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독립가의 운명(연재 5)전화 속에서
<류연산의 장편인물전기>
5 전화 속에서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을 부르짖으면서 아시아를 강점하던 일본은 본토에 원자탄 세례를 받고 무조건 투항을 하였다. 대세는 일변하여 한민족은 장장 36년이란 일제통치 식민지치하에서 드디어 해방되었다. 박재호는 광복을 맞아 미친 듯이 <<애국가(愛國歌)>>를 부르다가 잠이 든 친구들의 행복이 어린 모습을 보면서 <<해방(解放)>>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그것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해방이란 무엇인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던 우리가 마음대로 모든 것을 보게 되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던 우리가 해방의 종소리를 들게 되고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던 우리들이 <<우리나라 만세!>>, <<조선독립 만세!>>, <<동북 광복 만세!>>를 목청껏 외치게 된 이것이 바로 해방일 것이다. 야수와 같은 왜놈들이 반만년의 역력한 역사를 가진 단민(檀民)을 총칼로 짓밟아왔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조선은 독립국가로 거듭나게 되었고 조선의 만백성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고 부르고 싶은 노래 <<애국가>>와 <<단군기념가(檀君紀念歌)>>를 마음껏 부르게 되었다.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고난의 나날들에 우리는 드디어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는 참으로 사람다운 자유의 생활을 누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두 번째의 압박과 침략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남이 우리를 위하여 줄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위대한 해방을 영원히 유지해야 한다. 영구히 완전한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자! 이것이 곧 영구한 해방일 것이다.
박재호는 이 글을 쓴 시간을 단기(檀紀) 4279년 2월 1일 오후 12시 15분이라고 적었다. 그는 광복을 맞은 그 순간부터 일제의 연호인 소화(韶和)와 괴뢰 만주국의 연호인 강덕(康德)을 버리고 단기와 서기로 일기의 시간을 표기하였는데 그것도 단기가 앞에 있고 서기는 괄호 속에 참고수치로 기록했다. 그만치 조국과 민족이 그한테 있어서 중요한 존재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광복을 맞은 한민족의 기쁨과 흥분은 잠시였다. 전후의 새 질서는 금방 잡히지 않았다. 친일파들은 죄가 무서워가 부랴부랴 도망을 쳤다. 관공서나 경찰서에 같이 근무하면서 죄를 진 사람들이 박재호를 보고 함께 떠나자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비록 일제의 관공서에도 근무했고 일제의 경찰로도 있었지만 양심상 꺼리는 일은 하지 않은 그였다. 오히려 여러 가지로 도와주었으므로 광복이 나자 친일파들을 숙청할 당시에도 그는 별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자라도 가진 사람들도 너도나도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노자를 마련할 수가 없어서 귀국일자를 뒤로 미루었다. 추석을 앞둔 때라 누렇게 영글어가는 한 해 농사를 차마 그대로 버리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귀국 민을 반겨줄 만한 조국도 없었다. <<민족의 조국은 양분의 양상이 분명해지고 자체 곤경에 빠져 우리들을 돌볼 경우가 아니었다.>>(박재호 씀 <<구태현 조선민족사>>에서)
그리고 동북은 일시적으로 무정부상태의 대혼란에 빠져있었다. 광복 직후 3일만에 신경에서 현정권(縣政權)이 섰으나 무효로 되었다. 그리하여 원 위만주국 관공서가 임시로 유지회(維持會)와 치안대(治安隊)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광복과 함께 재중 조선인들은 일본인들과 똑같이 중국인한테는 눈에 든 가시와 같은 존재로 되었다. 이른바 내선일체라는 일제의 민족 이간책(離間策) 때문이었다. 만주국의 일제의 치하에서 조선인들은 일본인 다음으로 허울뿐인 2등 공민의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아직 동북 땅에 새 질서가 잡히지 못한 동안 분노한 중국인들은 도처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을 분별하지 않고 욕하고 때리고 빼앗고 죽였다. 그러한 상태가 하루 이틀로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뒤미처 동북 땅을 무대로 벌어진 국공양당의 국내전쟁이 옹근 4년 동안 지속되었다. 박재호의 일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읽을 수 있다.
박재호는 동포들이 당하는 참혹함과 억울함을 외면하고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또 자기와 가정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훌쩍 떠나갈 수도 없었다.
그는 끝내 동포대중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만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 <<험한 세상에서 견디는 이유>>라는 제목의 일기에 아래와 같이 밝혔다.
