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 "격정시대"의 욕망연구(1)

욕망의 3원구조와 행동하는 주체

2008-03-26     전유재

  대부분의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소박하게나마 무엇인가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 즉 욕망하는 주체가 있고, 욕망되는 대상이 있다. 그러나 욕망하는 주체의 자의식 속에서 확신한 욕망 자체가 진실에 어느 정도 부합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격정시대』는 제목부터가 강한 욕망의 느낌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 격정은 욕망이라는 용어와 본질적으로는 동류의 것이다. 각 시대는 그 시대의 욕망을 각 주체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정의하도록 복잡한 배경과 판단근거를 제공한다. 그 주체들이 집단을 형성하여 강하게 스스로를 증명할 때 문제는 더욱 복잡하여 진다. 이러할 경우 일반적으로 집단은 권력으로의 의지를 표방하고, 이를 위해 스스로에게 적절한 이데올로기를 부과한다. 이와 같은 점에 비추어보아, 주인공에게 있어서 존경하는 대상이 점차 증가하는 현상에 근거하여 본 텍스트의 전반부를 성공한 성장소설이라고 그 핵심특징을 규정하는 것 보다는 무엇보다도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해답을 찾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전반 텍스트의 표상된 의미를 적절히 규제하면서 통일된 의미망 구축에 기여할만한 핵사건을 찾아 서사구조를 욕망의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해서 서사내용을 다시 일별해보면, 주인공 서선장이 윤봉길 폭탄투척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 상해임시정부를 찾아나서는 대목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식민지 조선반도에서 활동의 시공간을 중국대륙 쪽으로 옮기는 당위성과 실제적 행동이 없었더라면 전반 스토리가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윤봉길 사건을 분석하기 전에, 욕망구조 자체의 작동원리를 알아보기 위해 텍스트의 시작부분을 먼저 따져보도록 한다.

  요약 (1)에서 욕망의 주체인 주인공은 욕망되는 대상으로서의 씨동이에 대한 존경의 이유를 임꺽정이나 홍길동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대목을 구체적으로 인용하여 상세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

  ① 선장이가 가장 우러러보는 인물은 씨동이었다. 여름밤에 시원한 바닷바람을 쏘이느라고 잔교에 모여 앉아 구수한 이야기장을 벌이는 어른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임꺽정, 홍길동이가 바로 양씨동이가 아닌가 싶었다(1권, 2장, 28면).

  인용문①에서 작가는 욕망의 주체, 주인공이 “가장 우러러 보는 인물”, 즉 욕망 대상인 씨동이가 존경스러운 이유를 “어른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그 “임꺽정이나 홍길동이 바로 양씨동이 아닌갚 하고 주인공의 시각으로 표현의 층위에서 밝힌다. 작가는 외적-초점화로 주인공을 포착하여 스토리 외부에서 그의 심리내면으로 침투하면서 말하기를 통해 요약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서술의 권위를 높이는 효과를 유발한다. 주인공이 “임꺽정”이나 “홍길동”과 흡사한 그러한 씨동이를 존경한다는 작가의 음성이 들리는 대목이다. 표상된 의미맥락에 따라 서선장과 씨동이 사이의 욕망관계를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욕망의 주체가 욕망하는 대상인 씨동이를 “어른들”의 권위에 의존하여 판단근거를 확보하는 과정이 첫 번째 요인으로서 이때 “어른들”은 욕망의 주체가 항상 만날 수 있는, 직접체험이 가능한 범주에 있는 사실적 인간이므로 내적매개(internal mediation)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요인으로서, 그 어른들의 이야기 속의 등장하는 “임꺽정”이나 “홍길동” 등 허구적 인물이 간접체험의 판단근거를 욕망의 주체에게 제공해주는 구실을 하는데 이것을 외적매개(external mediation)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요인의 매개를 거쳐 욕망하는 주체는 대상을 욕망한다. 따라서 서선장이 씨동이를 욕망하는 제반 과정은 구조(1)인 <서선장(주체) - 어른들(내적 매개) - 임꺽정‧홍길동(외적 매개) - 씨동이(대상)>로 이루어진 욕망의 삼원구조(triangular desire)를 형성시킨다.

  전반 텍스트의 핵사건으로 작용하는 윤봉길 폭탄투척사건의 전후 문맥을 원문에서 인용하여 욕망의 삼원구조를 점검하면서 핵사건 자체의 의미망 역시 세밀하게 고찰하도록 한다.

