 심부름을 하는 동시에 생선을 튀기고 전을 굽는 일이였다. 그리고 파를 썰고 양파를 써는 것도 담당했다.

중국에 있을 때 애들 앞에서는 큰소리를 치면서 살아왔지만 한국에 와서 정작 일을 하려고 하니 왜 이렇게 멍청해지던지… 야채를 씻어 소쿠리에 담아놓으라는데 소쿠리가 뭔지? 소에게 씌워주는 물건으로 알고 있던 건데 한국에서는 주방에서 그걸 쓰나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야채를 집에서는 한줌이나 씻어서 반찬을 해본 나더러 몇 대야나 되는 많은 야채를 씻으라 하니 도저히 방책이 나지 않았다. 거기에 주방장이 담배까지 뻑뻑 피는 한국할머니였는데 성격이 사납기로 나는 난생처음 보았다.

내가 야채무더기 앞에서 물은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야채는 또 몇 번이나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어정쩡해 서있는데 주방장의 날벼락이 마침내 떨어지고 말았다. “야, 너 일을 할거냐 말거야? 응? 그렇게 멍청하니 서고만 있으면 야채가 씻어 진다더냐? 너 중국에서 교사했다는 사람이 그렇게 둔하냐?” 나는 질끔 솟구치는 눈물을 겨우 참으면서 어쩔 바를 몰라 쩔쩔맸다. 바로 이때 흑룡강에서 왔다는 60이 많이 넘은 이 아줌마라는 분이 나를 곤경에서 건져주었다. 자진해서 일을 해주면서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아마 그때 그 아줌마가 안 계셨더라면 내가 더 베기지 못하고 손을 들었을지 모른다. 또 한 번은 저녁장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에 생긴 일인데 중국에서 온 아줌마 두 분은 설거지에 한창 바삐 보내고 있을 때 나와 주방장은 그날 일을 거의 다 마무리하였다. 그때 식당주인동생이 (같은 직원임) 금방 배달을 갔다 와서는 주방에 들어오더니 주방장할머니와 나더러 소주한잔 하자고 권하는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저쪽 아줌마들은 한창 땀 흘리며 그릇 닦고 있는데 내가 앉아서 한가히 술 마실 수가 없어서 싫다고 했더니 주방장의 두 번째 날벼락이 떨어졌다. “너 그 아줌마들이 죽으면 죽겠나, 너 가만히 보니 저질이구나. 너 한국에 못 있겠다”하며 별의별 욕을 다하였다. 그땐 정말 참을 수가 없었지만 그 어떤 치욕도 참고 견뎌야 아들을 살릴 수 있고 한국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숫구멍까지 올라온 화를 꾹 참았다. 그랬더니 서러움이 울컥 치밀면서 눈에서는 눈물이 좔좔 쏟아졌다. 닦고 닦아도 줄 끊어진 구슬마냥 그냥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어서 화장실에 뛰어가서 한바탕 소리 내여 엉엉 울고나왔다.

울고 나니 하나의 오기 같은 생각이 슬그머니 마음에 찾아들었다. (그래 지금은 내가 처음이여서 바보취급 받지만 이를 악물고 일을 배워내며 당신들이 꼭 감복하게 만들리라.) 마음에 오기가 차오르니 일이 왜 그렇게 잘되는지, 그리고 주방장의 성화도 받아주기로 마음을 먹고 나니 이전처럼 그렇게 무섭지도 서럽지도 않았다. 몸이 재고 눈치 빠르고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내가 마음에 든다며 나중에는 주방장의 태도가 180도로 달라졌다. 담배 피우고 싶으시면 나더러 담뱃불 붙여라 달라고 하기로 하고 맛있는 음식을 하다가도 한 점 덥석 집어서는 내입에 가만히 밀어 넣어주기도 하였다. 주방장과도 친해지고 일도 꽤 손에 익어 그 식당에 그냥 있을 려고 했는데 필경은 일 경험이 없는 나인지라 생선을 몇 박스씩 집게로 집어서 튀길려니 너무 신경 쓰이고 요령이 없어서인지 팔목이 부어올라 더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식당에서 그만두고 나오게 되었는데 한 달로 안 되는 사이에 부대끼며 정들었는지라 주방장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저어주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정말 나쁜 사람은 없다고 서로 맞추기만 하면 다 좋은 사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에 나와서 취업생활을 하는 우리 교포들에게는 참고 견디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지금은 고기 집에서 서빙을 하고 있는데 옛날 그 주방장 밑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 일 배웠던 경력이 있는지라 처음 하는 홀 서빙 일이었지만 생각 외로 빨리 적응을 할 수가 있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와서 일하게 되자 사장님은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며 그리 썩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왜냐하면 아직 한국말이 서툴다보니 손님과의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아 여러 번 문제를 일으켰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이 점차 익숙해져 별 탈 없이 서빙을 잘하게 되니 사장은 나를 ‘이모’로 ‘승급’시켜주었다.

지금은 일이 완전히 몸에 배여 누구도 비길만한 상대가 없을 정도로 빠르고 솜씨 있게 척척 잘 하는 데다가 손님도 잘 다루고 매상도 팍팍 올려주고 사장버금으로 영업을 잘해주니 사장님은 인젠 나를 장사에 종합능력을 갖춘 인재라며 ‘선생’ 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만 둔지 오랜 선생대우를 한국에서 받고 있다. 식당주인으로부터 직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를 선생이라고 부르니 어느 날 어떤 손님이 가만히 주인을 부르더니 저 아줌마 이름이 선생이냐고 물어본 일도 있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느낀 것이라면 한국 사람들은 누가 얼마만큼 능력이 있고 열성이 있으면 그만큼 대우를 해준다는 것이다. 우리 교포들은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든 열심히 하고 그 일을 정복하기만 하면 꼭 좋은 대우를 받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 과정이 아주 힘든 터널이지만 이를 악물고 견디고 참으면 기필코 해가 뜰 날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태 나에게 잘해줬던 사람은 물론, 못되게 굴었던 사람들에게로 감사를 드린다. 내가 사장을 대신하여 하나의 식당을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까지 그 모든 사람들의 작용이 엄청 컸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속으로 앞으로 역시 현실에 발을 든든히 붙이고 그 어떤 역경의 요소이든 받아들여 내손으로 무마시키며 살아가리라 다지면서 이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