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독립가의 운명(연재 7) 수난의 시대

<류연산 장편인물전기>

2008-07-11     동북아신문 기자

2 운동화 한 켤레

그것은 1950년 8월이었다. 그는 `18살에 이사하여 와서 30살이 되도록 산 구태를 떠나 서란으로 갔다.

박재호한테 서란은 결코 낯선 고장이 아니었다. 바로 세 번째로 맞은 처가가 있는 곳이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박재호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서 결혼을 했으니 잔치 후 7일만에 첫 아내를 결핵으로 잃었고 그 후에 얻은 두 번째 처 역시 길진이를 낳고 오라지 않아 병사했다. 그리고 세 번째 부인을 맞았는데 지금까지 그하고 수난의 연대를 같이해온 허춘자(許春子 1931년 11월 4일 생, 평안도 덕천군 태생)였다.

그는 서란현 조선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가 맡은 과목은 한어문(漢語文)이었고 겸하여 학급을 담임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박재호의 등뒤로는 검은 그림자가 지긋지긋 묻어 다녔다.

이 학교는 사립이었고 동사회에서 교장을 선출했다. 그런데 1952년에 학교에서 선거운동을 할 때 그한테는 선거권이 없었다. 광복 전에 경찰을 지냈고 광복 후에 또 교민회 회장을 했던 것이 문제로 되었던 것이다. 그는 법에 신고하였다. 서란현 공안국에서는 전문 인원을 구태에 파견하여 조사를 하고 나서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려 주었다. 그는 뒤늦게나마 선민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불과 1년도 못되어 3반5반운동(三反五反運動)이 일어났고 뒤미처 사회주의개조운동(社會主義改造運動)을 시작했다. 학교는 공립으로 개조되었고 새로 공산당이 파견한 교장이 부임되어 왔다. 교장과 박재호는 별다른 갈등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두 집 안식구들간의 말다툼으로 말미암아 두 집 사이는 늘 버성기었고 결국 그것은 화를 몰아오는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1957년 여름 방학에 길림성 내 모든 조선족학교의 교원들은 연변자치주 소재지인 연길에서 열리는 학습반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말이 학습이지 기실은 일종의 숙반운동(潚反運動)이었다. 말하자면 반우파투쟁(反右派鬪爭)의 서곡인 셈이었다.

공산당의 정책은 <<노실하면 관대하게 처리하고 항거하면 엄하게 처리>>하며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면 훌륭한 동지로 된다>>는 것이다. 학습반에 참가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과거에 대해 이실직고하였다. 물론 박재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의 과거지사를 속임 없이 낱낱이 교대했다. 그런데 회의 측에서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대부분 선생들은 불과 한 달 <<학습>>을 마치고 돌아들 갔지만 박재호와 몇몇 사람들만은 놓아주지 않았다.

괴뢰 만주국 관공서에서 계장도 했고 경찰서에서 대리서장도 했으니 어찌 죄악이 없겠는가? 관공서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얼마나 괴롭혔으며 경찰서장을 하면서 공산당은 얼마나 죽였는가? 그리고 또 광복 후에도 한국 독립당에 가입하여 한교회장을 맡아하면서 어떻게 국민당에 일조를 하였는가?

매일과 같이 신문을 했다. 그러나 하지 않은 것을 어찌 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마음이 버선목이면 번지어서라도 보이련만 참으로 딱한 노릇이었다. 아니라고 하면 솔직하지 못하다고 책상을 쳤다.

그는 부정했다. 관공서에 취직을 한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이고 경찰에 복직한 것은 항일을 위해서이다. 광복 전에는 조선독립선봉대 제1지대장이었으며 광복 후에는 한국독립당 일원으로 한교회를 조직하였다. 비록 한국 독립당은 한국임시정부에서 조직한 정당이고 그 배후세력은 국민당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이끈 구태현 한교회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내전쟁에서 절대적 중립을 지켜왔다. 이 모든 것은 국민당 편에 서서 공산당을 싸워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전란 속에서 허덕이고 굶주리는 민족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회의 조직자의 귀에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매일과 같이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이 반복되었다. 그들은 얼리기도 하고 을러메기도 하였다. 하는 잡도리가 승인을 받지 않고는 놓아줄 태세가 아니었다. 시달리다 못해 박재호는 회의 측의 요구에 응해버렸다. 끝내 그들이 만들어낸 허위역사(虛僞歷史)를 승인한 것이다.

