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 깊은 휴가(이 진숙 수기)
<국산업인력공단 수기공모 우수작>
나는 올여름 휴가는 일본에서 유학중인 아들딸과 함께 보내기로 했다.
불법체류로 몇 년 있다가 법무부 자진프로그램 덕분에 재입국을 하여 합법체류상태에서 마침 일본에 있는 자식들이 초청하여 다시 중국으로 에돌아 갈 필요 없이 곧바로 일본으로 갈수 있었다.
몇 년만에 애들과 만나는 설레이는 마음에 밤잠도 설쳐 버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김포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앉았다.
너무 일찍 서두른 탓에 공항에 도착하니 4시간 남짓이 기다려야 했다. 나는 차분이 공항의자에 앉아서 시간을 기다리며 가족과의 동반여행으로 출국준비에 분주히 서두르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힘들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나의 머리속을 스쳐 지나갔다.
시숙님의 초청으로 어려운 고국 방문의 행운이 우리 부부에게 차례 졌던 것이다. 나는 남편과 함께 하르빈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불과 두 시간도 못가서 한국에 도착 하였다. 공항을 빠져나와 마중 나온 시숙님과 함께 택시를 타고 친척집으로 가면서 창밖을 내다보니 황홀한 아름다운 길거리는 나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아. 여기가 부모님이 오매에도 그리던 우리조상의 땅 한국이란 말인가. 얼마나 많은 우리 조상들이 이 땅을 등지고 살면서 고향과 부모형제 .처자식을 그리며 눈물로 한 많은 세월을 보냈던가...... 만약 부모님이 생전이여서 우리와 함께 고향의 땅을 밟는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가......
비록 고국이지만 우리에게는 산 설고 물 설은 타향이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몇 년만 고생하면 중국에 돌아가 애들과 함께 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단 한 가지 희망으로 나는 식당에서 남편은 건설현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우리는 습기찬 지하방에서 살면서 힘들고 고된 생활이였지만 하루하루 저금통장에 돈이 불어날 때마다 재미와 희망에 넘쳐서 마냥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러나 우리들의 행복은 잠시였다. 그처럼 건강하던 남편이 위암 판결을 받았다. 이거야 말로 맑은 하늘에 날 벼락이였다. 한국에 온지 몇 개월 만에 이런 불행이 우리를 기다리고 이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하루도 지체 할 수 없이 남편을 동대문 이대병원에 입원시켯다. 친척들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수술은 받았지만 장기간 항암치료를 해야 했다. 나는 식당에서 버는 돈으로는 남편의 치료비를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목욕탕 일을 선택하였다.
남들앞에 나서기도 소심스러운 나는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암 판정을 받은 남편의 수술비와 유학중인 애들의 뒷받침을 하려면 “이 시련을 꼭 이겨야 한다. 내가 망설이면 안된다.”하며 마음속으로 외우고 또 외우면서 시작하였다.
학원을 찾던 첫날 학원문을 열고 들어서니 탈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이나 기다리는데 안쪽에서 소리가 나기에 소리나는 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순간 나는 한걸음 물러섰다. “세상에.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실습실안에는 너나없이 모두 몸에 실 한 오리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땀투성이가 되여서 두 손에 때 타울을 끼고 열심히 때 미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전경이라 괜이 쑥스러워서 얼른 문을 닫고 옆에 있는 탈의실 의자에 앉아서 마음속으로 “어쩌면 저 사람들은 저렇게 자연스러울까? 아무리 여자들끼리라도 그렇지, 어떻게 팬티도 입지 않고 배운단 말인같고 생각에 잠겨있는데 한사람이 문을 열고 나와서 “전화하시고 오시는 이 진숙씨지요. 빨리 옷을 벗고 들어오세요. 괜찮아요. 나도 이렇게 옷을 벗었지 않아요. 내가 이학원의 원장이여요. 처음은 다 쑥스럽지만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요.”하고 나를 안으로 끌었다. 나는 눈을 딱 감고 “이길밖에 없다.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옷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침대가 세 개가 있었는데 한 침대에 3명씩 한 사람이 눕고 두 사람이 누운사람을 상대로 연습을 하는데 서로서로 돌아가면서 연습을 하였다.
