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자세

(전향미-한국산업인력공단 수기공모 우수작)

2008-09-19     [편집]본지 기자

처음 한국 땅을 밟아 인천공항에서 부천 가는 길에, 전철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면서 고향에 온 듯한 푸근하고 따뜻한 감정으로 갑자기 행복해졌던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너무 강한 충동에 마음이 울먹거려 지던 그날은 7개월 전 무연고 방문취업제의 혜택을 받아 한국에 입국하던 날이다.

중국에서 우수한 번역사로 인정받기 위해 악전고투했던 나는 많은 고민 끝에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한국행을 택하면서 목적부터 분명히 했다. 한민족의 문화와 정서를 현지에서 직접 체험하면서, 한국어를 보다 완벽하게 구사하고, 닥치는 대로 많은 경험을 하고 삶의 의미를 만끽하며, 인생의 지혜를 얻어 귀국 후 계속 해 나갈 프로번역사 활동을 위해 기초를 튼튼히 다지겠다는 것이었다.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입국 당시 심리적 부담이 컸다. 37살이 되도록 육체적 일을 별로 못해본 나를 위해, 주변 친지나 친구들이 불안 해 하면서 사뭇 걱정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번역이 바쁠 때는 연속 나흘 밤샘작업도 한 적 있는데 그까짓 육체 일이 다 뭡니까?, 했더니 혀를 끌끌 차면서 한국 가서 죽도록 고생해봐라, 한다. 한국취업생활에 자신감이 넘쳐있었던 나였지만 주눅이 들고 두려움이 앞서면서 3D업종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하지 말고 뭔가 계획적으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남들이 하는 대로 벼룩시장 구인정보를 보면서 전화도 많이 걸어보았고, 직업소개소도 찾아가 보았지만, 마땅치가 않았다. 어느 날, 교포를 상대로 하는 직업소개소가 많다는 대림에 가서 한일취업정보라는 간판을 보고 무작정 들어갔다. 일하는데 거부감이 생기면 안 되니까 무보수도 괜찮으니 가장 간단한 일부터 해보면서 우선은 자신감을 찾아야 할 거 같다고 했더니, 담당자가 이해된다는 듯 웃으면서 신도림 역 부근에 있는 찜질방 홀 청소 주말알바를 해보라고 했다. 일 못한다고 쫓아내지만 않으면 무보수로 해 줄 수 있다고까지 했는데 일당 6만 5천원이나 준단다.

찜질방은 꽤 컸고 주말이라 손님들이 많았다. 60여세쯤 되어 보이는 홀 청소 아줌마에게 일은 요령 없이 잘 못하지만 열심히 할 자신은 있다면서 많이 배워달라고 했더니, 호호호 웃으시면서 “뭘 배울 거 있나? 간단하지. 그런데 중국 사람들 처음엔 다 그러더라구, 열심히 하겠다구, 헌데 좀 지나면 꾀부리면서 한국 사람들 찜쪄 먹어.”하셨다. 개천을 흐려놓는 미꾸라지 한두 마리가 이 아줌마 앞에서도 꼬리 흔들고 사라졌나 보다.

나는 시키는 대로 수면실, 소금찜질방, 휴게실을 드나들며 베개를 주어놓기도, 묻혀 나온 소금을 털어놓기도, 다 마신 음료수병을 줏기도 했는데 전쟁에 나선 병사처럼 1초도 해이하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음료수병과 베개를 주어 놓으려 하면 아직 사용 중이라며 급하게 소리치는 손님도 있을 정도였다. 여유롭게 휴식을 즐기는 손님들과 완전 딴판으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내 모습이 꼴불견인지 아니면 기특했던지 경리가 찰떡을 들고 나와 먹으라면서 좀 쉬라고 했고, 홀 청소 아줌마가 다리 아프겠다며 걸상에 붙들어 앉혔으며, 손님이 커피를 타먹으라면서 호주머니에 막 넣어주었다. 그렇게 한참 지나니 홀 청소 아줌마가 막 웃으시면서 “일을 정말 요령 없이 하네” 하시더니, 휴지통에 비닐봉투 씌울 때 가급적 예쁘게 씌우고, 밀걸레로 홀 청소할 때는 허리를 굽히고 천방지축 대며 막 밀어가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쭉 펴고 자연스럽게 밀걸레를 잡고 쭉쭉 밀어나가야만 힘도 덜 들고, 보는 사람들이 편안하다는 것이었다. 참 닦고 쓸고 간단해 보이는 일에도 요령이 있었다. 10시간을 쉴새 없이 돌아치고 6만 5천원을 받아 집으로 가는 길에, 번역을 할 때처럼 열정과 진심을 다해 책임감 있는 태도로 임한다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인정받고 환영 받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하루의 일을 통해 완전히 자신감을 되찾은 모습에 기뻤다.

집에 오니, 남편이 끙끙 앓고 있었다. 육체 일을 별로 해보지 못했던 남편은 신체조건에 맞는 일부터 찾아 하라는 나의 말을 무시하고 한국에 왔으면 힘든 일 궂은 일 가리지 말아야 한다면서 무거운 문짝을 7층까지 메어 나르는 건축 현장 일을 한지 사흘 만에 포기하고 왔다. 사흘 일하고 나흘 앓고 난 뒤, 현장 일이라 하면 겁부터 먹는 남편이다. 그때 마침 이력서를 넣었던 곳에서 연락이 와서 짐까지 챙겨 구미시로 내려가기로 했다. 훌쭉해지고 주눅이 들어있는 남편과 짐 보따리를 싸 들고 전철역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세 사람이나 가던 길을 멈추고 어디로 가냐며 상냥하게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너무 고마워 눈물을 줄줄 흘렸다.