  ② 선장이는 받은 충격이 어찌나 크던지 이날 밤 자리에 누워서도 오래도록 전전반측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안중근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을 쏴눕힌 것은 아무리 장쾌하더라도 필경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옛 이야기였다. (중략) 그리고 그 애국용사-조선의 얼-의 나이도 씨동이 또래밖에 더 안 되었었다. 너무나 생생한 사실이었다. ‘그에 대면 나는 하잘것없는 밥병신이로구나!’ 하는 자비심과 ‘그는 지금쯤 적에게 모친 악형을 당하고 있을 텐데...... 나는 여기 이렇게 편안히 누워 있어?’하는 자책감에 등골에 땀이 다 내돋았다. (중략) “상해 프랑스 조계에는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있단다. 그 청사에는 당당히 태극기까지 띄웠단다.” 그러자 선장이의 감은 눈 앞에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높이 띄운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였다(2권, 29장, 89-90면).

  인용문②에서 주인공이 욕망하는 전 과정은 안중근과 윤봉길, 씨동이 등 세 명의 인물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다. 우선 인물을 욕망의 대상으로 설정했을 경우, 이러한 인물들을 욕망하는데 있어서 그 거리에 어느 정도 차이가 난다. “안중근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을 쏴눕힌 것은 아무리 장쾌하더라도 필경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옛 이야기”므로 욕망의 주체와 현실에서의 거리가 가장 멀다. “아무리 장쾌하더라도”, “필경은” 등등 제한적 의미에 그칠 수식어가 “안중근”이라는 의미소적 약호에 부과되어 동기의 당위성과 행위의 정확성을 충분히 긍정한다는 것에 한정된, 따라서 그 이상 영역으로의 비약이 불가능하다는 가치판단의 영역을 생성한다. 현실적 직접체험을 전혀 제공할 수 없는 한계가 “안중근”에 표상된 의미연속체를 구속하고 그로 말미암아 도약의 최종근거로 제시되지 못한다. 욕망주체의 철저한 기준인 현실체험의 비교우위가 양각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획득 가능한 당위에 대한 절대적 긍정과 이것이 체험 불가능한 물리적 시공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 및 자각이었던 것이다. 이 가치항의 최종적 한계는 <간접체험>이라는데 있다.

  거기에 비하면 “그 애국용사-조선의 얼”인 “윤봉길”은 “씨동이 또래밖에 안되었었다. 너무나 생생한 사실이다”고 현실성이 강조되는데 이러한 징후는 욕망의 주체인 주인공이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씨동이와 연결되어 나타난다. 작가는 행위주체인 “윤봉길”을 “그”, “애국용사”로 규정한다. 작가는 주인공의 내면에 투시해 들어가기에 앞서 평가 대상인 “윤봉길”을 미리 상당한 정도로 어떠한 긍정적 가치맥락에서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와 주인공의 판단이 충분히 혼합된, 따라서 작가와 주인공의 의지 사이의 상동관계에서 합치되는 부분과 차이점을 분별하기 매우 어려운 정도로 양자는 강하게 밀착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상해 홍구공원과 서울 종로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지각되며 이러한 지각은 “윤봉길”을 3인칭 “그”로 인지하도록 엄격하게 단속한다. 그리고 진일보하여 욕망의 주체는 “윤봉길”을 “애국”적인 “용사”로 규정한다. 식민시대의 반도 내에 민족의 구성원들이 일치하게 긍정할만한 정권 자체가 부재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애국”이라는 용어가 국가, 즉 정부기구를 미리 전제하고 출발된 이데올로기에 어떻게 하든 귀속되는 그 무엇임이 자명해진다. 즉 “국가"라는 가치영역이 먼저 보장이 되어야 “애국”적인 행위가 아울러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국가"의 부재는 “애국”이나 “매국”이 들어설 기반을 무너뜨린다.

