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 "격정시대"의 욕망연구(2)
주체들의 존재양상과 이데올로기의 지형도
본 텍스트는 작가가 주인공을 내세워 많은 사건과 방대한 배경적 지식을 전달함으로써 의미하고자 한 내용을 부각시키는 기본 서사구조의 양식에 부합된다. 특히 주인공의 보고 듣고 행동하는 바에 의하여 주제적 층위에 속하는 상당한 비율의 의미 층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주인공에 대한 인물형상 분석을 진일보 진행해야 함은 분명하다. 하지만 주인공은 항상 어떠한 사건이나 배경의 중심에 서있다는 본 텍스트의 다른 세부적 특징에 근거하여 따로 주인공을 분석하지는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다른 주요 등장인물을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주인공의 많은 특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인공의 특징을 나중에 종합하여도 주인공의 형상을 종합적으로 따져보는데 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본 텍스트는 인물이 수없이 많이 등장하므로 모든 등장인물을 상세히 분석할 수는 없다. 따라서 텍스트가 전달하고자 한, 적어도 텍스트가 의식적으로 전달하고자 한 내용을 충실히 매개하는 인물에 한하여 분석을 진행하기로 한다. 인물이라는 카테고리를 정할 때, 집단적 주체도 포함시킨다. 왜냐하면 조선의용군 전체 장병은 주인공과 동일시 된 인물 군으로서 어떠한 인물로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광복군 역시 한 인물집단으로서 인물분석의 범위에 넣을 수 있다.
텍스트의 최종 주제적 층위 관련 내용과 작가가 의식적으로 강하게 전달하고자 노력한 중심의미 사이에는 엄격히 따지자면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본 연구의 최종 목적은 작가의 전달 내용을 파악하는 동시에 텍스트에 체현된 내용까지도 알아보는데 두었다. 그러므로 인물형상 분석 시 우선 작가의 의도를 알아보고 작가가 의도적으로 전하지 않은 내용까지도, 적어도 작가가 의도적으로 상당한 비중을 들여 전달하지 않은 영역의 내용도 상세히 살펴 볼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세밀하게 전부 알아볼 수는 없고, 최종 주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부분에 한하여 집중 고찰하기로 한다.
본 텍스트에서 주인공이 욕망대상으로 정한 인물이든, 아니면 내적 혹은 외적매개에 속하는 인물이든 그 인물들은 거의가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표방된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텍스트에서 인물들 혹은 집단들이 공개적으로 표방한 이데올로기를 방편적인 근거로 한다면 등장인물 군을 크게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마르크스주의 집단, 둘째, 무정부주의 집단, 셋째, 민족주의 집단, 넷째, 앞의 세 종류에 속하지 않는 기타 중요한 인물들이 그것이다. 기타 중요한 인물들을 다시 하위 세목으로 분류하면,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아도 자타가 공인할만한 불합리를 조성한 인물들, 평범하지만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는 일상적 생활의 인물들 등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각 진영에 속한 인물을 각각 설정하여 살피는 것 보다는, 본 텍스트의 특성에 근거하여 한 장면에서 복합적으로 여러 종류의 인물들이 언급되면 동시에 분석한다. 그래도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추가로 관련 대목을 인용하면서 진일보 속성이 드러날 때까지 따져보는 방식을 취한다. 먼저는 마르크스주의를 공개 혹은 비공개로 표방한 인물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작가가 텍스트 결말부분에서 스토리의 주요인물집단으로 삼은 대상이 바로 “태항산 호가장 전투”를 배경으로 일본군을 섬멸하던 집단적 주체인 조선의용군이다. 조선의용군은 마르크스주의를 이데올로기로 삼은 집단이고 작가에 의해 동일시 된 인물집단이므로 분석의 시발점으로 삼는 것이 적절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중에서도 씨동이는 스토리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등장하다가 결말부분에서 전투 중 사망한, 조선의용군집단에서뿐만 아니라 전반 텍스트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우선 씨동이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⑤ 씨동이가 대번에 “미쳤소. 한 진사 댁엔 왜?...... 난 안가우.”하고 왼고개를 치니 아버지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뭐라구?” 묻고 어머니는 “너 정신이 나가잖았니?”하고 어이없어하였다. (중략) “이 녀석아, 너 지각이 언제나 좀 나겠니? 50원이면 입쌀이 여덟 가야야, 여덟 가마. 일 년 열두 달 쌀밥 구경을 못하구 사는 주제에 또 들어오는 복을 차던져? 에미가 밤낮을 가리잖구 뼈 빠지게 일해서 너희들 뒤치다꺼리하느라구 시집온지 20여 년에 이날 여적 주사니것 한 벌 못 얻어 입어봤다. 에미 불쌍한 생각두 좀못 하느냐.” 어머니가 푸념을 섞어가며 긴 사설을 늘어놓으니, (중략) “엄마가 아무리 불쌍해두 인금이 떨어질 일은 나 못하겠소. 죽는 사람을 구하는데 상금은 다 뭐야, 개 콧구멍같이! 상금이 없었다면 사람이 죽는 걸 눈앞에 보구두 가만히 서 있었겠구먼.” “동이 닿지두 않는 소리 지껄이지 마라, 듣기 싫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편을 들어 아들을 누르려 하니 “동이 닿지 않긴 뭐가 닿지 않아요. 그래 아버지는 내가 그 잘난 돈 50원 바라구 목숨을 건 줄 아시우? 내 목숨이 고작 쌀 몇 가마 값어치밖에 안 간단 말이오? 긴말할 것 없이 나 그런 치사한 상금은 타러 가지 않을 테니 그런 줄 아시우.” 잘라 말하고 씨동이는 훌쩍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1권, 58-59면).