가도 오도 못하는 이 내 신세여
간다면 어디로 가고 안 가면 또 어디에 있을 건가
나는 아직 큰 바램도 있지 않다
다만 생명이나 유지한다면 만족이다
여기도 동포를 위한 일터가 있다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함부로 가는 자가 일군인가
여기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면
오늘도 좋고 내일도 좋고 나도 가교야 말리라
그러나 아직은 손도 부족이고 갈 처지도 아니다
여기에 나의 직장이 있고 일 할 자리가 있다
새로운 시대에 박재호는 그 전의 박재호가 아닌 새로운 일군으로 거듭 났다. 묵은 사유를 가진 어제의 일군이 아니라 시대에 맞는 이상을 가진 새로운 일군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광복이 되어서 나흘 째 되던 8월 19일 구태현 내의 여러 계층과 여러 종파의 동포인사들을 결집하여 과도기적인 조선인 자치기관을 만들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오직 자력소생(自力蘇生)과 유지발전(維持發展)의 길을 모색하려는 의도였다. 후에 그 조직은 독립당 산하의 구태현조선인회(일명 교민회(僑民會)라고 함)를 조직하였다. 양조희(梁朝熙)옹을 회장이 되고 박재호가 상무 부회장(후에 회장)을 맡았다. 8월 말에 독립군 출신의 장승해(張承海 일명 用霖)씨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스스로 봉사(奉仕)하기로 결심한 두 청년 박춘덕(朴椿德)과 김이남(金二男)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각 지방에 분회를 조직하여 구태현 내 조선인이 거주하는 곳이면 교민회가 조직되었다.
(교민회의)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중국 당국과 우리 민족의 생계를 위한 일들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는 순 교민의 입장에서 중국내정에 개입하지 않았기에 국민당과 공산당의 두 개의 적대적 정부와 두 개의 적대적 군대의 허용(許容)을 받았다. 또 둘 다 우리를 의심도 했으나 결국은 존속하게 되었다.
1947년이 되자 (국민당 통치시기) 우리는 향상(向上) 발전하기 위하여 각 조직(민회와 청년 및 구제회)을 정돈하였다.(다음 도표와 같이)
가: 민회조직
회 장: 장용림 1947년 가을 청산당함
부회장: 박재호 1947년 가을 회장 대행
총 무: 방성원(方成園)
농 사: 우종현(禹種賢)
민 생: 이희동(李熙?)
사 업: 김원경(金元經)
문 서: 김의근(金義根)
나: 청년단
현 본단장(縣本團長): 박재호
현 간사장(縣幹事長): 김의근
현 간 사(縣幹事) : 박춘덕 김훈봉(金壎鳳)
현 아래 지단장(支團長)들로는 후건툰(后巾屯)에 장선덕(張善德), 음마하에 전두칠(全斗七), 우수림(?樹林)에 황수범(黃壽範), 강삼진(姜三眞), 가가툰(賈家屯)에 백순흠(白順欽), 남툰(南屯)에 김의근(겸직)이었다.
다: 구제회(救濟會) 주임은 박재호가 겸임했다.
지방분회와 청년지단은 자체로 조절하되 대체적으로 변함이 없었고 구제회는 과동난(過冬難)을 해결하기 위함이었기에 자연 해소되었다.(박재호 저 <<구태조선민족사>>에서)
당시 청년단은 어떤 일을 했는가? 민국 35년(서기 1946년, 단기 4279년) 12월 15일에 발간된 길림성 구태현 한교청년단보(韓僑靑年團報) 제2호에 실린 청년단의 강령과 당면 임무를 보면 청년단의 역할을 대개 짐작할 수 있다. 단보는 이렇게 기록했다.
강령
一 우리는 심신을 수련하여 우리 청년의 소임을 다하려 함.
二 우리는 중한 양국간의 공고한 우호관계를 가지려 함.
三 우리는 우리 사회의 낡은 껍데기를 벗기고 새 생활운동을 추진하려 함
당면 임무
一 정신적 단결과 물질의 제공으로 우리 단체를 공고히 할 것
二 정신적 수련과 신체의 단련을 즉시 실시할 것
三 모든 행동을 우리가 솔선수범할 것
四 국문(한글) 보급운동(문맹퇴치)을 전개할 것
五 소년들의 지도교양을 실시할 것
六 제약부위(濟弱扶危)의 실천을 적극 전개할 것
七 우리 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며 대동단결할 것
八 강제혼인의 제도와 허례폐풍(虛禮弊風)을 반대할 것
九 타지 청년단체와 연락을 긴밀히 할 것
十 구태현 한국교민회를 지지할 것
十一 확건운동을 활발히 시행할 것
十二 일본화의 습관을 철저히 폐지할 것
十三 한중 양 민족의 친선의 구현을 촉진하기에 노력할 것
본단인사(本團人事) 본단장; 박재호
간사장; 金義根
간사 朴椿德 金壎鳳
광복 1주년에 즈음하여 박재호는 지난 일년동안의 일을 아래와 같이 회상하였다.
