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과 경쟁하는 날
2004-02-10 운영자
“서비스에도 원산지 표시를!”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존 케리 상원의원이 기발한 공약을 내걸었다. 서비스도 어느 나라에서 ‘생산’되는지 소비자가 알 수 있도록 표시하겠다는 거다.
원산지 딱지란 ‘물건’에 붙는 것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할 당신을 위해 예를 들면 이렇다. 지금 미국에 있는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카드 고객이 카드사에 문의 전화를 걸면 목소리가 지구 반바퀴를 돌아 인도에 있는 상담원이 전화를 받게 된다. 이 카드사가 전화상담 콜센터를 인도로 옮겼기 때문이다.
유창한 영어로 응대하는 수화기 저쪽 상담원이 인도 사람인 것을 대개의 고객은 눈치채지 못한다. 거리를 소멸시킨 디지털 통신혁명의 위력이다. 옆동네의 시내전화나, 수천㎞ 떨어진 인도의 국제전화나 큰 차이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케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돼 공약을 실천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인도인 상담원은 ‘인도에서 전화받는다’는 사실을 신고해야 할 것이며, 소비자들은 쇼핑할 때 ‘Made in India’와 ‘Made in USA’를 가리듯 원산지에 따른 서비스의 질을 따지게 될지 모른다.
그럴 만한 사정이 미국에겐 있다. 서비스와 사무·전문직 같은 화이트칼라의 일자리가 뭉텅뭉텅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나 회계·세무사, 기업인사·재무 파트 같은 사무·서비스직 일자리가 1년에 수십만개씩 미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과거 일자리의 해외이전 하면 생산직을 의미했다. 공동화(空洞化)란 제조업만의 문제였고, 서비스 일자리는 국경(國境)과 거리의 장벽 아래 안전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 서비스·사무직의 보호막을 디지털 혁명이 단숨에 거둬가 버렸다. 지난 연말 미국에선 수만명의 미국인이 인터넷을 통해 인도에 있는 인도인 회계사에게 세무신고 일감을 맡겼다. 고학력 전문직의 대명사인 회계사마저 수천㎞ 떨어진 인도 회계사와 직접 경쟁하는 시대다.
사장은 영국에 있는데 비서를 인도에 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비즈니스 프로세스의 일부를 뚝 떼어내다 해외로 옮기는 글로벌 아웃소싱(외부위탁)이 일상화되면서 일자리는 자유자재로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그 최대 수혜국이 인도다. 영어 구사력에다 IT(정보기술) 기술력까지 갖추고 선진국의 서비스 일자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라면 인도는 이미 ‘세계의 사무실’이다.
대통령 선거의 이슈가 될 만큼 미국의 경계감은 대단한 모양이다.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인도 쇼크’를 세 번째 찾아온 해외발(發) 충격파라고 썼다. 첫 번째는 1957년 유인(有人) 우주선을 쏘아올린 ‘소련 쇼크’, 두 번째는 1980년대 미국 제조업을 초토화시킨 ‘일본 쇼크’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인도 사람이 한국어를 못하지 않는가. 당신이 화이트칼라라면 미국의 고민을 지켜보며 인도가 절대 뚫을 수 없는 ‘한국말의 보호막’에 안도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안심하긴 이르다.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언젠가 콜센터를 중국 옌볜(延邊)으로 옮길 구상을 밝혔듯 200만 조선족이 잠재적 경쟁자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 동포들이 디지털 네크워크로 무장하고 서울 표준말을 익혀 어느 날 당신의 일자리를 낚아채갈지 모른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세계에서 가장 임금이 싸고 가장 경쟁력있는 노동자와 직접 맞붙어야 할 냉혹한 시대가 찾아오고 있다.
조선일보 2004.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