인용문⑤는 대화의 비중이 가장 높게 나타난다. 지금까지 자주 보아왔듯이 작가는 서술을 진행함에 있어서 전략적으로 대화를 가장 빈번하게 적용하면서 “사실”의 현장성과 진실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 합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서술 매개자인 작가가 초점자인 씨동이, 씨동이 아버지, 씨동이 어머니를 각각 포착하여 인용된 독백 위주의 방식으로 씨동이네 가정 기본 상황이 요약, 설명된다. 작가의 이와 같은 서술처리방식은 짧은 면면에 일반 하층 백성의 생활을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적절하고 그러한 기본 환경에서 씨동이의 의지를 확고하게 부각시키는데도 강력한 효과를 발생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작가는 반드시 강조해야 할 대목이면서도 독자적 수용도가 높다고 판단되는 내용일 경우에는 작중 인물을 초점자로 포착하지만 매우 중요도가 높으면서도 최고로 강조할 내용에 대해서는 오히려 작가 자신이 초점자로 된다. 핵사건인 인용문②가 전자에, 조선의용군의 전투장면인 텍스트의 마지막 부분인 핵사건 인용문③이 후자에 속한다. 그러나 인용된 독백은 인용문②, ③, ④, ⑤에 골고루 자주 사용된다. 씨동이의 성격적 특징은 선정된 단어들인 “대번엽, “미쳤소”, “개 콧구멍같이”, “그 잘난”, “치사한” 등을 통해 그의 내면적 심리상태를 큰 번민 없이 독자들이 정확하고 빠른 시간 내에 포착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작가가 씨동이에 대해 직접노출이 강한 자질의 단어들을 배치함으로써 그의 숨김이 없는 기본성격을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전달되는 의미이다. 사건의 전말을 따져본다면 이러하다. 태풍에 의해 조난당하게 된 어부 네 명의 목숨을 구해내는 과정에서 동네 유지인 한진사가 현상금 50원을 걸자 씨동이가 나섰던 것이다. 그 현상금에 대한 수용태도가 위 인용문⑤에서 인용된 독백 위주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위의 고찰로 미루어보아 씨동이의 심성에서 가장 부각 되는 측면은 세 가지다. 첫째는 인간생명에 대한 존중의식이다. 그것은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특정 논리에 근거한 것이기 보다는 기본 윤리의식과 자연발로적인 측면이 강하다. 둘째로는 용맹함이다. 작가는 “홍길동”이나 “임꺽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과 씨동이를 합치시키던 일관성을 지속하면서 독자의 신뢰를 진일보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셋째로는 인간의 기본 품위에 대한 인식이다. 생명을 담보로 한 조난어민 구출이 돈과 직결되는 상황에서 인간적인 기본 자질 자체가 손상 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인격의 소유자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자연발생적인 심성이 사회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 이데올로기 논의 속에서의 발현에 대해서 아울러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정희와 씨동이 사이에 있었던 대화 위주의 대목에서 진일보 씨동이를 파악할 수 있는 동시에 텍스트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본격 등장하는 첫 주요인물인 한정희를 알아나갈 수 있다.
⑥ “목적이란 게 뭐 별거 있겠소. 돈을 벌어서 부모처자 다 함께 배불리 먹구 잘사는 게 목적이라면 목적이겠지...... 난 달리는 더 모르겠소.” 이 대답을 듣고 한정희가 두 손을 뒤로 짚고 천장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하하 웃으니 씨동이는 열적어서 머리를 긁죽긁죽하였다. (중략) 씨동이는 잠자코 한정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정희의 얼굴이 차차 엄숙하게 변하며 열기 있는 눈이 샛별같이 빛났다. (중략) “인간다운 인간이 사는 목적은...... 이 세상에서 압박과 착취를 없애구...... 사람들이 서루 도우며 다 같이 잘살게 하기 위해 분투하는데 있다. 동족의 고난에 외면을 하구 적만을 돌보는 그런 것들은...... 인간 축에 못 들어. 그런 것들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개짐승이야.” 씨동이는 몸 속의 활시위가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중략) 씨동이의 눈에 한정희가 갑자기 거인으로 보였다. 더욱더 우러러 보였다. 한정희가 시키는 일이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해낼 마음이 생겼다(1권, 5장, 116-117면).
인용문⑥에서는 체험보다는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논의가 화자 한정희를 통해 이루어진다. 특정된 문제에서 한정희는 전달자로, 씨동이는 수용자로 설정되었고, 정보가 과잉으로 흐른다. 화자 한정희가 “두 손을 뒤로 짚고 천장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하하 웃”는 태도에서 문제 사항에 대한 절대적인 해답을 이미 확보하였다는 자족감과 자신감이 유표하게 묻어난다. 그리고 “얼굴이 차차 엄숙하게 변하며 열기 있는 눈이 샛별같이 빛났다”. 이와 같이 작가는 초점자 한정희를 포착 시 그의 내면에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간결하고도 섬세한 행위 및 외모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화자의 발화 자체에 대해 일단 신뢰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데 효과적이다. 특히 “엄숙하게”, “샛별같이” 등과 같은 어휘로 체현된 진지한 분위기와 맑은 심성을 암시한 표현방식은 중대한 문제를 논의함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해답을 제시할 것이라는 독자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작가와 발화자 한정희 사이의 인지적, 심리적 거리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난다. 청자인 씨동이가 “열적어서 머리를 긁적긁적하고” “잠자코 한정희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보면 작가가 발화자와 청자 양자로부터 거의 비슷한 거리를 두고 이 두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즉 작가와 화자, 청자 3자 사이의 거리는 균일하다. 이런 가까운 거리는 작가가 화자와 청자 모두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해준다. 더욱이 주인공이 존경하는 “씨동이”에 대해 독자의 신뢰감이 대체적으로 형성되었으므로 한정희에 대한 신뢰 역시 확보되기 어렵지 않는 전반 분위기이다.
이어서 화자를 거쳐 “압박”, “착취” 등등과 “혁명”이란 용어 대신 “착취를 없애구”라는 이어진 두 단어가 연속되다가 “사람들이 서루 도우며 다 같이 잘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 “목적”이 밝혀진다. “압박”과 “착취”와 같은 용어는 다른 긴 설명이 없이도 쉽게 수긍이 갈만하지만 “착취를 없애구”를 논의의 중심에 세워둘 경우에는 “착취를 없애는 방식”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 밖에 없다. 더욱이 그것이 “이 세상에서”라는 광대무변한 범주로까지 무한 확장되면 그 “착취를 없애구”의 방식이 궁금할 수 밖에 없다.