<<사람이 사노라면 착오를 범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감추면 일생을 불안 속에 살고 그것을 침통하게 깨닫고 새로운 출발을 한다면 마음 편한 날을 보내게 됩니다. 당의 정책은 종래로 탄백하면 관대하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꼬박 석 달을 시달리고 나서 박재호는 드디어 귀가했다.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그리고 불안했다. 회의 책임자가 아주 싹싹한 태도로 보내준 것이 아무래도 찜찜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얼마 안되어 박재호는 우파분자(右派分子)에 역사반혁명분자라는 죄명을 얻게 되었다.

그는 공직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수인 차가 와서 다짜고짜로 잡아갔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서 그는 집 식구들과도 일일이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옷도 입던 그대로였고 신도 신던 그대로였다. 덕지덕지 기운 옷과 앞 코가 짜개져서 발가락이 내미는 신이었다. 그러나 바꾸어 입을 옷도 없었고 바꾸어 신을 신도 없었다.

압송되어 간 곳은 길림성 휘남현(輝南縣)의 깊은 산 속 벌목장이었다. 성내 각지에서 가지각색 죄명을 쓴 정치범들이 모여왔다. 가혹한 노동개조를 통하여 죄 값을 치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너나 없이 법적인 재판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프로레타리아의 독재라는 철퇴로 계급의 적들은 여지없이 족쳐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논리였다. 모택동은 모든 반동적인 것은 치지 않으면 거꾸러지지 않으므로 무자비하게 족쳐야 한다고 호소했던 것이다.

그래도 <<죄범>>들은 허약한 그를 아껴서 도끼로 나무 가지를 따는 일을 맡겼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박재호한테는 엄청난 고역이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온 몸이 산처럼 무거웠고 일을 마치고 저녁에 산 막으로 돌아올 때면 천근 추를 달아맨 듯 발이 무거워 문턱을 넘기가 어려웠다. 몸이 건장하고 역바른 <<죄범>>들은 벌써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야 그는 간신히 막으로 돌아왔다. 아침은 옥수수떡 하나이고 저녁은 보통 푸대죽이였다. 그러므로 일을 마치고 먼저 온 사람들은 쌀알이 둥둥 뜬 죽물을 먹게 되고 나중에 온 박재호한테는 건 죽이 차려졌다. 그는 남 보다 푸짐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박재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식염도 귀하고 채소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 나중에는 우리 약한 사람들만 모아서 나를 책임지게 하고 한 개 조를 무어 비술나무 껍질을 벗겨오게 했다. 이는 대식품(代食品)의 원료였다. 그것을 쪄서 가루를 낸 다음 통 옥수수(粟) 가루와 섞어서 떡을 만들어 먹었다. (그러자) 항문이 막혀서 손으로 파내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배가 너무 고파) 뱀고기도 먹었고 개구리 알도 먹었고 비술나무 씨도 훑어서 먹었다. 봄이 되면 산나물을 뜯어 많이 먹었다. 같이 왔던 사람 중에서 병에 죽고 굶어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1958년 박재호가 잡혀가던 날을 부인은 47년이 지금에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저 영감이 운동화가 뒤축이 구멍이 나서 살이 땅에 대일 지경이였습지. 그래서 공자(월급) 나오면 신을 사려고 했는데 갑자기 잡혀 가다나니 해진 신을 신고 갔거든요. 돌아올 때까지 꼭 4년을 신만 보면 눈물을 흘렸습지비.>>

그때 노동개조를 가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남편을 신을 사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벌써 그 전에 남편은 공직을 박탈당했으므로 월급이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수입이 없는 가정 부녀였다. 식구가 많으므로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호구지책이 어려워 학교 식당에서 허드렛일이라도 시켜 달라고 애걸하다시피 했어도 학교측에서는 알은체도 하지 않았었다. 당서기네와의 개인적인 알륵이 주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당 회의에서의 부결 이유인즉 그녀가 부농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빈농과 하중농의 자제들도 직업이 없는 때에 착취계급의 자식을 어찌 특별 대우할 수 있으랴! 계급투쟁이란 사활이 걸린 것이므로 추호의 동정심도 베풀어서는 안 된다. 모택동은 계급투쟁을 호소하면서 어떤 농부가 겨울에 언 뱀을 불쌍히 여겨서 품에 품어서 기껏 살려놓으니깐 뱀에게 물려서 죽었다는 고사를 전국 인민들에게 새삼스럽게 상기시키기도 했다.

