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민족혼의 숨결은 만주벌판에 생생한데…
2004-03-04 운영자
민족의 아픈 역사가 남긴 흔적은 아직껏 곳곳에 남아 있었다. 수십년의 세월도 고결한 정신은 이기지 못했다. 역사의 현장은 시공을 초월해 민족을 관통하는가. 유적지는 생생했다. 지난달 27일, 기자가 찾은 룽징의 혜란강은 세월을 잊은 듯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비장한 분위기 그대로였다.
‘3·13반일의사릉’은 룽징 시내 외곽에 있다. 룽징은 원로 소설가 박경리의 소설 ‘토지’ 무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의사릉에는 망국의 한을 안고 애환의 삶을 살다 가슴 벅차게 태극기를 흔들다가 일제에 의해 숨진 영령들의 넋이 영면하고 있다.
안내인은 “고국의 대학생들이 만주 체험 여행과 농활을 하러 오면 자주 참배하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이 곳에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스러진 열혈청년 17명의 의사 중 13명의 무덤과 이들을 기리는 ‘반일의거비’가 서 있다. 의거비는 폭설 속에 꿋꿋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독립선언서에 남만주 대표로 서명하고 3·13운동을 주도한 남세극 선생의 유해는 여기에 묻혔다. 선생은 2000년 국내로 유해가 봉환됐으나, “그의 독립정신은 여전히 이곳에 머문다”고 안내인은 말한다.
현지 사학자들에 따르면 룽징의 3·13운동은 당시 룽징에 거주하던 김약전 정재연 등 민족 지도자들과 동포 3만여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동행한 옌볜대 K교수는 “여기에서도 조국에서 만들어진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며 “매년 3월13일이 되면 동북지역 동포들이 대거 참여해 기념행사를 갖는다”고 했다. 룽징시는 시 전체가 한민족의 역사 교육장이나 마찬가지다. 비암산의 일송정(一松亭)과 시인 윤동주의 묘지와 생가, 대성중학교(현 용정중학교), 용두레 우물 등 민족혼이 깃든 현장이 이어진다.
그러나 재중동포의 민족 의식만으로는 현장 보전과 관리가 역부족인 듯했다. 3·13의사릉 바로 뒤편에는 공장 건물이 흉물스럽게 서 있는 게 이것을 말해주었다. K교수는 “룽징시 재정이 열악해 유적 보전에 한국 후원자들에게 많이 기대는 편인데 한국도 경제 사정이 나빠 후원자들이 뜸한 편”이라며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