  지시대상으로서의 국가-정부기구가 조선반도 내에 부재한다면 세 가지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는 역사에서 찾는 것이다. 일제에 의해 식민화되기 전에 존재했던 정부체제의 실존성과 상징성을 통합하여 국가를 상정할 수 있다. 이것은 전통 및 역사와 깊은 혈연관계를 유지하게 되고, 추상화된 요인을 상대적으로 많이 내재한 그 무엇이다. 그리고 욕망의 내부조건을 구체화시키는 물질성이 빈약한 접근이다. 그렇기에 전통과의 연속과 단절을 어떤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재정립하는가 하는 것이 이러한 접근에서 가장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실존에서 감지할만한 존재양태로의 접근이다. 망명정부가 이러한 기능을 충족시키는 역할을 한다. 위 인용문에서는 이것이 “상해 프랑스 조계에는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있단다”로 명시된다. 물리적 위치로서의 “중국 상해”내의 영역에서의 “프랑스 조계지” 내부 작은 공간에 “임시정부”가 있는 그런 형태의 망명정부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나라”는 전통적으로 존재했던 민족적 전체 구성원들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 즉 적어도 반도 내 공동체 성원들을 토대로 한 언명인 것이다. 이것은 “윤봉길”에 대한 다른 수식어 “조선의 얼”이라는 표현에서 명확해진다. 즉 “임시정부”를 현실적이고 상징적인 지시대상으로 하든, 아니면 “조선”을 국호로 했던 전통 정부기구를 지칭하든 그것이 기존 민족적 구성원이 주축으로 된 실질적 정부를 구축하기 위한 언표행위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세 번째로, 망명정부와 변별되는 성격의 새로운 정부를 건립하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새로운 정부기구에 대한 욕망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첫째 방법에서 제시된 식민지 이전 정부형태로서의 국가나 두 번째 형태로서의 “임시정부”가 선택 가능한 방안이 된다. 총체적으로, 욕망의 주체는 정부기구 자체에 대해 강한 지향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지향성은 민족적 기반에, 다시 말해 민족을 형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집합체를 현실적, 물질적 토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잠시 유보하고, 이 문제가 적어도 욕망의 주체에게는 국가 우선이냐 아니면 민족 우선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에 기반된 어떠한 형태와 이데올로기의 정부기구를 욕망하느냐의 문제라고 명확하게 범위를 좁혀 재점검하면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윤봉길 폭탄 투척사건”이라 명명된, 텍스트 전반 주제를 좌우할 이러한 핵사건의 시퀀스가 정확하게 작동한다면, 위 인용문에서 민족 우선 혹은 국가 우선의 문제설정 자체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욕망의 주체인 주인공이 “윤봉길”을 그러한 “조선”의 “얼”이라고 지칭하고, 인류 전체의 “얼”이라거나 “중국” 혹은 “일본” 등 기타 국가의 국호를 기표화하여 명명하는 것이 아닌 이상, <민족 : 국가>의 양가적 대립 항은 성립될 수가 없다. 기의가 지칭할 지시체는 이것으로서 명백해진다. 그것은 결국 민족기반의 어떤 정부형태를 욕망하는가로 압축되면서 전반 텍스트를 일정한 문제의식 속에다 규제시키는 강력한 효과를 생성하고 그것에 종속된 의미망과 서사축을 연쇄하는 하위문제로 정리가 되도록 텍스트를 견인한다. 따라서 굳이 대립 항을 설정하라면 그것은 정부기구가 존재함을 미리 상정하는 전제에서 그런 정부기구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들의 문제인 <이데올로기 : 이데올로기> 대립항으로 명료화된다. 만약 그 어떤 특정한 정부형태가 부재한다면 그것을 구축해나가는 제반 과정이 텍스트에서 찾아야 할 답안이라고 할 수 있다. 위 인용문만 보아서는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해답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논증은 “얼”, 혼 혹은 넋, 또는 정신 내지는 상징, 영혼 등등의 다른 용어로도 그 외연이 합치되게 언표화가 가능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살펴보도록 추동한다. 욕망의 주체는 “윤봉길”을 빌어 “조선의 넋”을 욕망하고, 욕망이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도록 탐색해 나갈 것을 정언명령으로 전해주는 욕망대상으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봉길”를 표상하는 다른 한 수식어인 “용사”를 아울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용사"는 곧 “행동하는 투사”의 다른 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욕망의 주체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접근하는데 “용사”라는 의미가 합당하게 적용된다면, 그러한 현실성으로의 행동이 실천적으로 뒷받침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욕망의 주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이게끔 텍스트가 전개되어 나갈 것은 분명하다. 욕망의 주체가 지닌 미덕은 무엇보다도 “너무나 생생한 현실”에 대한 절대적 존중의식과 신뢰감 및 행동으로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최종적으로 욕망의 주체는 “윤봉길”을 “조선의 얼”로 평가할만한 여건이 충족된다고 판단하고 판단 자체의 엄밀성과 신뢰성을 점검하기 위해 “씨동이”를 연동시킴으로서 리얼리티의 강화로 현실연관성의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접근으로 말미암아 현실적 체험과 객관성 유지를 위한 주인공의 의지가 확고하게 구축된다. 상술한 점진과정을 통하여 매개가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현실 쪽으로 점차 가까워지는 특징을 ‘직접체험’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의미체계로 종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외적매개는 이와 상대적으로 변별되는 ‘간접체험’의 영역으로 정리가 된다. 물론 이러한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이런 분류방식에 따라 욕망하는 구조의 층위를 상세히 고구해보면, 욕망하는 대상이 “윤봉길”이고 “안중근”은 외적 매개로, “씨동이”는 내적 매개로 작용한다. 이를 욕망의 삼원구조로 도식화하면 구조(2) <서선장(주체) - 씨동이(내적 매개) - 안중근(외적 매개) - 윤봉길(대상)>로 나타낼 수 있다. 내적 매개와 외적 매개는 차원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부차적인 것으로 나눌 수도, 보다 큰 것으로 통합할 수도 있다. 위 인용문에서 주인공의 보다 큰 욕망의 대상은 “상해임시정부”로 정해진다. 이러한 층위에서 살펴보는 입장이라면, 인물들이 모두 매개로 된다. 이를 다시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서선장(주체) - 씨동이, 윤봉길(내적 매개1, 2) - 안중근(외적 매개) - 상해임시정부(대상)>으로 구조(3)이 명료화된다.