이로 말미암아 서로 대립되는 의미항이 생겨나는데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없다. 즉 <서로 도우며 - 착취를 없애구> 사이의 적절한 조화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해답은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 못한다. 이것은 다시 용어를 바꿔서 표기하면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적용되는 <수용 - 배척>의 대립항으로 나타낼 수 있다. 충족된 해답이 미처 제시되지 못하였기에 부분적으로 설교적 발화가 되고 작가가 발화자를 통한 인용된 독백은 중개 과정에서 다른 메시지를 산출해낼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곧 이어 그 발화에 대한 청자인 씨동이의 반응이 정직한 표현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곧 화자가 “거인으로 보”여 “한정희가 시키는 일이라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해낼 마음이 생겼다”는 대목이다. 이 과정에서 한정희의 발화는 청자인 씨동이에게 오히려 발화내용 자체보다는 발화자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를 유발한다. 이것은 발화된 내용으로 말미암은 의미망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그 무엇이다. 따라 두 종류의 상호 완전히 일치하지만은 않는 의미축이 동시에 생성된다. 청자인 씨동이는 화자의 지적인, 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존중으로 말미암아 그 발화내용 역시 정확할 것이라고 믿는 태도를 나타낸다. 이 점은 독자가 쉽게 추측해낼 수 있다. 작가가 의도한 바가 전달이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장에서 이와 같이 일부의 변형이 일어난다.
작가적 권위는 발화자 한정희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의도한 바를 신뢰감이 높게 전달하지 못하므로 상당한 외적 손상을 입으면서 어느 정도 실추될 소지를 내재하고 있지만 뒤이은 표현의 정직성으로 인해 다시 일정부분 극복되는 전 과정이 면면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청자는 감정이입을 통한 전 이해에 머무는 의미수용의 수준을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정희의 발화는 “이 세상” “다 같이”라는 막연하고 광대한 범주로 무한 확대되다가 곧이어 보다 구체적으로 “동족의 고난에 외면을 하구 적만을 돌보는” 범주로 축소된다. 즉 “이 세상 다 같이”라는 대 전제에서 “동족”이라는 구체화된 범주로 수축되는 경향성을 감지할 수는 있다. “동족의 고난에 외면만 하고 적만은 돌보는” 합리한 해석이 잇따르기에 대략 그 “적”이 “일제”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꼭 일제만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 모든 적들을 지칭하는 것인지 뜻이 분명하게 알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씨동이가 “거인”처럼 바라보는 존중의식 자체에 대한 긍정만은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다. 따라서 씨동이의 인과적 행위연속은 상술한 발화내용이 제시하는 쪽으로 텍스트 내에서 전개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작가가 청자인 씨동이를 포착할 경우에는 작가가 초점자로 되었다가 씨동이가 초점자로 변화하기도 한다. “머리를 긁적긁적”하기까지는 전자에 속하지만 “눈에 한정희가 갑자기 거인으로 보였다. 더욱더 우러러 보였다. 한정희가 시키는 일이면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해낼 마음이 생겼다”라는 표현 전부가 후자에 속한다.
위 인용문에서 보다 친근감을 주는 “씨동이”를 내세움으로써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이데올로기적 발화를 독자에게 수용시키기 위해 활용된 이런 서술 전략은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할 경우에 씨동이가 향후 나타낼 행위에 대해 대체적인 공감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씨동이 자신의 내적 의지와 긴밀히 연동된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를 검증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독자적 반응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위 인용문⑥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씨동이의 인간됨은 진일보 드러난다. 먼저는 존경하는 인간을 모방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행위 우선의 주체로 설정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주인공인 서선장을 인간적으로 신뢰할만한 인물로 내세우는 것과 동일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씨동이가 이데올로기적인 내용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면, 우선은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만 일단 먼저 긍정하고 그것을 확장시켜 자신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인간 자체에 대한 존중으로 확장시키는 경향이 있다. 즉 이데올로기보다는 스스로 설정한 판단기준에서의 인간존중이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씨동이의 인물형상에 대한 합리성을 도모함에 있어서 작가적 서술 권위는 큰 무리가 없이 확보된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가나 씨동이 모두에게 일정한 검열을 진행하고자 하는 욕망도 동시에 생성된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화자 한정희가 전면에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에서의 여러 개념적인 부분에서는 그러하다. 가장 중요하게는 독자가 “이 세상” “다 같이”라는 막연하고 광대한 범주를 씨동이가 과연 그러한 의미로 수용하겠는가는 검증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해답을 씨동이의 스토리 후반 일본군 섬멸 과정에서의 형상에서는 더 찾아볼 수가 없다. 본 텍스트에서 총체적으로 인간 씨동이에 대한 인물창조는 상대적으로 성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정희의 인물형상을 보면, 간결한 행위묘사와 외모묘사는 성공적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발화 자체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보장하지는 못한다. 즉 작가가 한정희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인용된 독백은 완전한 설득력을 보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것은 곧 작가가 의도했던 전달정보가 일정 부분 독자의 검증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의 가장 큰 문제의식은 <배척 : 수용>의 최종 근거를 어떻게 확보하는가에 있다. 이 논리가 최상급으로 비약하면 곧 <적 : 아>의 대립항으로 진화하기에 신중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적”이 최소한 “일제”를 지칭하는 것만은 분명하고, 미해결의 문제를 아울러 따져본다면 곧 전 세계의 “적”을 포함하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만약 그렇게 포함의 의미를 가진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지시체를 향하는가는 지속적으로 천착하여야 할 것이다. 발화된 용어 중 “착취”와 “압박”이라는 이데올로기어가 다수 등장하는 것을 보아서는 그것이 “계급성”에 근거한 기준일 것이라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등장인물 한정희가 원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의 주요 책임자인 일면을 따져서 진일보 검증해보면 그것은 곧 “계급성”에 근거한 적아쌍방 검증기준이 확실하다고 판단된다(1권, 16장, 226-245면). 그러나 흥미 있는 것은 전반 텍스트에서 “계급성”이라는 단어와 “혁명”이라는 단어가 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용문⑥과 상응한 추가 내용에 근거하여 발화자 한정희의 기본 이데올로기를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에 근거한 인간집단의 분류”로 잠정 결정하고자 한다.