남편이 악마일지라도 그녀한테는 유일무이한 집안 기둥이었다. 남들이 한결같이 반동이라고 외면하고 욕하고 투쟁하더라도 그녀한테는 믿음직한 아이 아버지이고 사랑하는 남편이었다. 남편이 없다면 그녀의 집안은 무너져 내릴 것이고 아이들과 그녀는 삶의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남편이 떠나가고 아침을 먹고 나면 저녁을 때울 일이 태산같은 근심인 판에 한 무리 사람들이 오더니 다짜고짜로 집안의 가장집물을 모조리 밖에다 내버렸다. 반동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존재이므로 그 가속들도 국가에서 준 집에 더는 기거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긴 가장집물이란 낡은 궤짝 하나에 밥상 하나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옷이래야 입고 나면 여벌이 없었다. 부부간에 아이 셋, 식구 다섯이서 매일 밤 함께 덮고 자는 이불 한 채가 더 있을 뿐이었다. 툭 털면 먼지만 나고 서발 막대 휘둘러야 거칠 데가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런데 마당으로 쫓겨나니 당장 갈 곳이 없었다. 날은 어두워 오고 배는 고파도 쌀 한 홉 앉힐 솥이 없었다. 새로 이사온 사람들은 채를 볶고 <<축하연>>을 벌리는데 멋을 모르는 아이들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출입문 앞에 서서 <<구경>>을 하였다. 그것을 보는 그녀의 오장육부는 갈갈이 찢겼다.

그 날 밤 그녀와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안고 벼 겨를 넣어둔 나무판자막에서 쪽 잠을 잤다. 그날 따라 비가 내렸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벼 겨가 화목을 대신했던 시절이었으므로 바람막이는 안 되어도 빗방울은 가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뜬눈으로 꼬박 날을 새웠다. 그리고 날이 밝자 아이들을 데리고 본가로 갔다.

세상 천지에 믿을만한 곳은 어머니뿐이었다. 좋든 궂든, 잘 하든 못 하든 자식에 대한 어머니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어떤 날 생산대(당시 촌을 생산대라고 불렀음) 일 나갔다가 마을 사람들이 사위 말을 하면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말을 듣고 오면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어떤 말이 들려오든 딴 마음을 먹지 말아, 오르막이 있으면 꼭 내리막이 있는 법이니 참고이기면 좋은 세월이 온다고 타일렀다.

그 말이 그녀한테는 쥐 굴에 볕이 든다는 식이었다.

굴에 볕이 든다고 해서 쥐가 고양이가 될 것인가?!

그녀는 자살을 시도했다. 아이들을 앞세우고 강으로 갔다. 함께 익사해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을에서 강으로 가는 길에 마른 나뭇가지들이 널려 있었는데 둘째가 한 가지 한 가지 주어서 품에 안으면서 <<엄마, 이거면 저녁 불 때고 밥 해 먹을 수 있나?>>

라고 빤히 쳐다보며 묻는데 그 철없는 말이 그녀의 가슴을 통째로 무너뜨렸다.

(부모가 죄가 있지 새끼들이 무슨 죄이랴! 밥 해 먹고살려고 하는 애들을 어찌 죽인단 말인가!)

그녀는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을 어머니한테 맡기고 떠나려고 마음을 바꾸어 먹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죽기 전에 남편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는 면허를 신청했다. 마침 서란현 공안국에 출근하는 조선사람 최씨라는 분이 접대를 하는데 박재호의 아내라고 하자 아주 반겨주었다. 군에 함께 있었다고 하면서

<<박선생 그 양반은 마음이 곱고 고지식한 선빕니다. 이번에 일이 잘 못되어 고생을 하지만 조만간에 풀려 날 것입니다. 사필규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면허를 가시지요.>>

즉석에서 도장을 꽝꽝 박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면허를 포기했다. 동시에 죽음도 포기했다. 남편이 돌아올 것이며 자신은 애들을 책임지고 잘 키워야 한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그리고 이튿날 가도판사처(街道辦事處)로 갔다. 사무실 복도에 놓인 긴 걸상에 앉아서 아이를 젖을 먹이면서 며칠이고 공손히 앉아 있었다. 그랬더니 가도 주임이 무슨 일인 가고 물었고 그녀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주임은

<<아주머니, 돌아가서 기다리십시오. 일자리를 찾아드리지요.>>

라고 했고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어느 날 과연 도자기공장에 출근하라는 통지가 왔다. 한 달 월급은 32원, 입에 풀칠은 면하게 된 셈이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