  구조(2)와 구조(3)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변화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첫째로, 욕망되는 대상을 보면 인물에서 사회단체나 조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드러난다. 욕망대상으로서의 “윤봉길”이 점차 “상해임시정부”로의 질적인 도약이 그것이다. 욕망대상은 인물에서부터 다소 추상적인 조직이라는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점진적으로 사회화되는 추세이다. 둘째로, 외적 매개는 간접체험 위주고, 내적 매개는 직접체험이 위주로 된다. 변화추이를 보면, 외적 매개에서 내적 매개로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안중근”에서 “윤봉길”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내적 매개에도 거리가 있는데, 직접체험과 긍정부정에 의한 가치판단을 합쳐 친밀감이 강하고 침투할 수 있는 능력의 강약에 따라 가까운 데서부터 점차 내적 매개1, 내적 매개 2 등등으로 거리의 스펙트럼을 그려볼 수 있다.

  이러한 추세가 보다 보편적인 성향을 확보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구조(1), 구조(2), 구조(3)을 순차적으로 모두 비교하여 진일보 검증해보기로 한다. 욕망되는 대상은 “씨동이”에서 “윤봉길”을 거쳐 “상해임시정부”로 이어지는 궤적을 그린다. 외적 매개만 살펴볼 경우, 허구적 인물에서 현실적 인물인 “임꺽정·홍길동 - 안중근 - 안중근”의 변화를 보이면서 간접체험도 상대적으로 확인 가능한 현실적 범주로 옮겨오는 양상이고, 내적 매개의 경우 “어른들 - 씨동이 - 씨동이와 윤봉길”을 거치면서 직접체험과 긍정이 합쳐져 친밀감이 높은 인물로 구체화되는 특징이 있다. 또한 매개는 자연적 개인에서 사회적 공인으로의 변화가 뚜렷하다. 욕망의 대상도 매개의 검증을 거치고 나서 곧 내적 매개의 영역으로 이동되는 추세 또한 선명하다. 욕망대상 “윤봉길”을 매개가 되는 “씨동이와 안중근”으로 검증하고 곧 내적 매개에 편입시킴과 동시에 “상해임시정부”라는 새로운 욕망대상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자세에서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난다. 그리고 매개는 내적, 외적인 구분을 떠나서 모두 공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나타내는 인물들로 구성된다는 특징이 있다. 핵사건의 욕망구조는 텍스트 전반을 모두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졌기에 욕망의 주인공이 욕망하는 최종 주제가 텍스트의 핵사건을 근거로 하여 정부구축을 위한 <이데올로기 : 이데올로기> 영역의 양가성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밝혀보았다. <민족 : 국가>의 길항하는 의미항이 최상위 문제의식은 전혀 아님을 미리 점검하였고, 그것을 욕망대상에 대한 차원을 달리하면서 욕망의 삼원구조로 도식화 시키는 작업 역시 진행하였다.