주인공 서선장에게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한 등장인물은 성재수이다. 성재수의 인물형상에 대한 고찰은 특히 주인공의 내적인 의지를 읽어내는데 중요하다. 이 대목에서는 무정부주의 성향의 이춘근과 김혜숙도 언급이 되는데 각각 알아보기로 한다.
⑦ “인력거값이 껑충...... 곱절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럴 테지요.” “이번 파업은 그들네 노조에서 조직한 거겟지요?” “물론. 그렇지만 핵심적 지도 역량은 공산당이겠지요...... 중국공산당.” “헤 그렇습니까 그래요?” “공산주의자들은 민중을 발동하는 것을 주요한 투쟁 수단으루 삼으니까요.” 선장이는 입에다 무슨 잘 깨물어지지 않는 덩어리를 문 것처럼 입술만 우물거리고 말을 아니 하였다. 민중을 발동한다는 말이 마치 먼 화성에서 보내온 전문과도 같이 불가해하여서였다. “그에 반해서 민족주의자들은 개인 테러를 숭상하니까...... 이것이 분기점일밖에요. 현재 우리 조직 내에서두 이런 두 갈래 서루 다른 주장이 맞서구 있습니다.” (중략) 선장이는 눈도 깜박 안 하고 성재수의 입만 바라보았다. “개인 테러루 일본놈 몇 놈 소멸한다구 해서 그놈들의 지정이 흔들리지는 않을 겝니다.” (중략) “그렇다면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부정하신단 말입니까?” 선장이 입에서 말이 부프게 나오니 성재수는 한동안 말이 없이 선장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결 부드럽게 “그런 뜻이 아닙니다.”하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중략) 원산 있는 매부 한정희를 방불케 하는 성재수의 청수한 얼굴과 심오한 철리를 간직한 듯싶은 넓은 이마가 새삼스레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자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온 가슴을 차지하였다. 이춘근과 김혜숙에게서 받은 강렬한 인상이 무색해지리만큼 보다 강렬한 것을 선장이는 성재수에게서 느꼈다. 선장이가 포석 거리로 다 읽은 책들을 돌려주러 갔을 때 두 사람은 의미가 특별한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동지적인 감정이 북받쳐오르는 것을 느꼈다. 성재수는 선장이의 몽매를 깨우쳐준 계몽 스승이었다. “그럼 이번엔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지요.” 성재수가 꺼내다 주는 책은 국가와 혁명이었다. (중략) 프랑스 내전, 철학의 빈곤, 가정, 사유제와 국가의 기원...... 이런 책들을 읽어나가는 동안에 선장이는 크게 변하고 또 성장하였다(2권, 40장, 259-262면).
위의 인용문⑦에서 작가는 우선 주인공을 초점자로 확고하게 포착한다. 텍스트에서 등장인물에 대하여 두드러지게 우세한 인물 구성의 유형을 확정짓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될 수가 있다. 동일한 환경 속에 어느 정도 변별되는 두 사람 혹은 두 종류 인물이 제시되어 있을 그들의 행동 사이의 유사성이나 대조는 양편 모두의 특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등장인물의 종류, 그 작품의 주제적 관심사, 그리고 작가의 기호, 그 시대의 문학적 규범 등과 관계 지으면서 인물 사이의 유비를 진행하는 것으로 이 작업을 구체화될 수 있다. 더욱이 그것이 동종의 심리적 친화성 범주 내의 것이라면, 인물 사이의 미세한 차이가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주인공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난 심리적 활동을 인식 가능한 수위로 강하게 끌어올린다. “이춘근과 김혜숙”도 “강렬”하지만, 더욱 “강렬”한 인상을 “선장이는 성재수에게서 느꼈다”고 한다.
<이춘근과 김해숙 - 성재수>가 유비의 대상으로 구체화되고 같은 성질의 “강렬”함이기는 하지만 전자는 후자에 의해 “무색”해지게 될 만큼 양자사이의 차이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하다고 강조된다. “특별한”, “굳은”, “동지적인” 등등의 어휘소가 동원되고 행위와 심리가 교차·반복되면서 “성재수”의 특별함이 전경화 된다. 주인공을 초점자로 서술이 이루어지다가 줄을 바꾸어 잇달아 작가를 초점자로 문맥이 이어진다. 주인공을 초점자로 하는 과정에서 그의 “몽매”한 수준이 작가의 음성을 중개로 현저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성재수”가 최상의 심급에 자리매김이 된다.
이 과정에서 “계몽 스승”인 “성재수”의 권위가 부각되고 독자로 하여금 거부감 없이 수용하도록 만든다. “국가와 혁명” 등으로 기표화 된 저서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성재수”와 연동된 의미를 용이하게 산출하면서 그 저서들에 표상된 의미가 서선장으로 하여금 “크게 변하고 또 성장”하게끔 추동하였다고 다소 추상적이고 개괄적인 서술도 이루어진다. 이 경우 일부 정보 누락 혹은 부재가 오히려 더욱 높은 신뢰성을 획득하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 저서 내용에 대한 작가의 의도적인 누락이 그러한 저서 내용을 알고 싶어 하는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동시에 설교적 자세로 나타나지 않고 간접적 제시의 수준에서 그치기 때문이다. 전반 문맥을 보아 <서선장 - 이춘근, 김혜숙 - 성재수 - 저서>로 점진 추동되는 의미망이 구축되고 주인공에 대한 독자의 신뢰가 저서에 대한 신뢰로까지 확장되도록 텍스트의 내용이 면밀하게 표현의 층위에서 선택적으로 배열되고 있다.
