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 신전
2004-03-08 운영자
서울을 떠난지 2시간 10분만에 중국민항은 정다운 연길공항에 도착했다. 4년전 연길기차역에서 떠나던 모습이 떠오르며 나는 점점 영을 그리는 원점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나의 생활은 여느 동포처럼 스트레스와 분투 그 자체였다. 돈을 버는 재미와 문화적 향수도 있지만 반면에 엄청난 스트레스가 마음 한 구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중에서 불법체류자라는 누명은 인권과 자유를 꽉 누르고 있어 공포까지 더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희노애락 백감교집하며 한국생활은 검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고향의 달콤한 흙냄새가 다시 나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나는 공항에 마중나온 여동생과 외삼촌, 고모부와 뜨겁게 포옹했다. 꿈인가 생시인가?! 고향은 영원히 드넓고 따뜻한 어머니 품이였다~! 밖에 나오니 찬 기운이 확 얼굴에 안겨오며 고향에 돌아온 걸 실감했다. 아직은 서울처럼 고층빌딩의 화려함이 없었지만 애써 늘어선 새 아파트를 바라보며 변화된 고향의 모습에서 고향친인척들의 땀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택시기사와 택시값을 70원(만원)으로 흥정하였지만 택시는 새길은 세금을 내는지라 조양천 쪽으로 에돌아갔다. 택시 안의 떠들석한 웃음 속에서도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초가집들을 바라보며 나는 동년의 발자취들을 주어들었다. 어릴 적엔 꿈이 많았지만 내가 외국에 갔다 돌아오는 꿈은 생각지도 못한 꿈이 아닌가?! 가끔씩 손님싣고 열심히 달리는 삼륜차도 눈에 안겨왔다.나는 저도 모르게 얇은 미소가 살짝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꼈다.고향의 또 하나의 풍격이 아닌가? 집에 도착하자 셋째 외삼촌과 어머니께서 뛰쳐나오셨다. 집안에도 몇몇 친인척과 가까운 이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하는 그들의 순한 모습에 내가 어색해졌다. 너무 낯설어서인가?
갑자기 ‘금의환향"도 아닌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2004년 1월 3일, 하루 사이에 온갖 스트레스와 서러움을 지니고 고국 건설현장에서 희망찾는 한 하찮은 불법체류자로부터 대학원 나오고 한의원 경영하는 정씨가문의 큰 도련님으로 다시 변신하고 있음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며칠간 고향의 따스한 품에서 달콤한 잠을 잔 뒤 법무부 사증인정서를 갖고 여권과 비자신청하러
연길로 떠났다. 어찌됐건 한국정부가 고마운 것이다. 아니면 고향 땅을 다시 밟는 영광도 못지니고 서러운 한국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다. 집앞으로 쭉 새롭게 닦은 1급도로는 용정과 연길이 더 가까워 보이게 했다. 이제 대형버스는 다 청산하고 중형버스와 택시들이 분주히 오갔다.중형버스도 사람이 꽉차 설념을 안했다. 뭐 연길에 가는 사람이 이리도 많을까? 이때 택시 한 대가 차츰 속도를 죽이더니 라이트를 끔뻑이며 얼음길 위를 미끄듯달려오더니 내 앞에와 섰다. 뒷좌석에 한자리가 있는지라 비집고 들어앉았다. 택시기사는 중국말로 요금이 10원(1600원)이란다. 가격흥정할 때 아니다. 차가 없는 건 둘째고 바깥날씨가 영하 20도가 넘는지라 날 살려라 하는 판국에 10원 더달래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택시엔 뒷자석에 나까지 3명 그리고 기사 옆에 1명 용정에서 연길까지 15원(2400원)하니 55원(1만원)이겠군. 돈도 쉽게 버네. 택시는 어느새 연길에 도착했다. 먼저 앞에 앉은 아가씨를 버스정류장까지 모시고 다시 내가 가려는 국제여행사 문 앞까지 내려다주었다.정말 편했다. 나는 여행사에 서류를 대행시키고 나와 친구와 약속한 장소로 가려고 지나가는 택시를 불렀다. 택시기사는 한족이였는데 흑룡강성에서 왔다고 한다. 동포들은 코리안드림땜에 다 빠지고 이젠 타성에서 그 빈자리를 메우는것같다. 택시수량도 대폭 줄였단다. 해마다 년검하고 기사도 5년이상 경력에 2만원(300만원)보증금을 내야 한다. 요즘 월수입도 8000~1만원(120만원~160만원)이란다. 나는 그말에 놀라 눈이 동그라졌다. 나는 내가 외국갔다왔다는 자부심이 금방 무너지며 스스로 하찮아지는 걸 느꼈다. 다행이 기사는 눈치못챈 것 같았다. 나는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한국에 가 외롭고 고달픈 고생하는 동포들까지 안스러워났다. 고향의 달도 둥그러지는데…?! 택시가 확트인 하남다리를 돌아 밑으로 새로 닦은 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했다. 한때 중국프로리그를 강타했던 연변오동팀과 강뚝축구팬들의 훈련모습을 보며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그 강뚝은 오간데 없고 고층건물과 새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이젠 아파트도 16차까지 있는 데도 있다.나는 그 아파트에 사는 주인들이 궁금했다. 보통 동포들은 한국에서 돈벌어 사지만 한족들도 태반이다. 한족들은 어떻게 그많은 돈을 모았을까? 정말 궁금했다. 5년전만 해도 연변은 택시 수량이 중국에서 두번 째로 많고 인구당 택시 수량이 제일 많고 가격도 5원(1000원)이면 시내 구석을 다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동포들이 앞다투어 택시를 시작했는데 지금 찾아보기가 힘들다. 지금은 혹시 한국에서 4년이상 불법체류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연변은 동포들이 부지런하고 마음씨 착하고 문화소질도 제일 높고 깨끗하고 살기좋은 고장으로 중국 CCTV ‘정대종합문예’에서도 3집특집으로 방영한 적도 있었다.