  특이한 점은 텍스트의 후반부로 갈수록 조선의용군 장병들에 대한 집단체험을 다루고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작가가 조선의용군 전반에 대해 강한 신뢰감을 보이고 있지 않으면 나타날 수 없는 동일시 효과일 가능성을 우선 상정해볼 수 있다. 작가와 조선의용군 집단과의 심리적, 이데올로기적 거리를 따져 서로 간에 어느 정도로 밀착되어 있는지, 그것이 드러내는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아내기 위해 작가가 내세웠던 욕망의 대상인 주인공이 일반 조선의용군 전사의 일원으로 스토리에 참여하는 특이한 형식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우선 시작해보도록 한다. 왜냐하면 작가가 충분히 이러한 서사 축조형식을 용인하지 않는 입장이라면, 서사체는 전반부(1-30장)에서 조금 더 기술되다가 핵사건에 대한 문제가 해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욕망의 충족을 보여주고, 스토리가 <발생-발전-발단-고조-종료>의 일반 원칙에 따라 마무리됨으로써 주인공이 후반부에서 소설내적 지위가 한 단계 내려앉는 현상이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내세운 주인공이 “믿을 수 없는 화자”로서의 서술 전략적 위상에 부합되게 작가가 의도적으로 서사체를 구축하였거나, 혹은 작가나 주인공이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욕망 자체가 충족되지 않아 여전히 지속되는 진행형이거나, 이것도 아니라면 서사체 구성에 있어서의 작가적 능력미달로 실패한 텍스트를 생산해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핵사건에 대한 분석으로 미루어보아, 작가가 주인공을 향해 강하게 심리적인 친밀감을 보이면서 주인공에게 높은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고 이미 초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주인공에 대한 권위부여는 곧 작가적 권위와 직결되기에 작가와 주인공에 대한 인식적 거리가 밀착되었고 심리적, 이데올로기적 거리 역시 근접하였다는 정보를 주고 있는 이상 특별한 서술전략에 근거하여 주인공을 독자가 수용하기 어렵고 이미지에 분열이 생기는 형상으로 수립하였을 가능성은 우선 배제한다. 그러므로 텍스트가 실패했을 가능성과 작가 내지는 주인공의 욕망이 지속되고 있는 진행형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텍스트가 마무리되는 부분을 인용하여 따져보도록 한다.

  ③ 적군(일본군)을 물리친 뒤에 점검해본즉 반해량 지대의 손실은 전사가 넷, 중상이 둘, 경상이 여섯이었다. (중략) 시체들을 산 밑에 그러묻은 뒤에 선장이가 무덤을 향하여 군모를 벗고 머리를 숙이니 옆에 섰던 장준광이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그는 난투장에서 군모를 어데다 날려보냈는지 맨머릿바람이었다). 다른 전우들도 다 숙연히 머리를 숙였다. 태항산에서의 이와 같은 전투의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 일구팔사년 마지막 달 (끝) (3권, 65장, 378면).

  인용문③을 살펴보면, 작가가 스토리 외부에서 스토리 내부에 개입하여 세부적인 정보를 주고 있는 대목이 있다. “그는 난투장에서 군모를 어데다 날려보냈는지 맨머릿바람이었다”는 서술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작가가 전지적 시점을 적용하여 독자에게 자신의 정체를 형식적으로라도 숨기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장준광은 난투장에서 군모를 어데다 날려보냈는지 맨머릿바람으로 고개를 숙였다”고 하는 것이 인물형상 창조의 일반화에 더 적합하고 문예 미학적 창작원리에도 부합이 된다. 작가가 굳이 이렇게 서술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작가 자신이 완전히 스토리 내부로 개입되고 작가의 위치가 쉽게 발견되어도 그것을 굳이 감추고 싶은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전달되는 내용이 소설에서의 그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발생하였던 사건에 대한 기술로서 인식된다. 즉 소설로서 소설을 읽다가 그것이 보고서로 드러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작가가 독자의 호출이 없이도 저절로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작가의 시선과 존재감을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입장을 변호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효과적인 서술전략을 적용한 것으로 된다. 그러므로 위의 서술태도를 미루어보아 작가는 역사적 현장에서 일어났던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는 판단을 할 수 있다. 적어도 이러한 서술방식이 독자의 입장에서 서술된 내용을 사실 그대로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는 효과적으로서 미학적 느낌전달보다는 사실적 정보전달에 더 적절하다. 독자는 이 지점에서 작가를 역사적 작가와 직결시키는데 주저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보고서 형식의 서술이 있기 바로 전 구절에서 “선장이가 무덤을 향하여 군모를 벗고 머리를 숙이니 옆에 섰던 장준광도 머리를 숙였다”는 것을 보아 작가는 주인공의 “옆에서” “장준광”이를 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작가가 여러 등장인물 중 주인공과 가장 가까운 시점에서 타인을 보고 있다는 판단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전반 문맥으로 보아 전달되는 내용이 진지한 그 무엇임이 분명하다. 전투가 벌어졌고 사망자가 있었으며 사망한 전우에 대한 경의를 살아있는 자가 숙연히 표하고 있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그 어떠한 해학적이거나 반어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그렇다면 작가가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점이나 심리적 거리는 인용문②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가깝다. 그리고 서술은 “태항산에서의 이와 같은 전투의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 일구팔사년 마지막 달 (끝)”에서 멈추고 전반 텍스트가 종료된다. 액면 그대로를 보면 “전투”는 현재 진행형이지만 “일구팔사년 마지막 달 (끝)”과 연결시켜보면 “태항산”에서의 전투는 이미 물리적 시공간에서는 과거형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몰랐다”면 텍스트가 더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것으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보고서와 흡사한 서술전략이 잠시 개입하다가 다시 소설적 일반 형식으로 되돌아갔다가 맨 마지막에 물리적 시간을 기입함으로써 인용문③은 울퉁불퉁한 서술양식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이 짧은 인용문에서 독자로 하여금 소설과 보고서 양식 사이를 두 번씩이나 드나들게 하여 마지막 집필날짜를 새겨보는 순간에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느낌과 판단이 강하게 두뇌에 각인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미 끝난 사건의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몰랐다”는 역설적인 표현은 작가의 끝나지 않은 정신적 시간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하고 텍스트의 주인공과 작가의 심리적, 정서적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 양자를 거의 구분할 수 없도록 하는 효과를 발생한다. 인용문의 전반을 살펴보면 작가가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에 대한 내면심리로의 침투와 현미경적인 심리해부가 없다. 감정적 표현의 층위가 완전히 거세된 것이다. 죽음이라는 극한상황에서 감정적 표현이 없는 경우는 두 가지로 가능성을 점검해볼 수 있다. 먼저는 죽어간 전우와의 정서적 교호관계가 전혀 성립되지 않았을 경우이다. 그러나 이것은 방대한 분량으로 전반 조선의용군 장병들에 대한 서술에 텍스트의 지면을 압도적으로 할애한 서사체의 근본 서술원칙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그 반대의 경우가 상정된다. 즉 주인공이 전우에 대한 밀도 높은 슬픔을 자제하고 있는 것을 작가가 의식적으로 표현의 층위에서 누락시킴으로써 숙연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일본군”이라는 어휘소로 압축된 적대적 세력과의 전투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면서라도 끝까지 지속하는 행위, 그것도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의 지속행위라는 데서 사태의 심각성과 중대성, 그리고 생명의 존엄과 고귀함에 독자의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의미의 최종 핵이 무엇인가를 추적하게 만든다.