성재수가 이토록 “강렬”하게 부각되고 주인공이 “몽매”의 수준으로 비하된 직접적 원인은 사실 아주 간단하다. 집단적 무장투쟁의 노선 견지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윤봉길”과 “성재수” 또한 유비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주인공 서선장이 그토록 강렬한 충격을 받았던 “윤봉길” 이상의 무장투쟁 방식을 알 수 있도록 한 장본인이 바로 성재수로 된다. 이 경우 욕망의 주체 서선장의 욕망구조는 구조(7) <서선장(주체) - 윤봉길, 한정희(내적매개) - 이춘근, 김혜숙(외적매개) - 성재수(대상)>으로 도식화된다. 결국은 위의 욕망구조를 형성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양자 사이에 있었던, “그렇다면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부정하신단 말입니까?”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은 민중을 발동하는 것을 주요한 투쟁 수단으루 삼으니까요”의 해답이다. 이와 같은 해답이 주인공의 이데올로기와 투쟁방식을 새로 확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로 된다. 물론 주인공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접근은 인용문⑥에서 분석됐던 한정희에서부터 출발한 것이지만 구체적인 최종 투쟁의 방법으로까지 이르게 한데는 성재수라는 등장인물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작가가 형상화시킨 인물 성재수는 상대적으로 평면적이다. 주인공의 눈에 비친 “청수한 얼굴과 심오한 철리를 간직한 듯싶은 넓은 이마갚 인간 성재수를 느끼게 할 만한 형상화 서술일 뿐이다. 거기에다가 주인공의 느낌을 빌려 작가가 투영시킨 주관적 논조인 “심오한 철리를 간직한 듯싶은” 등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구체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않아 상당히 추상화된 형상이다. 그러나 형상화 있어서의 간략한 처리임에도 불구하고 주로는 주인공 입장에서 수용할만한 행위를 제시한 것이 성재수가 일으킨 역할이다. 이 경우 전달된 내용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성재수의 텍스트 내적 지위는 높게 평가할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민족주의자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테러”와 공산주의자가 즐겨 사용한다는 “민중발동 및 집단화된 무장투쟁” 사이의 차이이다. 이것은 어떤 목표를 욕망할 때 사용하는 방식의 차이이다. 상황에 따라서 그것이 그 방법을 사용하는 집단까지도 수용,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그러한 집단에 동참할 수 있게 해주기에 아주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등장인물 성재수는 텍스트에 자주 등장하지도, 서술된 분량이 많지도 않지만 주인공의 행로를 바꾸어놓은 장본인이다.
주인공이 작가와 거의 일치한 심리적,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보이는 현상을 이미 위의 많은 크고 작은 분석에서 보아왔으므로 지금부터는 작가적 태도가 주인공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견해를 전반 텍스트로까지 확장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또한 시점이론을 비롯한 여러 분석기법을 지금까지 취급했던 인용문에서 여러 번 적용하여 왔으므로 텍스트의 문학적 자질 및 문예학적 특성에 관한 언급도 필요한 정도에 그치면서 아래에서는 주로 주제적 층위를 고구하기 위한 의미론적인 측면을 강조하고자 한다. 욕망의 삼원구조 역시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적용하기로 하고 보다 많은 논의를 의미 확인 쪽으로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작가 내지는 주인공이 텍스트의 결말부분에서 보여준 조선의용군에 대한 깊은 애정이 중국공산당 치하의 태항산에서 있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인용문⑦에서의 등장인물-성재수를 분석하는 가운데서 독자의 입장에서도 이미 충분히 짐작 가능한 사항으로 된다. 주인공이 최종 이데올로기로 마르크스주의를 선택하고, 그 선택의 이유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답안을 제시하고자 한 전반 과정에서 작가가 가장 무게감이 있게 텍스트에 등장시킨 인물은 중국 공산당 팔로군 장군 팽덕회이다. 팽덕회의 몸에서 체현된 여러 가지 특징으로 말미암아 주인공이 마르크스주의에로의 최종 확신이 있게 된다. 이것을 아래의 인용문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⑧ 10여 일 후, 어느 맑게 갠 날 오전이다. 팔로군 총사령부 소재지인 태항산중의 동욕 거리 자그마한 광장에서는 심상찮은 집회가 열렸다. ‘조선 동지 환영 대회’ 대회에 참가한 것은 총사령구 직속의 각 기관 일꾼들 외에도 일본인, 월남인, 필리핀인 등이 있어서 마치 무슨 국제적 성질의 대회와도 같았다. 그렇지만 그 집회를 가진 목적은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봉쇄선을 돌파하고 해방구로 들어온 조선의용대를 환영하기 위한 것이다. 대회에서 환영사를 한 것은 팽덕회 동지였다. (중략) 의용대에서는 팽덕회 동지를 초청하여 강연을 듣기로 하였다. (중략) 팽 장군은 말을 타고 왔는데 뒤에 딸린 것은 단 한 명의 경위원뿐이었다. 선장이는 그토록 단출한 행차를 눈앞에 보자 가슴속에 경앙하는 마음이 들물처럼 벅차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도자급 인물의 위신이란 틀을 차려서 세워지는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반비례한다.’ (중략) 팽 장군은 제기된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이한 끝에 이런 우스갯소리까지 하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내 등이 이렇게 굽은 것을 보구 아마 속으루들 웃을겁니다-사령이란 게 어째 저 모양이야!......” 사람들 속에서 집이 금시 떠나갈 듯한 폭소가 터졌다. “우리 집은 살림이 구차해서 나는 여남은 살 적부터 힘든 일을 해야 했습니다. 밤낮 무거운 짐을 지구 메구 하다나니 사람이 어디 자랄 새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결국은 이 모양이 된 겁니다......” 선장이는 가슴속에 다시 한 번 경앙의 난류가 벅차는 것을 느꼈다(3권, 59장, 256-262면).
의용군의 각 지대는 정도에 오르기 전에 들고 나갈 깃발 문제로 한바탕 곡절을 겪었다. 혈기방장한 젊은 축들이 마치와 낫을 수놓은 붉은 기를 들고 나갈 것을 강경히 주장해 나섰기 때문이다. (중략) “팽 장군의 의견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가 망하기 전에 쓰던 깃발이 무슨 깃발이었는가구 물어서 태극기였다구 우리가 말씀했더니...... 그럼 지금두 그 깃발을 써야지요. 그래야 호소력이 있을게 아닙니까. 조국을 광복하자면 민중이 익히 아는, 전 민족이 익히 아는, 민족 독립의 상징으루 될 만한 깃발을 내세워야 할 게 아닙니까? (중략) 태극기를 높이 쳐들두룩 하십시오.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나중에 할 일이구 우선 나라의 독립부터 쟁취해놓구 봐야잖겠습니까. 이렇게 말씀하며 팽 장군은 답답한 듯이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십디다. 그러니 동무들두 머리를 좀 식혀가지구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조선의용군의 각 지대가 태극기를 높이 추켜들고 ”조선 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치며 싸움터로 달려나간 이면에는 이와 같은 곡절이 있었다(3권, 61장, 307-308면).