구미 아포에 위치한 큰 전자회사, 출근 첫날 조장이 “중국동포에게 한국의 따스함을 느끼도록 합시다” 하니까 20대 여성 위주의 30여명 사원들이 크게 박수를 쳐주던 일도 생생하다. 내 일은 기계에서 나오는 뜨거운 캐리어를 날라 와서 PCB를 장착한 후 다시 기계에 넣는 일이었는데 장착이 느리면 기계가 공운전하고 생산성이 떨어진다. 기계 3대가 동시에 가동할 때는 빠른 속도로 장착하여 기계에 투입시켜야만 납땜, 세척 등 후 공정이 차질 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나는 3줄로 놓여있는 PCB를 한꺼번에 잡고, 한꺼번에 캐리어에 놓는 단순동작을 남들보다 몇 초라도 빨리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손동작을 실행해 보고 시간을 따져 보았는데, 두주일 만에 입사 1년 차 되는 속도가 가장 빠른 애를 초과할 수 있었다. 뜨겁고 무거운 캐리어를 나르는 일은 여자애들이 기피하는 일이었기에 내가 주동적으로 담당하고 나섰더니 주변의 눈길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기계 3대가 가동될 때는 무거운 캐리어를 여러 판이나 들고 뛰다시피 걷는다. 그렇게 며칠 되니 동료 사원이 “언니, 천천히 하세요, 너무 벅차게 하시면 며칠 견디지 못해요” 했다. 고무격려의 말로 알아듣고 “괜찮아요 하면서 더욱 열심히 일했더니 화를 내면서 <언니 혼자서 다 해 제치면 우리는 뭘 하라구요”했다. 생각해보니 그 말도 맞았다. 생산계획이 많거나 적거나 항상 세상일을 혼자 할 듯 분주하게 돌아치는 모습이 찜질방 홀 청소 할 때와 마찬가지로 꼴불견일 수도! 혼자만 열심히 뛰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 서로 어울리고 합작하여 주어진 임무를 원만히 완성하는 것, 그 것이 바로 조직이고 회사라는 공동체 생활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매일 12시간 캐리어를 나르고 장착하면 온몸이 땀에 흠뻑 젖는데 다이어트 효과로 두 달 만에 살이 10kg나 빠졌다. 대신 심한 변비가 생겼고 구취가 나서 옆 사람과 가까이서 말하는 것도 두려울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대 조 사원이 조장에게 욕을 먹고 회사를 때려치운 후, 선후로 세 사람이나 채용했지만 모두가 입사 하루 이틀 만에 그만두는 바람에, 생산에 차질이 빚어졌다. 이때 조장이 나를 찾아 신입사원이 들어와서 안정될 때까지 반대조에 지원을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명쾌히 대답하고 5시간 휴식 후 바로 반대조 야간근무에 나갔다. 반대조 여자애들이 나를 보자 반색하는 표정에서 삶의 희열 같은 것을 느끼는 나, 입국 3개월 만에 벌써 한국 사람들과 무리 없이 융화된 것일까? 생산이 가득 밀린 상태에서, 세 사람이 부지런히 해야 완성할 수 있는 일을 신입생이 올 때까지 두 사람이 억척스레 완성하니 조장님과 차장님의 눈길이 또 달라졌다. 기업도시 구미에서, 30대 후반의 내가 20대 위주로 손놀림이 빠른 애들과 별 차이 없이 일을 완성하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고 본다. 아니 책임성, 도전성, 애사심을 갖고 일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 같다.

회사 일을 무난히 할 수 있게 되자, 반복되는 단순작업으로부터 오는 허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노트북을 사서 기존 고객들 및 번역사들과 자주 연락을 취하고 인터넷 정보검색을 하면서 번역시장 최신동향에 대해 알려고 했다. 번역은 간결하고 깔끔하며 정확한 언어가 필요한데, 현재 쓰고 있는 수기처럼 장황하게 늘어놓고 글이 매끄럽지 못한 등 부족한 점들을 개선하기 위해, 항상 한국 사람들의 말 한마디, 글 한 구절도 무심코 지나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주한중국대사관, 주중한국대사관 등 정부사이트에 들어가면 잘 되어있는 번역들이 많은데, 그것도 내가 퇴근 후 저녁 늦게까지 공부하는 좋은 재료로 되고 있다.

현재 나는 경남 양산시에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허무하다고 소리치다가 서비스 정신을 갖추고 예의와 친절로 다양한 손님을 상대하는 식당 홀서빙을 경험해 보면서 한국문화에 더 빨리 적응하겠다는 생각에 급기야 사직해 버린 것이나 고집 센 남편을 따라 다시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현재 회사에서도 열정과 책임감, 애사심을 갖고 노력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생산성을 위해 기여하고 인간성을 갖추고 열심히 일하다 나면 한국인과 똑 같은 정신적 대우를 받게 되고 심지어 한국인들보다 더 배려 받고 환영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중요한 것은 항상 초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 입국 당시에 품었던 굳은 결심이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는 열정으로 한국에 있는 날까지, 아니 중국에 돌아가서도 최선을 다한다면 꿈이 이루어지고 보다 나은 삶이 주어지지 않을까!

원제목 : 한국취업, 마음자세가 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