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 "격정시대"의 욕망연구(5)
소설사적 의의
한국현대소설사를 검토할 때 가장 크게 대두되는 문제는 이식사관의 극복이다. 한국현대소설사 뿐만 아니라 전반 민족소설사도 역시 이식사관의 극복이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근대 소설이 서구 소설의 영향을 받은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민족소설은 우리 나름대로의 질서를 지니고 있고, 단순한 모방이나 조종이 아닌 탈식민화 혹은 전유를 통하여 발전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초기의 소설에 대한 연구는 당연히 우리 소설의 성장 과정이나 내적 질서를 찾는 데 맞추어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안확은 1922년에 조선문학사를 기술하였다. 당시 상황은 한민족 전체가 극도의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민족 자주 독립의 염원이 3·1운동을 계기로 하나로 응집되어 노도같이 분출되었다가 좌절된 그 시점에 해당한다. 이때 안확은 <자각론>을 통하여 서구문물에 사로잡혀 형식적인 개화에 그치는 지식인들의 동향을 비판하고 진정한 문명진보를 위해서는 민족문화의 발전을 토대로 삼고, 현실에 필요한 자유·자주·자치의 새이념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승옥은 이러한 전통에 입각한 안확의 역사적 안목을 매우 의의있는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위의 한승옥의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에 입각한’ <자각론>에 대한 주목이다. 김학철의 격정시대는 민족 정신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현실적으로 남북이 분단된 후 남과 북이 별개의 문학처럼 분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분단 문학사를 어떻게 통합하고 이질적 요소를 서로 수용하여 어떤 관점에서 민족문학사를 복원하느냐 하는 문제는 서구의 충격으로 인한 전통 단절 문제보다도 어쩌면 더 심각한 과제 중에 과제일지 모른다. 이러한 언급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로, 민족문학사의 복원이 가장 중요하고, 둘째로, 전통단절론에서의 해방이 그것이다. 한승옥은 통일문학사를 기술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제안하고 있다. 1) 배제론의 극복, 2) 문학 내재론과 외재론의 상호 보완, 3) 문학성을 중심으로 한 문학사 기술, 4) 민족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민족 문학사 기술이 그것이다. 배제론은 남북한 모두 지금까지 문학사를 기술하면서 공통적으로 견지해온 태도들이다. 남한이 배제하는 문학인이 있다면, 북한도 역시 배제하는 문학유산들이 있다. 문학 내재론과 외재론의 상호 보완은 사상적인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고, 양식사의 문제인 동시에 정신사의 문제이기에 간단치는 않다. 그리고 민족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학사의 통합 문제이다. 이점에 있어서는 모든 문학사가 뿐만 아니라. 남북한 문학사가 모두가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문제는 관점이며 세계관의 차이이다. 그러나 이것도 한 발짝만 물러서서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보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한승옥은 지적하였다. 북한문학사는 민중사관을 앞에 내세워 민중이 계급적 억압을 타파해나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신소설에서 민중이 주가 되고 지주의 억압이나 일제의 억압을 타파하는 민중의 고난을 그린 소설만을 선별적으로 선택하여 그것을 문학사의 주류로 끌어 올려 중심에 놓고, 이를 고소설의 발전 형태로 전통단절론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상적으로는 편벽을 면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내포한다. 이것은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사상성에만 초점을 맞추었기에 문학적 다양성이나 실제 작품의 현실성을 외면한 처사이기에 소아적 시각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본고는 격정시대의 이데올로기 문제인 마르크스주의, 민족주의 등을 따져보고 민족 전통 정신유산인 선비정신을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단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빨치산문학’으로만 본 텍스트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위의 언급대로 ‘오로지 프롤레타리아 사상성에만 초점을 맞추’었다고 간주되었던 다른 작품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는 것으로 된다.
한승옥은 해외 동포 문학사의 적극적 포용과 편입이 이루어 져야 함도 강조하였다. 연변지역의 문학이 연구되어 남한문학사에서 거론되기 시작하였고 중국 소재 한국학 연구자들이 재중국 동포문학을 소개하기 시작한 것도 매우 의의있는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격정시대에 대한 연구는 민족문학사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우선 일차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승옥이 지적한 위의 네 가지 제안 중 1), 2), 4) 항에 해당되는 각 측면에서 의미있는 내용을 전달한다고 본다. 그리고 특히 민족 정체성을 중심의 문학사 기술을 위한 제안인 4항을 잘 구현한 것으로 된다. 즉 소설사적 측면에서 민족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선비정신을 보아내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김윤식·정호웅은 ‘소설사를 내적 형식의 역사’라고 하면서 ‘형식과 분리된 내용 편향이거나 내용과 분리된 형식 편향’의 우리 국문학계와 비평계의 일반적인 글쓰기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소설사 서술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지적에서 주목되는 것은 소설사 기술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의 유기적인 결합이다. 본고는 격정시대를 시점이론과 욕망이론을 변증법적으로 결합시켜 살펴봄으로써 ‘형식’과 ‘내용’을 동시에 살펴보고자 노력하였다. 분석을 통하여 주제적 측면에서 민족의 정신사가 부각되는 선비정신이 도출되어 전통의 연속성이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격정시대는 민족소설사에 있어서 전통의 단절보다는 전통의 연속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로 된다.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던 한국문학의 전통논쟁은 외부의 강제된 힘에 의하여 한국문학의 정체성이 훼손된 상처를 드러내 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근대 이후의 한국문학이 전통 지향과 모더니티 지향성이라는 서로 길항(拮抗)하는 양축을 중심으로 변용되어 왔다는 김윤식의 지적도 한국문학이 극복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는 병인 진단이라고 할 수 있다. 송현호는 지금까지 이식사관에 의해 근대 소설과 근대 이전의 소설이 단절되었다는 통념을 청산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민족문학을 바탕으로 한 세계 문학의 보편성도 찾아야 함을 역설하였다. 격정시대는 민족문학의 세계문학 속에서의 보편성을 선비정신으로 구현한 것으로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위의 논의들을 종합하여 격정시대의 소설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역사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자각론>을 잘 구현한 소설이 된다. 즉 이식문학론과 전통단절론을 어느 정도 보완한 소설이 된다. 물론 작가가 의식적으로 전달하고자 한 마르크스주의 이념이 텍스트의 표층 층위에서 강조되고 있지만 실상은 민족전통의 정수인 선비정신이 오히려 더 잘 나타난다.
둘째,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문학을 어떠한 방법론으로 통합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있어서 일정한 시각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된다. 즉 전통정신을 기반으로 소설사를 다시 볼 수 있는 계기를 위한 단초가 되는 것이다. 또한 전통의 연속과 단절, 그리고 변형이 어떠한 형태로 소설화되어갔는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통시적 측면에서 전통의 흐름을 따져본 후에, 공시적 측면에서 당대의 여러 사상 조류 및 생활양식이 전통과 습합된 양상을 점검해보면서 격정시대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셋째, ‘빨치산 문학’이라는 일반적 통념에 대한 재고를 가능하게 하는 작품이다. 격정시대는 역사전통과 높은 친연성을 보이고 있는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사상성도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김학철의 기타 장편소설 역시 이러한 선비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