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이정숙 수기]

'한국산업인력공단 수기 공모' 가작

2008-09-03     이정숙

  “사내대장부 일언중천금”이라지만 아줌마의 말한마디도천근간다고우기는나는“예=약속=인격”이라고 우기며 살아왔다.

  첫 번째 약속

  2002년 2월 OA과정을 수료한 이튿날 강남에 있는 직업소개소로 찾아 갔었다. 정오가 막 다가오는데 소장님이 전화번호 하나만 달랑 적힌 종이장을 건네면서 말했다. “바람도 쏘일 겸 전주에 가서 면접보고 오세요. 고속터미널에 가서 사모님께 전화하고 가세요.”

  1999년 입국해서부터도 “예” 외엔 절대 토를 달지 않는 예스우먼인데다 중국연길에서부터 그렇듯 익숙한 전주비빔밥이 떠올라 나의 단순한 뇌세포는 순간 서울근교라는 메시지만 보내왔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예”만 남기고 고속터미널로 씩씩하게 떠났다.

  부랴부랴 티켓을 끊고 사모님께 출발시간을 알리고 나서 싸지 않은 표 값에 전주의 위치가 궁금해서 지도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체류한지 오래된 이종사촌  언니한테 전주가 어디에 있는가고 물으니 언니가 말렸다.

  “전라도에 있단다. 일자리가 많은데 왜 하필 지방에 가냐? 가지마!”

  순간 나는 아연실색해졌지만 몇 십 년간 곧을 곧자로만 운영되어온 돌 머리는 제멋대로 결정을 내렸다.

  “언니, 소장님께 대답하고, 사모님한테도 떠난다고 했는데, 약속은 지켜야죠.”
  헛걸음인 줄 알면서 오직 “예”란 한 글자 약속 때문에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거의 두 시간 달려서 휴게소에 이르렀다. 기사님께 얼마를 더 가야 되냐고 물으니 절반 밖에 못 왔단다. 한숨이 나왔다.

  (작년부터 130만원 받는 내가 할머니들도 안가는 전주에 면접 보러 간다면 소가 웃겠다. 그런데 약속은?) 나는 내가 한심했다. 계속 앞으로, 아니면 되돌아 서울로? 그러나 결국은 몇 십 년 지켜온 “약속 지키기” 관성이 나를 다시 의미 없는 전주행으로 떠밀었다.

  전주에서 왠 사모님과 마주앉자 그 분이 먼저 웃었다.
  “인상이 좋으시군요…사실은 서울에 사는 맞벌이 딸이 애기 볼 아줌마를 구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내가 면접을 보는 거에요.”

  (어? 까다롭네. 남 배려하지 않고 천리 밖에서 테스트 하나?!)

  너무 늦기 전에 서둘러 올라가야겠다고 일어서니 전주비빔밥도 드시고 차비도 하라며 세종대왕들을 내밀었다. 그런 돈 받지 않는 원칙도 있지만, 받게 되면 말려들어 간다는 생각에 단호히 거절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내 쇠고집보다 못지않은 사모님은 돈을 받기 전에는 놓아 줄 태세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았고, “애기를 잘 부탁한다”는 말씀에 엉겁결에 “예”하고 대답해 버렸다.

  그 이튿날부터 재작년 6월 재입국프로그램으로 출국할 때까지 나는 내 가정과 내 식구들을 위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두 세대 가정에서 열심히 일했다. 얼떨결의 약속도 약속인 만큼 철저히 지켜 사랑스런 천사를 남부럽잖게 잘 키웠다.

  애는 식구들은 저리가라하고 밤이나 낮이나 나만 따랐고, 나는 주체 못하는 모성애를 맘껏 발로했다. 돌이 지나서 부터 하루에 두 번씩 야채죽 혹은 고기, 새우죽을 끓여 먹였다. 하루에도 정성 다해 여러 가지로 갖추어 놓는데 물론 다 먹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혀끝으로라도 맛만 보게 하고, 한 숱가락이라도 먹게 해서 나중에 편식하지 않게 하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다. 극성스런 덕분에 애는 건실하게 자라주었다.

  청소, 빨래, 음식을 하려면 애를 가르칠 시간이 얼마 없기에 텔레비젼과 철저히 담을 쌓았다. 밤마다, 혹은 자투리 시간만 있으면 책을 읽어 주고 한글을 가르쳤고 놀아주고, 요리나 가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매사에 유희로 시작하여 애가 즐겁게 일상을 배우도록 유도 하였고 매 사물 하나하나를 관찰하게 하고 인지 시켰다.