인용문⑧에서는 주인공이 팽덕회로 표상된 중국공산당 내지는 팔로군에 대한 인상을 직접적인 체험으로 그리고 있다. 여기에는 단순히 팽덕회 장군에 대한 존경심이나 감정적 차원의 것 이상의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에서 표방하는 몇 가지 중요한 개념들이 잘 체현된 것으로 판단하는 주인공의 체험이었기 때문인데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 “‘‘조선 동지 환영 대회’ 대회에 참가한 것은 총사령구 직속의 각 기관 일꾼들 외에도 일본인, 월남인, 필리핀인 등이 있어서 마치 무슨 국제적 성질의 대회와도 같았다”는 서술에서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는 다 한편이라는 것을 실물 교육을 통하여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1권, 16장, 244면)는 주인공의 감수를 확인시켜주는 듯한 직접체험이 그것이다. 둘째로, ‘지도자급 인물의 위신이란 틀을 차려서 세워지는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반비례한다’는 주인공의 내적 심리활동 및 판단을 공산당의 지도자급 인물들의 실질적 생활모습을 근거로 확보하고 있다. 셋째로, “우리 집은 살림이 구차해서 나는 여남은 살 적부터 힘든 일을 해야 했”다는 팽덕회의 발화에서 “프롤레타리아” 경력이 있는 지도자 혹은 그러한 집단이 수립한 정권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있게 된다. 넷째로, 팽덕회의 발화를 통해 작가의 중요한 주장이 드러난다. 비록 그것이 간접전달의 형식이지만 민족정권 수립의 당위성에 대한 우선순위를 작가도 간접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가 판단하고 확신할 수 있다. “태극기를 높이 쳐들두룩 하십시오.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나중에 할 일이구 우선 나라의 독립부터 쟁취해놓구 봐야잖겠습니까. 이렇게 말씀하며 팽 장군은 답답한 듯이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십디다. 그러니 동무들두 머리를 좀 식혀가지구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조선의용군의 각 지대가 태극기를 높이 추켜들고 ‘조선 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치며 싸움터로 달려나간 이면에는 이와 같은 곡절이 있었다”는 서술이 그것이다. 즉 조선반도 내 자민족 정권수립 우선이라는 명제를 상대적으로 명확히 내세울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 것으로 된다.
진일보 설명하자면, 이것은 <전세계 프롤레타리아 연합 : 민족국가를 우선 수립> 사이 논리적 갈등과 이론적 해답이 어려운 난제의 해결을 도모함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강력한 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된다. 마르크스주의 논리 내부의 난제에 대한 현실적 해결방법을 팽덕회를 통해 간접적인 근거로 내세우면, 인용문⑥에서 등장인물 한정희가 내세웠던 논리의 혼란스러운 점인 <우리 서로 도우며 : 착취를 없애구>라는 양가적 대립항의 불협화음을 일정부분 보완하는 것으로 된다.
그러나 부언하자면 이것이 주인공의 사고체계 내에서의 진정한 논리적 해결이었던 것은 아니다. 작가가 일반적 정상 순서로 텍스트를 축조하는 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먼저 쓰고 나중에 조선의용군 체험을 쓰는 수순으로 가게 된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연합 : 민족국가를 우선 수립>의 이슈가 팽덕회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도 해결되지 못했던 이론적 난제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후 수 십 년이 지난 시점(時點)에서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작가적 음성의 개입으로 원산 부두 노동자 대파업 시의 장면 중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개념을 삽입하고는 있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가가 이 난제를 이론적 측면에서 해결하지 못하였다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민족국가 우선 수립>이라는 명제는 지금까지의 논의로는 명쾌한 해석이 가능한 문제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난다. 그러므로 작가의 음성임에 분명한,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는 다 한편이라는 것을 실물 교육을 통하여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는 주장을 단순한 액면 그대로 접수할 수는 없다. 이것은 2장 1절에서 동요할 수 없이 판명한 주제적 층위의 대들보로서의 초보적인 결론인, <확고한 정권수립 의지 및 일제 섬멸을 통한 행동에로의 실천>이 지니는 지위를 긍정하는 이상 반드시 해석해야 할 과제로 떠오른다. 그러나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나중에 할 일이구 우선 나라의 독립부터 쟁취해놓구 봐야잖겠습니까”에서 충분히 그 의미를 인지할 수 있는 <우선 : 차후>의 길항하는 의미항은 전략적 과정적 적용수단으로 가능할지는 몰라도 이론적으로는 지금까지의 지속적인 분석에서도 해결이 되지 않은 과제이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 조선민족>의 구별되는 의미항은 정권수립을 위한 토대의 문제이다. 즉 정권수립을 위한 구성주체들의 집합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문제이다. 이 경우, 민족전반 구성원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전세계 프롤레타리아 집합이라는 범주로 할 것인지가 문제의 핵심이다. 만약 이 두 의미항이 최고의 심급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문제라면 단계적 궤도를 구상할 수 있다. 먼저는 프롤레타리아에 속하면서도 민족적 성격의 구성원들로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최저의 목표로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민족 내부 범주에서 계급 준거에 의해 달리 분류된 집합성원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이민족 구성원들의 “연합”과는 어떤 상관관계를 형성하는지 하는 문제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몇 단계를 지나면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해진다.