더우기 동포들도 형성된 축구팀이 프로리그에 진출하고 한국 최은택교수가 사령탑을 잡으며 4강까지 진출해 한류열풍을 거세게 일구었고 축구계 신화를 일구었었다. 그때 조선민족을 중국에서 으뜸민족으로 만든 최은택교수는 월드컵4강을 이룬 히딩크감독 못지않게 연변에서 영웅대우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내주었고 할아버지 한 분이 차앞에서 절까지 한 적 있다. 백두산의 민족의 넋을 잊지않고 장하게 잘했다는 칭찬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황성옛터’가 아닌가 싶다.조선족비례가 40%도 안되고 연변학생 50%이상이 편부모가 외국에 갔다는 조사결과가 가슴아프게 하는 현주소다. 그래서인지 고향에 왔지만 손님이 된 기분이다. 택시가 붉은 신호등 앞에 멈춰섰다.나는 잠시 사색에서 헤여나와 지나가는 삼륜차를 바라보았다. 열심히 젓는 모습이 아름답다. 비록 옷가지랑 초라해보여도. 이때 옆에 한 붉은 색 택시가 와 멈춰서더니 기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운전기사는 여자였는데 한족같았다. 한국에서는 여자기사를 보면 희유동물 만난 것처럼 희한해하는데 여긴 보통이다. 오히려 여자들이 많은 분야에서 석권하고 있어 음성양쇄라는 말까지 유행했었다. 나의 누나도 규소공장에서 돌깨는 일을 하고있다. 파란등이 켜지며 택시가 앞으로 달리자 기사는 옆에 차를 가리키며 저 택시사장은 5년전 삼륜차를 몰고 돈벌어 이번에 택시사서 기사를 쓰고 있단다.
나는 그말에 눈이 새동그래지며 억이 막혀 한동안 말이 안나갔다. 차 한 대가 7만원(1100만원)짜리를, 삼륜차타고 한번에 2원(300원), 전에는 1원(150원)씩 벌어 모았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5년 전엔 나는 외국바람에 스페인가려고 컴퓨터학원을 다녔었다. 그때 중국이 개혁개방이후 국영기업이 대부분 문을 닫으며 취업길이 막히자 해방후 40여 년만에 처음으로 삼륜차택시하는 것이 나타나더니 모두가 앞다투어 하는 항목으로 되였다. 나의 고종사촌동생도 대학진학에 실패하게 되자 삼륜차를 시작했었다. 밀차와 자전거를 접해 삼륜차를 만들고 여름철에 땀을 흘리며 돈벌기 시작했다. 어느날 내가 학원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형님, 앉소’하는 우렁찬 소리가 들려오기에 뒤돌아보니 얼굴에 땀투성인 동생이였다. 힘들지만 생기가 있었다. 내가 싫다고 만류하자 기어코 올라타라기에 마지못해 앉았지만 뒤에서 힘들게 삼륜차를 타는 동생의 모습이 생각나 가슴이 몹시 아팠다. 정말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아 금시라도 뛰여내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몇 달 지나 동생은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삼륜택시를 그만두고 벽돌공장에서 벽돌나르는 일하다가 또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몇년 지난 지금은 일본수속하고 있다면서 집에서 놀고있다. 그것도 고모가 한국에 나와서 이자와 원돈 1200만원을 2년에 다 갚고 아들 유학비용을 열심히 함바식당에서 벌고있다. 나는 갑자기 아Q가 생각났다. 아큐는 1910년대 중국 최초 사상가이며 문학가인 로신이 중국을 구하려고 일본에 유학가 의학을 배우다가 포기하고 중국사람을 깨우치겠다고 붓을 든 "아Q정전"에 나오는 인물이다. 아Q는 당시 부패무능한 만청통치를 반대해 손중산이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키자 본인도 혁명을 한다며 홀로 관가와 맞서다 결국 처형당한다. 로신은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당시 머리양태만 길고 머리가 빈 중국사람을 풍자해 모양이 Q같아 아Q라고 명한 것 같다. 아Q는 처형당하면서 호소한다 “20년후 또다시 사내대장부다!” 혁명의 계승자는 꼭 나타날 것이며 승리는 꼭 올거라고 암시하고있다. 오늘날 그 아Q는 어떠한가?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일전한푼 모아 어엿한 택시사장으로 되였다. 나의 눈 앞에는 동그라미를 그리듯 원점으로 되돌아온 나 그리고 동생, 고향에서 할일 없다며 한탄하는 고향친인척들이 엇갈리며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아Q앞에서 머리가 자연히 숙여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연변팀은 갑급팀에서 떨어진지 오래다. 그러나 다시 갑급팀으로 오르기 위해 해남도 해경기지에서 열심히 뛰고있다. 나도 이번엔 동그라미가 아닌 Q를 그리고 싶다. 달리는 택시 옆으로 열심히 삼륜차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 아Q가 되고싶다~! 나의 마음은 이미 삼륜차를 타고 앞으로 달리고 있었다~!
/중국 용정에서 도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