  상술한 분석은 텍스트가 스토리의 일반 서술원칙인 <발생-발단-발전-고조-종료>의 기본 요소 중 <종료> 부분이 결여되어 있음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즉 고조에서 정보가 단절되었기에 텍스트는 영원한 미완성의 진행형으로 남아있는 존재양태이다. 욕망의 주체인 주인공의 욕망 역시 동일한 맥락을 따라 충족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여전한 진행형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다. 이때 욕망의 주체와 매개, 그리고 욕망대상을 구조(4)로 나타내면 <서선장(주체) - 사망한 조선의용군 전사들(내적매개) - 전투를 진행 중인 조선의용군 전사들(외적매개) - 전투를 통한 일본군 섬멸 및 축출(대상)>으로 표기가 된다. 내적 매개에 속한, 죽은 자로서의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욕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리적인 충격에 의해 욕망의 능력을 원천적으로 박탈당하면 욕망의 기능 자체가 작동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는 다르다. 욕망을 하게 되고 또 욕망의 대상을 기억 속에서 지우기가 불가능하다면 상황에 따라 오히려 능동적으로 죽은 자를 산자 앞에 내세운다. 작가의 강렬한 창작행위가 여기에 속한다. 이 경우에 죽은 자는 산자의 삶에 내면화되고 등장인물과 작가 자신의 삶이 일정한 정도에서 서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본 텍스트가 이러한 특이한 축조기술 및 결말로 인해 일반적 소설 서술 원리에서 많이 벗어난 것은 텍스트에 옮겨둔 등장인물에서 미리 죽음을 맞이한 자 중 일부, 정확히 말하면 특히 전투에서 생을 마감한 “조선의용군 장병들”을 위주로 문학적 행위를 통해 간접적으로 부활시키고 그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욕망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죽은 자 : 산 자>의 양가성이 상당부분 극복되어 통합이 가능한 영역을 보다 많이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작가가 주인공을 내세워서 스토리의 전반부가 진행되고, 후반부에 갈수록 주인공의 지위가 “조선의용대 장병들”과 점차 일치해지는 것은 구조(4)의 경우에 내적 매개, 그리고 외적 매개가 점차 소실되어 욕망하는 주체의 삶에 내면화되는 동시에 적대적 타자인 <일본군>과의 역동일시가 일어나는 과정이라는 것을 명기해둘 수 있다. 매개의 소실은 욕망대상과 매개사이의 거리가 사라지고 욕망주체와 매개가 동질의 속성을 공유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인용문③에 대한 분석을 통해 내적 매개와 외적 매개의 소실현상을 감지할 수 있고, 그것은 동일시와 역동일시의 양가적 의미항을 아울러 생성해낸다는 보아낼 수 있다. 즉 <동일시 : 역동일시>의 양가적 의미항은 <작갇서선장·조선의용군 장병들 : 일본제국주의>로 구체화된다. 작가와 욕망의 주인공 사이의 인지적, 심리적, 이데올로기적 거리가 소실되어 균질화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욕망대상으로서의 일본군에 대한 섬멸의지가 현재 진행형이라면, 이것이 이렇게까지 확고하게 고착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진일보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정신적 시간의 흐름이 끝나는 지점을 “아무도 몰랐다”는 정도에서 대체적인 윤곽과 느낌을 전달받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행동하는 욕망의 주체는 그 행동의 당위성을 피력해야함과 동시에 보다 설득력 있는 조건을 제시할만한 여건에서 욕망주체로서의 <직접체험>을 강조할 위치에 있다. 역동일시 된 적대적 타자인 “일본군”과의 관계가 단순한 위용과 행동을 위한 행동으로의 당위로 말미암은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 이미 상당한 정도에서 확인된 사항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필연을 기반으로 최고의 심급을 제공하는 위상으로까지 격상되어야 한다. 역으로 이러한 필요성의 강조가 <작가-주인공-조선의용군> 사이 관계를 보다 심층적 의미에서 바라보기 위한 근거로도 작용한다.

