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독립운동가의 운명(연재1)

장편인물전기류연산

2008-04-25     동북아신문 기자

에필로그

2004년 10월 18일, 길림성 서란시(舒蘭市) 빈관(賓館)에서였다.
작가 김태복(金太福 60세, 서린시 조선족중학교 퇴직 교원)선생은 서란에 살면서 보고 듣고 한 이야기들을 하는 중에 불쑥 박재호(朴在浩)라는 이름을 거들었다.

<<박재호(朴在浩)라고 원래 우리 학교 선생이었습니다. 광복 전에는 구태현(九臺縣) 경찰서에 있으면서 독립운동도 한 분이구요. 광복 후에는 구태현 한교회 회장도 맡아 하셨지요. 서란에 와서 조선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가 우파 (右派)때부터 별의별 고생을 다 하신 분이지요.--->>

김씨는 자기가 알고 있는 박재호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뒷말은 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 나의 관심사는 경찰신분의 독립운동가였다는 소설 같은 사실이었다.  
  
<<그분이 생전이십니까?>>
나의 물음에 김태복선생은
<<생전이구 말구요. 지금 여든 넷인가 됐을 걸요. 그런데--->>
라고 하면서 긍정 뒤에 시답지 않게 토를 달았다.
<<그런데라니요?>>
나는 다급히 그의 말꼬리를 잡았다.

<<치매가 왔어요. 한 이태 되었을걸요. 얼마 전에 갔더니 사람을 몰라봐요. 때로는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가 봅데다.>>

김태복선생의 김빠진 소리에 나는 맥을 놓았다. 맹랑한 노릇이었다. 동삼성 조선족이 사는 곳이라면 메주 밟듯 했다는 소리를 듣는 나에게도 서란은 빈 구석이었다. 길림에서 할빈으로 오가면서도 그 중간에 있는 서란만은 지나쳤던 것이 못내 후회되었다. 나의 답사에 대해 세월은 무정한 재판관이었다.

<<그래도 혹시 정신이 맑을 때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때 나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그런 심정이었다.
<<글쎄요. 그 아들을 불러볼까요?>>
김태복선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그러십시다.>>
나의 불같은 재촉에 김태복선생은 작은 수첩을 꺼내어 한참이나 뒤적이더니만
<<예전의 전화인데 지금도 그대로 쓰는지 모르겠구만요.>>
라고 반신반의하더니 전화를 걸었다.

이튿날 박수진(朴守振 1952년 11월 15일 생)씨가 호텔로 찾아왔다. 김태복선생이 말하던 박재호씨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셨고 또 광복 후에도 민족사업을 줄곧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공산당 천하에서는 죄가 됩데다. 아버지 때문에 우리 가문은 패가망신을 당한 겁니다.>>   

박수진씨는 아버지의 과거지사에 대해 많이 말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믿기에는 몽롱한 곳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서란을 떠나기 전날 박수진씨는 아버지와 관련된 자료들을 가져왔다. 그 속에는 일본유학기간의 일기, 만년에 쓴 자술(自敍)과 광복전후의 구태현조선족사며, 그 외 여러 가지로 증실할만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밤도와 읽었다. 읽을수록 가슴이 뭉클해왔다. 한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의 형상이 머리 한 가운데 거연히 솟아  올랐다.

 

제1부 암흑의 년대

 

1 학 교 생 활

박재호는 망국 십년만인 1920년 3월 24일 생이며 출생지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 오기동 삼계리(慶北英陽郡首比面五基洞三溪里)이다.

부모님은 계룡산 도읍설(鷄龍山都邑說)에 현혹되어서 삼형제분 모두 가산을 팔아 계룡산으로 이사하였다가 결국 민족독립도 이룩하지 못하고 생계유지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고국을 등지고 낯설고 물선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 그때가 1923년이었다. 몽골 등지를 전전하다가 나중에 길림성 반석현 연통산 화소구(吉林省盤石縣烟筒山火燒溝)에 정착하였다. 이 마을은 모두가 한족(漢族)이고 조선인으로는 그들뿐이었다. 말하자면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서 그들 일가는 백장청(栢長靑) 지주의 토지를 소작 맡아 한전을 수전(水田)으로 개답(開沓)했다. 형제 중 부모님의 일손을 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큰아들(在榮 19세)뿐이었다.

그 마을 부근 서대지(西大地)와 쌍묘자(雙廟子)에 한국인 애국지사들이 설립한 민족소학교가 있었다. 그는 둘째형 재유(在裕)와 함께 을반(乙班)에서 공부하였다. 바로 그때부터 그는 단군(檀君) 국조(國祖)를 알았고 태극기도 보았고 애국가도 배웠다. 여기에서 그의 민족의식이 싹 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10세 미만의 일이니 다만 개념이지 기타 구체정황은 잘 알지 못했다. 그때 독립운동가들이 집에도 다니었으며 백형(伯兄)도 총을 차고 다니었다.