  끊임없는 질문에도 애의 눈높이에 맞춰서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정성껏 대답해 주었다. 애는 선생님 한번 청하지 않고 3돌 반에 한글을 다 뗐다. 한국나이로 6세에 언어 표달 능력, 생활상식이 초등학교 때의 나를 초과하였다.

  약속을 지킨 덕분에, 애를 따라다닌 덕분에 아주 가까이에서 이명박 대통령님(당시 시장)과 현대건설 현정은 회장님도 “훔쳐” 보았고, 국회의원과 “실수로” 악수도 나눴고, 여러 가지 세미나에도 앉아 보았고 에버랜드 등 많은 곳에 발자국을 남겼다.

  작년 5월에 미국행을 한 그 가족과 여전히 메일이나 전화로 연락하며 두 차례의 한국방문 때 모두 만났고, 다음의 상봉을 기약하고 있다. 열흘 전엔 사모님한테서 여름휴가를 꼭 전주에 와서 보내라는 전화도 받았다.

  두 번째 약속

  작년 7월, H-2 비자로 재입국하여 ‘첫 직장’으로 지금 집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요리 등 모든 가사에서 스스로 베테랑이라고 자처하는 나에게 “청소기 돌릴 줄 아냐”고 묻기도 하고, 로봇도 무색해 할 오작동 없는 내 직업관에 감독시스템이 가당치 않아서 3일후 사의를 표했다.

  “사람 자주 바뀌는 거 싫으니.…일 년만 꼭 해 주세요.”

  주인들의 믿음에 감동이 되어 마음이 금세 180도로 바뀌어서 “예”하고 대답=약속을 해 버렸다. 그동안 몇 차례 괜찮은 일자리도 들어오고, 새벽기도를 나갈 정도로 갑갑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원래 떡돌처럼 쉽게 자리를 옮기는 체질이 아니기도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기에 지금까지 일 년째 떡 버티면서 프로패셔널(자화자찬)로 일하고 있다.

  2000년 3월 입주가정부로 일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주인들이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 어디서나 단 한 번도 영수증 없이 가계부를 쓴 적이 없다. 양해를 구하고 종이 쪼박에라도 기어이 품목과 가격을 적게 하였다. 단 한 번도 주인집의 전화기를 쓴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내 주변의 사람을 주인집에 들여 놓은 적이 없다.

  세상은 감당할 수 있는 일만 생기는지 가정부 첫날부터 지금까지 아침부터 오직 한국음식만 고집하는 집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싫증 한번 내지 않고 엄마의 마음으로 정성 다해 끼니마다 입에 맞는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상에 올리려 갖은 애를 다 썼다. 일 년째 하루에 두 세 개의 도시락을 싸고 있는데 가정부 시작부터 지금까지 주인들이 빈속으로, 빈손으로 출근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음식물 쓰레기를 배출할 때 철저히 일반 쓰레기와 분리하여 배출하였고, 페기름은 하수구에 쏟아 넣지 않았다. 쌀 한톨, 채소 한 잎이 일 년, 수개월에 걸친 신고 로 보이기에 제때에 되는 저장과 요리에 신경을 썼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고국이기에 뜨거운 물을 쓸 때마다, 전기를 쓸 때마다 누가 보던 안 보던 최대한 에너지 절약을 위하여 애썼고, 애들에게도 솔선수범하였다.

  집안의 가전, 가구, 주방등 많은 것들이 광택유리로 된 거라 유리세정제로 닦아서 닦은 흔적이 전혀 없이 했다.

  세 개씩 되는 도자기 세면대를 매일 세제로 닦으려면 시간도, 물도 많이 들기에 매직블럭으로 간단히 깨끗이 청소하였다. 빨래할 때 소재에 따라 삶기도 하고 세탁노하우를 동원하여 한 점의 얼룩도 없이 깨끗이 빨아서는 칼 같이 개여서 지정된 곳에 넣었다.

  어림잡아 오늘까지 수천 장의 옷들을 기꺼이 정성 다해 다림질하여 식구들의 품위를 높여주었다. 매일 다리미처럼 나 자신을 뜨겁게 달구어 식구들의 “몸과 마음”의 주름을 쫙쫙 반듯이 펴 드리는 것을 천직으로 생각했다.

  입주가사도우미를 시작해서 오늘까지 “주인의 마음도, 몸도 편하게 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음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오늘 감히 말한다. 나의 인격으로!

    2008 년 8 월 10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