여기까지 분석이 진척되고 나면, 상술한 여러 중대한 문제에 대해 주인공이 확실한 준거를 제시하지 못하여 일어난 사유체계 내에서의 강한 충돌과 혼란이 분명 있다는 것이 충분히 감지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기표가 정확하게 지칭하는 기의가 무엇인가 하는 또 다른 문제로 옮겨가는 단계로 진입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세계-내-존재>이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대면하는 모든 대상은 그것이 물질적 대상이든 혹은 의식 내 추상적 존재이든 모두 인간에게 도구로서 의미를 갖는다. 즉 <세계-내-존재>는 인간을 포함해서 도구연관이라는 의미체계(the meaningful system)의 장(field) 속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그 연관구조가 달라질 때 지칭하는 대상으로서의 존재는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렇게 된다면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가 주인공의 <세계-내-존재>에서 지칭하는 대상에 대해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의 실존적 삶의 도구연관구조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할 때, 문자적 동일성이 의미론적 콘텍스트(context)의 동일성을 억압하는 현상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를 먼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억압현상이 있다면 표면적인 의미를 극복함으로써 그 “프롤레타리아”라는 기표의 참뜻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임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진일보 살펴보기 위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운 민족진영을 주인공 및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어떤 보편적 태도로 대하는가를 따져볼 수 있다.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대하는 조선의용군의 견해를 정확히 파악하여야만 계급적인 구분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연합”이라는 실체의 의미에 진일보 다가설 수 있다고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요약(9) 중 주인공과 집단적 주체인 조선의용군이 광복군 진영을 방문한 자리에서 태극기 게양을 바라보며 갈등하던 욕망을 따져봄으로써 문제해결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⑨ 서안역에 내린 것은 12월 31일 오후 2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한국 광복군의 서안 지대 본부는 역에서 걸어서 한 20분 걸리는데 어마한 삼문 앞에 권총을 찬 광복군의 위병이 서 있었다. 삼문 바로 안에 서 있는 깃대에는 태극기가 달려서 삭풍에 펄럭이고 있었다. 선장이의 가슴속에서는 케케묵은 대한제국의 국기-태극기를 너절하게 보는 마음과 민족 독립의 상징으로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태극기에 끌리는 마음이 서로 뒤얽혀서 용틀임을 쳤다. 참으로 야릇한 심정이었다. 이런 모순된 감정에 사로잡힌 것은 선장이 하나만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누구나 다 그러하였다. (중략) 아침에 눈을 뜨니 1941년-새해였다. (중략) 떠들썩 지껄이며 일어나 찬물로 세수들을 하기가 바쁘게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국기 게양!”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인 광복군과 손님인 의용대가 다 같이 정렬하여 거수경례를 하고 주시하는 가운데 태극기가 아침 하늘에 서서히 떠올랐다. 다음 순서는 <애국가>의 제창인데 선장이는 그 <애국가>를 같이 부르면서 이름 못 할 감격에 휘감겼다. <인터내서널>을 부를 때와는 다른-야릇한 감격이었다(3권, 58장, 232-234면).
인용문⑨에서는 “태극기”와 “애국갚에 표상된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케케묵은 대한제국의 국기-태극기를 너절하게 보는 마음과 민족 독립의 상징으로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태극기에 끌리는 마음이 서로 뒤얽혀서 용틀임을 쳤다”고 한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누구나 다 그러하였다”고 의미는 집단으로까지 확장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유비의 대상을 도출할 수 있다. <대한제국의 국기-태극기 : 민족 독립의 상징>의 유비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정보를 전달한다. 민족독립은 곧 정부기구가 이미 존재함을 가정하고 출발한 사고구상이므로 정부기구 구축은 당연한 목표이다. 민족독립에서의 독립이란 자체가 바로 정권에 대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조선의용군 전부가 정부기구 자체는 처절하게 욕망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기구의 이데올로기적 속성에 관한 것이다. 주인공은 “태극기”를 “대한제국”의 “국기”라고 한다. “대한”을 “제국”의 속성을 갖는 어떤 실체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한”이 “제국”의 속성을 어떻게 갖는가를 먼저 상세하게 고려하지 않더라도 전통과 문화의 연속체로서 역사의 지속적인 흐름 속에서 형성된 어떤 속성의 그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지적할 수가 있다. 그리고 정부속성을 따질 때 그 어떤 이데올로기가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기 전에 그것이 조선민족 혹은 프롤레타리아 속성의 이민족도 포함된 현실적 기반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즉 그 현실적 기반인 물적·문화적 토대가 분명히 선행해야 정부기구라는 상부구조 역시 상정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 정부기구는 그 어떤 속성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생존권을 위한 최소한의 요구라는 것도 분명히 인지할 수 있는 사항이다.
그 다음으로 주인공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이데올로기적 기본 성향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연합 : 자민족> 의미 쌍 역시 유비의 대상으로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비에서 자민족 내부를 따져보면 프롤레타리아 성향을 지니지 않는 계급인 자본가계급이 포함되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을 커진다. 이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가장 갈등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독립의 상짹으로 “태극기”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긍정하기 때문에 우선 <자민족 : 이민족>의 의미 쌍을 상정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자민족과 이민족으로 구분할 수 있는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 부르주아> 대립 쌍의 성격도 띠고 있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구분은 “계급”이라는 용어로 설명되는데 그 계급의 구분은 “자본”의 소유 정도, 즉 자산의 정도에 의해 결정되는 그런 속성이 가장 핵심적이다. 그렇다면 논의를 지속시켜 “대한”이 “제국”으로 규정될 수 있는 원인을 “자본을 포함한 자본 외적인 모든 것”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 그것은 역사와 전통과 그것을 지속시킨 물적 토대 및 구성원들 전부에 다름 아니다.
