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성공적인 취업을 하였는가[주청룡 수기]

<한국산업인력공단 수기공모 가작>

2008-09-09     동북아신문 기자

나의 오래 전부터의 소망이 바로 조상이 누워계시는 고국 땅을 밟아 보는 것이였는데 한국정부의 좋은 정책으로 하여 지난해 방문취업제로 한국에 오게 되였고 또 조상의 묘소를 참배하여 오매에도 그리던 소원을 풀게 되였으며 지금은 한 회사에 취직하여 출근하면서 돈도 벌고 있다.

한국에 온 후 취업교육을 받으면서 한국사회와 방문취업제에 대하여 일정한 이해를 갖게 되였고 고용허가제, 근로기준법, 출입국절차, 체류자격, 등 해당 법률학습과 산업안전교육은 나의 취업과 기타 한국생활에서 커다란 도움으로 되였다.

하지만 중국에 있을 때에는 한국만 가면 당장 일자리를 찾아 많은 돈을 벌 것처럼 생각하였는데 정작 와보니 처음에는 한국생활에 적응되지 않아 생각처럼 그렇게 순탄하게 되지 않았다.

취업교육을 받고 처음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상일동의 한 채소농장으로 갔다. 숙식을 해결해준다고 하기에 찾아갔는데 쌀만 대여 주고 그 외의 것은 모두 자체로 해결하며 기숙사는 바로 채소 하우스 안이었다. 너무나도 인격이 손상되는 일이었다. 중국에서 책상머리에 앉아서 사업하던 내가 어찌 이런 곳에서 먹고 자고 한단 말인가? 할 수없이 직업소개소에 돌아 와서 다른 곳으로 소개해 달라고 하니 가평의 한 두부공장을 소개해 주었다. 또 다시 행장을 메고 두 시간 남짓이 기차를 타고 가평에 갔다. 거기에 가 온종일 뜨거운 증기 속에서 일하다 보니 온 몸이 땀투성이였다. 일주일 일하고 결국은 그 난관을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 오고 말았다. 또 다시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이번에는 건설현장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또 행장을 메고 건설현장으로 갔다.

건설현장은 중국에서 본 노가다 판과 조금도 다름없었다. 건설현장에 들어서는 순간, 어쩌면 나도 이런 노가다행렬에 들어섰는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교원과 노가다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신분과 직업이었다. 건설현장에서는 안전모, 안전벨트, 안전화를 반드시 착용하여야 한다. 안전모, 안전벨트, 안전화를 착용한다는 자체가 건설현장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 같은 것은 기술이 없는 잡부라 하는 일이 폼, 시멘트포대, 철물 등 전부 무거운 것을 나르는 것이었다.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중국동포들이었는데 대부분 농사일을 하다 온 사람들이어서 어지간히 무거운 것은 대수로워 하지 않았는데 나에게는 정말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일을 하나 요령이 있게 하지만 나는 요령 없이 하다 보니 힘은 남보다 곱절 더 썼지만 노동효율은 남보다 많이 떨어졌다. 결국 10여일 일하고 잘리우고 말았다.

돈 벌러 왔다는 것이 이렇게 하다가는 왔다가는 경비도 벌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에는 일자리 찾기에 급급해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한국사회에 적응하여 한곳에서 장기적으로 일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한곳에서 몇 년씩 일한다고 하는데 나는 가는 곳마다 일자리나 고용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돌아오고 또 고용주의 마음에 들지 않아 해고당하여 돌아오게 되는가?

그 원인을 찾아보면 첫째로는 자기의 신분을 낮추는 것이었다. 중국에서의 신분대로 자신을 자기 스스로 높이 보고 남더러 자기를 높이 봐 줄 것을 바라면 누가 나를 높이 봐 주겠는가? 중국에 있을 때의 신분이 어떠하든 돈을 벌려고 일하러 온 것만큼 일반 근로자의 신분으로 나서야 한다.

둘째로 노동적극성을 높이는 것이다. 내가 남의 일을 해준다는 태도로 일할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자세로 회사가 바로 나의 집이고 회사의 일이 곧바로 나의 일이 다는 관점을 수립하여 무슨 일에서나 진심으로 열심히 일하는 이미지를 보여 준다면 고용주의 마음에 들 수 있다.