나는 과거에 같이 살던 사람들과 같이 살며 또한 여전히 이 곳에서 나는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신진 각계 인사들과 선배들과 손을 잡고 이 과도기 또는 혁명기에 미력이나마 공헌하고 있다. ---
(구태현 조선인회 본부 성원에는) 별별 인물이 혼잡하여 형세가 자못 곤난하였다. 자연 도태와 강력한 인물개조로 일은 잘 되어갔다.---나는 상임간사의 직무를 내놓고 외무부장의 직무를 맡게 되었다. 나는 성심성의로 모든 유혹과 위험을 무릎 쓰고 일했다.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으로 돌진하였다. ---
나는 처음부터 우리의 당면한 문제 해결에 한 힘이 되기를 바란다. ---이리하여 동북의 새 건설에 협력하고 나아가서 조국건설을 위해 전력을 다해볼까 생각한다. ---나는 평화가 곧 도래하며 우리 민족의 완전한 해방이 곧 실현될 것임을 믿는다. 그것을 위해서 동포들은 하나 같이 단결하여 자강자립함을 바란다.
이와 같은 비장한 각오를 지니고 그는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희망을 지향하고 분투하였다.
그러나 형세는 갈수록 준엄했다. 국공 양당(國共兩黨), 양군(兩軍)의 격렬한 내전은 동북 전체를 전화 속에 밀어 넣었다. 특히 구태는 정권교체와 군사진퇴가 빈번한 고장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인들은 생불여사(生不如死)의 처지에 놓였다. 포화를 피해 농토를 버리고 사람들은 피난을 다니기에 바빴다. 미처 도망을 가진 못한 사람들은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의 의심의 대상이 되어 경하면 문초를 당하고 중하면 죽음을 당했다. 조선인들은 국공 양대 세력의 틈새에 끼어서 숨도 바로 쉬지 못하였다. 그러한 때 박재호는 동포대중을 위한 사업에 모든 것을 바쳤다. 동지들을 규합하여 산더미처럼 쌓인 난제들을 하나 하나 풀어나갔다.
위만(僞滿: 만주국) 때 일제의 힘을 빌어 한족(漢族) 지주의 토지를 강제로 수매하여 수전을 개척한 음마하농장은 광복과 함께 갈등이 되살아나 중국인과 조선인간의 유혈사건으로까지 연장선을 그어갔다. 중국인들이 농산물을 훔쳐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신경에 가서 대한민국 청년무장을 불러와서 닭을 잡아서 원숭이를 보이는 수법으로 벼 도적을 총살하였다. 그 보복으로 한족들은 상류에서 음마하 강둑을 터뜨렸다. 농장의 논 전체가 물에 잠겼고 곡식 한 홉 거두지 못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모두들 굶어 죽을 판이었다.
박재호는 구제회를 결성했고 친히 주임을 맡았다. 그리고 전 현의 민회를 동원하여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쌀이 있는 사람은 쌀을 내고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내서 함께 엄동 설한을 이겨나갔다.
단기 4280년 2월 3일 오전 10시, 천지간에 어디라 없이 백설이 휘날리는 추운 날씨였다. 박재호는 농사부장 우종현씨와 함께 전 만주 교민회 총회 참석 차 구태를 떠났다. 다음 날 장춘에서 다시 심양행 급행 열차를 갈아탔다. 3등 표라서 이른 아침에 떠난 열차가 오후 5시에 심양에 도착할 때까지 무서운 곤욕을 겪었다.
회의는 7일부터 시작되었다. 동북에서의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온 18, 9개 현 조선인 교민회 대표들의 모임이었다. 복잡한 상황이고 각지의 대표들이 자기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바람에 7일간의 갑론을박을 반복하다가 간신히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회의 기간에 박재호는 대회석상에서 지방정세보고를 하는 기회에 구태현의 현지실정을 알리고 좌중의 동정을 벌기도 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 방명록(芳名錄)과 취지서(趣旨書)와 영수증을 들고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동정금(同情金)을 청하였다. 그러나 회의석상에서는 한껏 동정을 해오던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심양으로 떠날 때만 해도 총회를 통해 교민들이 일치 단결하면 만난(萬難)을 물리치고 오라지 않아 만주에서의 조선인의 평화와 자유가 실현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그러한 낭만을 잃었다. 과연 자유와 평화가 실현될 수 있을까? 라는 회의와 절망이 한 가슴을 채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