조선의용군 전반 집단이 “민족 독립의 상징으로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태극기”이기에 민족은 어떻게 하든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대신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연합”에만 국한되기에 “이민족의 자산계급”은 그들의 “적”으로 취급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민족”이라는 공동체에 “부르주아”라는 계급이 들어있는 것을 불문하고 다시 민족구분으로 돌아가면 <자민족 : 이민족>의 분류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연합”을 고려하지 않고 “전 세계”만 고려할 경우 이 “전 세계”는 민족을 단위로 하여 구성된 연합체임을 알 수 있다. 민족구분을 적용하면 <자민족 : 이민족>이고 계급구분을 적용하면 <프롤레타리아 : 부르주아>의 양가성을 형성한다. 그러나 전반 이데올로기체계에서 중요한 “혁명”의 수단으로 다른 계급을 전복하는 과정적 단계를 또한 잠시 고려하지 않고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자민족 : 민족 전부로 구성된 전 세계>로 구분 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을 동시에 놓고 비교를 해보면, 서로가 서로를 구분하면서도 다른 요소와 함께 끊임없이 길항하는 성질을 나타낸다. 즉 <생존권 ↔ 정권 ↔ 민족 ↔ 자본 ↔ 전통·문화 ↔ 전 세계>에서 각각의 요소는 그 어느 한 요소가 다른 기타 요소 속에 서로 침투해 들어가면서 강하게 융합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렇게 각각의 요소는 서로가 서로를 자기 충족을 위한 기반으로 의존하면서 강한 융합과 복잡한 구성을 이루어낸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인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태극기”를 보면서 “모순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생존권-정권 : 민족-세계 : 자본-역사·전통>의 6요소 3차원 구조의 6요소가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크게 두 갈래의 흐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민족·생존권·정권·역사전통 : 세계·생존권·정권·자본> 두 집합요소들로 유비 쌍을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인공은 “<애국가>를 같이 부르면서 이름 못 할 감격에 휘감겼다. <인터내서널>을 부를 때와는 다른-야릇한 감격이었다”고 한다. 그 “이름 못 할” “야릇한 감격”은 <민족·생존권·정권·역사전통 : 세계·생존권·정권·자본>의 극심한 복합적 충돌이 의식체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때 “태극기”와 “애국갚는 똑같은 성질의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소들의 유비 쌍에서 공통되는 요소를 제외할 필요가 있다. 생존권과 정권의 요소를 우선 제외하고 다시 살펴보면 주인공과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민족·역사전통 : 세계·자본>의 두 변별되는 그 무엇의 대립적 의식충돌로 말미암아 갈등하는 것으로 판단이 된다. 그런데 <민족-세계>적 요소에 다른 이데올로기적 성분을 넣지 않고 순수한 자연발생적 요인만 생각해보면, 최소 구성단위로서의 <인간>이라는 요소 하나로 통합이 된다. 잠시 이 <인간>을 자연적, 생물학적 수준으로 상정하고 다시 제외를 시키면 주인공을 비롯한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느끼던 모순적 감격을 <역사·전통 : 자본>이란 영역이 유발한 갈등으로 간소화 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용군 대원들은 <역사·전통 : 자본> 두 요소를 욕망의 대상으로 마주하면서 감격하는 동시에 “너절하다”고도 느끼는 것이다.
이런 욕망이 <역사·전통 : 자본>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일어난 것이라면 그 욕망구조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가 각각 정권을 어떻게 욕망하는가를 욕망의 삼원구조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주의는 구조(8)인 <마르크스주의(욕망주체) - 자본(내적매개) - 역사·전통(외적매개) - 정권(욕망대상>로, 민족주의는 구조(9)인 <민족주의(욕망주체) - 역사·전통(내적매개) - 자본(외적매개) - 정권(욕망대상)>로 표기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는 서로 많이 닮아 있다. 작용하는 매개의 속성도 같고 정권 자체를 욕망의 대상으로 하는 것도 모두 같은데 다만 매개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에 의한 구분을 최고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이에 반해 민족주의는 역사·전통을 모든 논의의 출발로 삼는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자인 조선의용군의 모든 대원들이 모두 “야릇한 감격”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가 그 정권을 창출하기 위하여 물적 토대로 간주한 구성원들, 즉 욕망하는 공동체는 그 구성에 있어서 다르다. 이것을 다시 표기해보면 구조(10) <마르크스주의(욕망주체) - 생존권(내적매개) - 자본(외적매개) -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욕망대상)>인 반면 민족주의는 구조(11)인 <민족주의(욕망주체) - 생존권(내적매개) - 역사·전통(외적매개) - 자민족 전부의 구성원(욕망대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나 민족주의 모두 정권을 욕망하면서도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연합”을 제1 원칙으로, 민족주의는 “같은 민족”을 제1 원칙으로 제시한다.
이 대목에 와서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는 극렬하게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일제”를 몰아내고 정권을 수립하려는 목표만은 일치하다. 즉 모두 생존권을 확보하려 하므로 확고하게 항쟁에 나서는 데에는 일치하다. 그러나 외적매개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을, 민족주의는 <역사·전통>을 내세우기에 거의 양립할 수 없는 분기점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결국은 <자본 : 역사·전통>이라는 길항하면서도 대립되는 의미 쌍이라고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모두 생존권과 정권 창출을 욕망하지만, 그것이 모두 <자본 : 역사·전통>에 있어서의 견해 차이로 같고 다른 점을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나타내면서 대립 및 협력을 끊임없이 해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본 텍스트에서는 이러한 협력과 갈등이 조선의용군과 광복군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두 집단 사이의 옮고 그름을 떠나서, 이데올로기가 갖고 있는 그 자체의 속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석이 끝나지는 않는다. 과연 진정으로 텍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들이 스스로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를 진정으로 그렇게 욕망하는가 혹은 그 꼭 그렇지만은 아닌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분석한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데올로기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확인하였고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욕망의 삼원구조로 따져보았다. 각 개인에게서, 혹은 여러 집단에서 정권수립과 그 정권 구성을 위한 구성원을 욕망대상으로 포착할 때 일어나는 협력과 충돌의 가능성 역시 따져보았다.
분석을 모아 논의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텍스트에서 반드시 고구해야 할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가 등장인물들의 형상을 통해 어떻게 전달되었는가를 점검해 보았다.
둘째, 태극기를 대하던 조선의용군의 모순된 느낌을 통해 전반 텍스트를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들을 세 대극 쌍, 즉 <생존권 - 정권>, <민족 - 전 세계>, <자본 : 역사·전통>으로 정리하였다.
셋째, 이데올로기들의 충돌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서로를 필요로 하며,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따져보았다. 그 결과 조선의용군과 광복군 모두가 정권 자체는 강렬하게 욕망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생존권을 핵심으로 한 욕망구조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연합”을 제1 원칙으로, 민족주의가 “자민족 전부의 구성원”을 근간으로 함을 알아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