첫날에 주위 사람들을 살펴보니 모두40대이고 키도 크고 몸집도 어지간이 좋아보였다. 나는 50대에 몸집도 애소한 편이라 견지 할 수 있을 가고 망설이였다. 그러나 치료를 기다리는 남편을 생각하면 돈 많이 벌수 있는 이 길을 꼭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날부터 긴장과 쑥스러움에 원장님을 상대로 시키는 대로 주의하며 연습하였지만 이튼날 원장님의 피부는 여기저기가 울긋불긋 벗껴저서 온몸에 상처를 남겼다. 나는 너무나도 무안하여 연신 미안하다고 사죄하니 원장님은 아무러치도 않은 것처럼 몸소 시범을 하면서 뚱뚱한 사람, 야윈 사람, 피부가 연한 사람. 등등 상대에 따라 서비스를 달리해야 한다며 세심하게 가르쳐 주셨다.
학원을 마치고 나갈 때 원장님이 부르면서 봉투 하나를 나의 손에 꼭 쥐여 주면서 “이 진숙씨 힘내세요. 꼭 이겨내세요. 하느님이 도우실 거여요. 학원비는 되돌려 드릴께요. 치료비에 보태세요.”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너무나도 감격되여 아무 말도 못하고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원장님의 품에 안겨서 지나온 서름을 한거번에 쏟아내면서 통곡을 하였다.
내가 처음 취직한 목용탕은 역삼동에 있는 24시 사우나였다. 나는 야간팀이였다.초보인 나는 목욕탕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다. 강남이라면 부자동네이므로 취직만 하면 돈을 벌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나는 언니로부터 빌린 돈 천 만원을 주인에게 넘겨주고 계약하였다. 소개소도 목욕탕 주인도 너무나 상냥하고 좋았다. 나는 이렇게 희망의 길을 찾아서 첫 걸음을 하였다.. 낮에는 남편의 병수발하고 밤이면 사우나에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밤 열한시만 되면 간판전등과 사우나 전등을 모두 꺼버리는 것이였다. 나는 탈이실에 않아 손님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손님은 오지 않고 차디찬 방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면서 돈 한푼 벌지 못하고 고생만 하였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계약 보증금을 찾으려하니 24개월 계약이라 돌려 줄수 없다고 못 박았다.
주인은 계약 때와는 완전 다른 사람으로 냉정하였고 소개소도 나 몰라라 하는 태도였다. 후에 안일이지만 그때계약은 사기 계약 이였고 그 당시 그 목욕탕은 부도나기 일보 직전인 것이 였다.
나는 주인과 싸울 힘도 없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찔한 기분을 떨쳐버릴수 없다. 천만원이란 큰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수입도 없으니 남편의 치료비는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그때 나는 항암치료중인 남편의 창백한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찌저지는 것만 같았다. 허나 앉아서 원망만 하면서 기다릴 때가 아니였다. 나는 일어나야 했다. 남편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쓰러진 곳에서 다시 일어서야 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안탑갑게 지내고 있을 때 누군가 인천에 계시는 “중국동포 도움의 전화”김 소장을 찾아가라고 일러주었다. 김 소장은 나에게 법정에 설수 있는 용기를 주셧고 소송으로 천 만원의 돈도 찾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소개소를 통하지 않고 친구들의 소개로 서울에서 마송까지 마송에서 목감동까지 투병중인 남편의 치료와 휴양을 위하여 공기 좋은 장소를 찾아 목용탕을 옴기였다. 목용탕일은 152cm의 키에 체중이 45kg밖에 안되는 나에게는 상상 할 수 없는 고된 노동 이였다. 하지만 병든 남편과 애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나는 꼭 해낼 것이라 다짐하였다. 손님들도 나의 사정을 알고는 위로의 말씀과 함께 꼭 3천원 5천원씩 더 주면서 힘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도 감사한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써비스를 잘해주려고 노력하였다.
남편은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수술을 두 번이나 하였고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를 하면서 4년8개월간 노력하였지만 끝내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우리 두 부부의 피눈물 나는 투병과 간병생활은 이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운명적으로 암에 걸린 남편은 후회 없이 치료를 받다가 자기가 가야 하는 곳으로 같다. 나도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으로 치료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나의 힘으로 마련하여 사랑하는 남편을 저 멀리 하늘나라로 보냈다.
지금 나는 목용탕 매점을 운영하고 있다. 자랑스러운 아들은 공부를 잘해서 장학생으로 동경대학을 졸업하고 동경대학 대학원에서 박사공부를 하고 딸은 대학졸업 후 결혼하여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비록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지만 성공한 두 자식을 생각하면서 항상 가슴이 벅차오른다. 역시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지난날 슬퍼야만 했던 나에게 오늘과 같은 기쁨을 주셨으니 오늘 나는 내생애에 가장 뜻 깊은 휴가를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