  따라서 작가와 주인공의 정신적 시간의식에 대한 고찰을 진일보 진행하도록 한다. 그것은 아무래도 핵사건의 자장에 흡수된, 더욱이 핵사건을 처음 접하던 장면에서 가장 잘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스토리의 흐름을 되돌아가 그 대목을 인용하여 천착해볼 수 있다.

  ④ 시보에 이어 뉴스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이야기에 정신들이 팔려서 어디 개가 짖느냐 하고 귀 밖으로 흘려듣다가 문득 조선인이 어쩌고어쩌고고 폭탄사건이 어쩌고어쩌고 하는 소리가 귓결에 피뜩 들려서 숙자 아주머니가 “아니 가만...... 저거 뭐라나?” 하고 손을 내젓고 귀를 기울이는 바람에 선희와 선장이도 따라서 지껄이던 짓을 그치고 귀들을 기울였다. 세 사람의 눈이 차차로 동그래졌다. 일본에서고 조선에서고 이와 동일한 시각에 그 뉴스를 듣는 청중은 다 이렇게 눈들이 동그래졌을 것이다. 전파를 타고 날아온 뉴스가 자못 엄청났기 때문이다. 중국 상해 홍구공원이란 데서 조선인 윤 무어라나 하는 사람이 폭탄을 던져서 경축회장 주석대에 앉았던 일본군 장령 여럿을 살상하였는데 그 중에는 상해파견 군사령관 시라가와 대장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 이름이 뭐라니?” “인호오기찌라니까...... 아마 윤-봉-길이겠지요.” (중략) 숙자 아주머니와 선희가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 선장이는 저도 모르게 혼자서 팔을 뽐내었다. “쟤 좀 봐, 금시 쌈이라두 하러 나갈 것 같네.” “피가 끓어서 참을 수 없는 모양이지요. 왜 안 그러겠어요. 우리두 다 속이 후련한데.”(2권, 29장, 87-88면)

