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귀국하는 날엔 애가 대학공부 그만두는 날입니다…”
수교전 입국자들의 이야기②
전 임경학이라고 해요. 1991년 6월 24일자로 그토록 그리던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성실하게, 열심히 이날까지 살아왔어요.
저는 1992년 8월에 귀국하려고 비행기티켓을 끊었으나 공교롭게도 위와 십이지장궤양(다섯 곳 구멍이 났음)이 생겨 길바닥에 쓰러져 입원하게 되었지요. 의사선생님은 한 달만 늦게 왔어도 생명이 위험할 뻔 했다고 해요. 저는 4백 밀리 리터짜리 혈액을 무려 여덟 팩이나 수혈 받고 겨우 연명했지요. 의사선생님은 1년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요양해야 한다기에 저는 손을 놓고 쉴 수밖에 없었어요. 다행이 여러 한국친구들의 경제도움이 있었기에 병은 완치되었지만, 대신 빚이 많이 생겨 다시 빚을 갚으려고 건설현장과 식당 등지를 다니며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나 1994년 5월 17일 밤, 재수 없게도 뺑소니차에 치어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신 골절상을 입고 또 수개월간 병원 신세를 져야했습니다. 퇴원 후 2년 8개월간 재활치료를 받고서야 겨우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어요.
저에게는 아들 녀석 한 명이 있어요. 중국도 시장경제원리에 따르기에 학비가 장난이 아닙니다. 저는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아들만은 꼭 좋은 환경에서 훌륭히 키우고 싶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지만, 한국에 IMF위기가 닥치는 관계로 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됐어요. 몸도 쾌유 되었으나 현장에서 무거운 일하기에는 무리였구요.
그래서 몸에 알맞은 직업을 택하다보니 목욕탕 때밀이 일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것도 주인을 잘못 만나 보증금을 날렸고, 새 아파트 입주자를 상대로 난연 필터 장사를 했지만 그것마저 수개월간 봉급을 받지 못했어요.
설상가상 몸이 회복되어 이제는 목돈을 벌어 아들 뒷바라지 잘하려 했는데 현장일을 시작한지 2개월도 못돼 그만 법무부 단속에 걸려 무려 8개월이란 황금 같은 긴 세월을 철장 속에 보내게 되었네요.
대한민국정부와 법무부에서는 불법체류로 있는 우리 동포들을 구제하고자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혜택을 주었지만, 저는 도저히 중국에 갈 수 없었어요. 연로하신 양부모님이 피눈물 나도록 보고 싶었고, 7살배기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놓고 왔는데 이제는 의젓한 대학생으로 성장했으니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그래도 저는 못 간다고 결론 내렸어요. 가서 발 뻗고 잘 집 한 칸 없는데다가 제가 들어가서 무얼 하겠어요? 최소한 1년은 그냥 먹고 살아야 하는데 수중 무일푼이다 보니 병원에 가서 재활 치료는 또 어떻게 하고요? 제가 귀국하는 날은 애가 대학공부 그만두는 날입니다. 저는 아들한테 못 배운 恨과 무식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할아버지의 고향인 서울이 너무 좋아요. 저만 부지런히 일하면 먹을 걱정이 없고, 그토록 배움에 목마른 아들을 걱정 없이 대학 공부시킬 수 있으니까요.
저는 20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돌이켜 보니 34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네요. 그 34년에서 17년을 할아버지 고향인 서울에서 생활해왔으니 이제는 서울생활이 몸에 뱄어요. 음식 습관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말입니다. 심지어 17년간 중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더니 이젠 중국말로 상대방과 대화도 못하겠고, 지어는 상대방의 말뜻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 하겠어요. 그래서 더욱 서울에서 살고픈 마음이 간절해져 드디어 2005년에 한국 국적을 신청하였어요. 저는 앞으로도 한민족 일원으로, 열심히 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서울의 ‘이방인’ 임경학 정중히 올립니다.
2008년 5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