셋째로는 요령을 장악하고 일하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던지 요령을 장악해야지 마구잡이로 일하면 힘은 들어도 노동효율은 낮아지게 되여 당연히 회사의 마음에 들 수가 없게 된다.

넷째로는 속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던지 속도를 대단히 강조 한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이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장기간 내려온 습관이다. 한국에 와서 中國人慢慢地(중국사람은 느릿느릿)식으로 하면 그 어떤 고용주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의 몇 가지지로 찾아보니 나 자신의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 확인되였다. 나 자신이 한국사회에 적응하여야지 한국사회가 내 뜻에 맞추라고 하면 그것은 달걀로 돌을 치는 격으로 밖에 되지 않는다. 이상의 원인들을 찾은 다음 이번에는 꼭 한자리에서 장기적으로 일하기로 작심하고 다시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다. 직업소개소에서는 모 판촉물회사 생산직장을 소개하여 주었다. 그래도 직업소개소가 좋았다. 노동부 고용지원센터에서는 정규적 회사만 알선하여 주고 정규적 회사는 고령구직자들을 요구하지 않기에 우리 같은 고령 구직자들은 고용지원세터를 통하여 일자리를 해결할 수 없다. 직업소개소는 정규적 회사 외에도 전국 각지의 어떠한 일자리도 다 소개를 하여 주기에 고령구직자들에게는 원칙을 지키기보다 원칙을 어기고 동포들의 일자리를 해결하여 주는 직업소개소가 그래도 좋았다.

이번에는 새로운 일터에서 이전의 일들을 교훈으로 삼아 처음부터 회사사원들과 어울리면서 잘하여 보리라 작심하고 출근 첫날부터 위에서 찾은 원인들을 명기하면서 일하였다. 일반 근로자의 신분으로, 회사가 나의 집이고 회사의 일이 곧바로 나의 일이다는 주인공의 자세로 일하니 회사의 사원들과 서로 어울릴 수 있었다. 이 두 가지는 나의 주관의사대로 할 수 있었지만 요령을 봐가면서 일하는 것과 속도를 다그친다는 것이 나의 주관염원대로 되지 않았다. 회사사원들과 어울린다고는 하지만 일을 요령이 없이 하고 속도가 느리니 가끔 핀잔을 들을 때도 있었다. 이전 같았으면 이런 핀잔을 들을 때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반발심이 생겼으련만 이것은 나의 잘못이고 내가 꼭 이 회사의 일에 적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런 반발심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제가 아직 회사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여 그러니 앞으로 잘 가르쳐 주세요.” 라고 너스레까지 떠니 그들도 나를 이해하여 주었다.

이런 일이 거의 두달 가량 반복하여 있었으나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허심하게 접수하고 그들을 따라 배워 눈치 빠르게 손을 맞추어 일을 잽싸게 해나가니 나와 동료들 간의 거리도 더욱 가까워지고 나의 일도 점차적으로 숙련하여졌다. 이렇게 회사원들과도 친근하여지고 사장님도 마음에 들어 하였다. 나와 하루에 같이 이 회사에 들어 온 길림에서 왔다는 박씨는 나처럼 일솜씨가 서툴기에 종종 핀잔을 들를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는 허심하게 접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잘 못하고도 말대꾸를 하거나 짜증을 내였다. 결국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해고당하고 말았다.

한국에 와서 처음 몇 달은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여 이곳저곳 다니면서 일하다 나니 한곳에서 한 달을 채워 본적이 없었지만 이 회사에 와서는 인젠 8개월이 되지만 나 본인이 다른 일자리로 옮길 생각도 없고 회사에서 해고당할 위기감도 없이 마음 편안히 일하고 있다. 이러고 보면 이것은 성공적인 취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앞으로 더욱더 한국사사회에 적응하고 열심히 일을 잘 하여 고국건설에 힘을 이바지하는 한편 한국정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본국에 돌아가서 행복한 생활을 하려 한다.

2008년 8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