일본제국주의한테는 중국 땅에서 자라고 있는 반일세력은 눈에 든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묘한 민족이간책으로 중국 동북군벌의 눈에 조선인들로 하여금 저들의 앞잡이로 비치게끔 만들었다. 봉계군벌(奉溪軍閥)의 입장에서 보면 동북과 몽골지대로 조선인들이 이주하는 것은 달가울 수가 없었다. 일단 조선인과 중국인간에 민족분쟁이 일어나면 영사재판권문제와 연결될 것이며 조선인들이 반일투쟁을 할 경우에는 일본측에서 군사도발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잡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주 조선인은 중국인 옷을 입지 못하며 총기를 휴대하지 못하며 공안국의 허가가 없이는 거주하지 못하며 심지어 1929년 이후에는 조선인 토지경작에 대한 금지령까지 내려졌다.

바로 그러한 때인 1930년 박재호네는 중국인 동네에서 홀로 소작을 짓고 있었으므로 솔가도주(率家逃走)하였다고 한다. 한 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마을을 나와 50리 길을 걸어 연통산(煙筒山)에서 봉천행(奉天行) 기차를 탔다고 하니 어지간히 급박한 사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봉천(奉天: 오늘의 瀋陽)에 이르러 곧장 수용소에 들어갔다고 한다. 여기에서 수용소라고 하면 당시 봉천에 주재한 일본영사관의 <<보호>>를 받는 곳임이 틀림없다.

속담에 병 주고 약을 준다는 말이 있다. 당시로서는 일본제국주의를 두고 하는 비유라고 하겠다. 중국정부의 심사를 건드려 만주에 이주하여 농공상 등 각종 사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의 조국광복활동 자금을 마련하는 조선인들을 박해하는 것으로 독립군의 근거지를 소멸하려는 것이 그들의 소기의 목적이었다. 동시에 수용소를 만들어서 각지에서 도망 온 조선인들을 수용하는 것으로 명줄을 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의 노예로 전락시키려는 수작이었다.

수용소에서 주는 배급이란 겨우 연명할만한 양의 좁쌀과 소금과 무며 감자며 채소등속이 고작이었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날품을 팔고 어린애들은 사탕과 권연장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1931년) 봄 그들 일가는 봉천 서쪽 십리허(十里許)에 있는 중앙교(中央橋)로 이주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수재가 들어 농사를 망치였다. 하늘도 무심했다. 화소구를 떠날 때 알몸뿐이었던 그들은 진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값이 싼 메밀가루를 사서 가지가지 남새며 나물을 섞어서 연명을 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滿洲事變)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9.18사변>>이라고 부른다. 바로 그 날 일본군대는 봉천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북대영을 습격하고 봉천거리를 폭격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본군은 봉천을 점령하였고 그 뒤 불과 두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전 동북을 손아귀에 넣었다. 일본관동군의 공격에 패한 동북에 주둔했던 중국 군은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패전의 분풀이를 하고 그 재산에 대한 약탈로 군비를 보충했다.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찬다는 식으로 일본군에 대한 분풀이를 적수공권의 온순한 조선인한테 했다. 그 불똥이 그들 가족한테도 튀어왔다.

마침 중앙교를 지나가던 중국 군이 재호의 백형 재영씨를 보고 조선인은 왜놈의 앞잡이(二鬼子: 왜놈은 鬼子이고 조선인은 두 번째 鬼子라는 뜻)라고 하면서 불문곡직 가슴에 총을 들이댔다. 당금 방아쇠를 당기려는 아슬아슬한 그 찰나에 마을의 중국인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보증해 나서는 바람에 겨우 목숨을 살릴 수가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가슴에 시한탄을 안은 것처럼 조마조마한 나날을 보내던 그들 일가는 끝내 만선척식회사(滿鮮拓植會社) 소속인 심양현 사령동상보(沈陽縣沙嶺東山堡)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들만 사는 마을이었고 보통학교도 있었다.

재호는 근 2년이나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종형과 그는 3학년에, 여동생 옥희(玉姬)는 1학년에 입학했다. 괴뢰 만주국(滿洲國)이 서고 동북 전체가 일제의 천하가 되었으므로 학교교육도 완전히 일제의 노화교육이었다. 조선어문 한 과목만 제외하고 모든 학과는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일본문 교과서였다. 그러나 선생님들 중에 숭실전문 출신인 김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는 학생들한테 애국 노래들을 배워주었다.

금수강산 동반도는 우리 집이요

백의 민족 2천만은 우리 형제라

우리 강산 아름다운 천하 빛나고

우리 민족 고운 마음 비할 데 없네

백두산의 상상봉은 우리 넋이요

한강수 맑은 물은 우리 마음이라

이 넋 이 마음 변치 말고 항상 일하세

금수강산 삼천리에 웃음 피우세

국조 단군과 태극기와 애국가로 그의 마음 속에 진작 애국애족의 싹이 텄다고 하면 바로 이 노래는 그의 심령 깊이에 한평생 꺼지지 않는 애국애족의 불씨를 심어주었다고 한다.

17살 되던 해 그는 6년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성적도 우수했지만 가정의 생활난으로 말미암아 승학(升學)의 꿈을 접어야 했었다. 다행이 숙부가 학비를 대주어 사촌형 재만(在萬)이와 함께 위만 한족 초중 예비학교(僞滿漢族初中預備校)인 사령보 고이소(沙嶺堡高二小)에서 1년 동안 한어문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글, 일어, 한어를 두루 장악한, 당시로서는 지식인 소리를 들을만한 인재로 성장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