  인용문④ 중, 뉴스를 듣던 현장에서의 등장인물은 서선장, 숙자 아주머니, 한선희 등 세 명으로 명시된다. 구체적 현실에서 발생한 것으로 윤봉길의 폭탄투척 사건이 기술되는 대목이다. 뉴스의 내용은 인용문에서 이미 충분히 제시되었기에, 뉴스를 듣던 바로 그 “동일한 시각”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어보기로 한다. 우선 “전파를 타고 날아온 뉴스”이므로 그 뉴스는 일본방송국에서 서울 쪽으로 전파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일본에서고 조선에서고 이와 동일한 시각에 그 뉴스를 듣는 청중은 다 이렇게 눈들이 동그래졌을 것이다”라고 기술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와 동일한 시각”이 의미하는 구체적 시간을 생각해볼 수 있다. 작가는 윤봉길 폭탄 투척사건이 한참 지난, 인용문③에서의 표기에 의하면 “일구팔사년 마지막 달”에 텍스트를 마무리하였으므로 몇 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이야기를 텍스트에서 주인공을 주로 내세운 방식으로 기술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물리적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그것을 “그때와 동일한 시각”으로 언급하지 않고 “이와” “동일한 시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동일한 시각”은 작가가 그 사건을 적고 있던 1980년대의 그 어느 시각과 윤봉길 관련 뉴스를 듣던 주인공 한선장 등 세 명의 “동일한 시각“과 같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동일한 시각”이지 작가가 그 사건을 텍스트에 적고 있던 시각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1980년대의 그 특정된 시간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내부의 시간흐름 속에서의 윤봉길 사건의 뉴스 “청중”에 속한다. 어느새 작가는 서술자의 자격이 아니라 역사적 윤봉길 사건 “청중”의 신분으로 서울의 그 어느 특정한 장소에 가 있는 것이다. 작가는 작가의 신분을 포기하고 텍스트 속의 한 등장인물로 자신의 역할을 바꾸어 인용문에 명시되었던 그 뉴스 청중 세 명과 같은 곳에서 그 뉴스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실 그 특정한 공간에서 직접 뉴스를 “현실적”으로 듣던 인물은 모두 네 명이다. 그리고 작가는 “그 뉴스”를 “듣는 청중” 정도가 아니라 “일본에서고 조선에서고” 그 뉴스를 듣는 다른 모든 “청중”에게 자신의 체험을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듣는 청중”이라는 표현 자체만 놓고 보면, 시간성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체를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 즉 시간과 관련된 자질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그것은 시간을 표기하기 위해 굳이 사용되었고, 전반 구절의 맥락 속에서 다른 의미를 특별하게 생성시킨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마땅히 “듣던 청중” 혹은 “들은 청중” 등 현재진행시제 혹은 과거시제에 합당한 용어를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듣는 청중”은 “동일한 시각”과 강제로 결합되어 “동일한 시각에 그 뉴스를 듣는 청중”으로 엮이는 과정에서 속성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시각”에서의 시간적 속성이 “듣는”의 지시대상용 어휘소와 강렬하게 반응하여 시간성의 적출 및 제거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시간성의 제거는 역설적으로 시간의 영속과 같은 의미체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등장인물의 신분으로 “그 뉴스”를 듣던 작가가 그 시각에 시간 제거 및 시간의 영속성이라는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두 종류의 시간적 속성에 대해 동시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즉 작가는 시간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세계나 시간이 영원히 흐르는 세계에 대해 정신적으로 “동일한 시각”에 이미 경험한 것이다. 시공간으로 구성된 객관적 세계에서 진행할 수 있는 체험 중 시간성을 추방시킨 강도 높은 수준의 체험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의 흐름은 그래도 쉽게 상정할 수 있고, 그것은 공간성에 대한 인지를 정확히 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시간성이 제거된 세계는 이미 영원불변이라는 속성을 부여받고 변화의 가능성이 전부 증발되어진 상태이다. 작가 자신이 등장인물 중 일인으로서의 강렬한 체험이 부각되고 나면, 그것이 “듣는 청중은 다 이렇게 눈들이 동그래졌을 것이다”는 과거시제로 글줄이 마무리 된다고 하여도 시간속성의 제거과정을 통해 순간을 영원으로 관통시킨 작가의 의지 자체는 이미 변화의 여지가 없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해준다. “이렇게” “눈이 동그래졌을 것이다”는 표현에서도 작가가 체험의 현장에 엄연히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한다.

  이어서 작가는 작가로 되돌아가 그 뉴스를 들었던 모든 청중은 다 자신과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간접적인 주장으로 자신의 직접체험에 대한 동조와 긍정을 요청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작가의 기본자세인 냉정한 관찰자적 시선이 아니라 다소 주관적 색조가 가미된 논평이라고 할 수 있다. 스토리 흐름에 단순히 개입되는 선에서가 아니라 직접 등장인물로 나타나 작가와 스토리 내·외부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린 윤봉길 사건에 대한 작가의 극렬했던 체험은 그 강도와 깊이를 유추하기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행동으로의 의지 역시 동요할 여지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독자들에게 심어준다. 그런데 전반 텍스트에서는 그러한 일련의 행위를 주인공에게 전격 위임하여 스토리를 진행시킨다. 그러므로 작가와 주인공 사이의 심리적, 인지적, 이데올로기적 상동성을 따져보면 양자는 항상 거의 일치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물론 행동으로의 의지는 분명하게 “일본군”이라는 지시체를 향한다.

  등장인물 한선희는 “우리두 다 속이 후련한데”라는 표현으로 일제, 특히는 일본군에 대한 강한 혐오감과 거부심리를 드러낸다. 여기에서 “우리두”라는 집단 지칭의 인칭대명사를 통한 표현은 매우 함축적이다. “우리두”는 곧 “우리마저도”라는 포함의 뜻이다. 발화자는 자의식이 뚜렷하게 자신의 총체적 상황을 인지한 상황에서 발화를 진행하기에 “우리두”라는 극도로 제한적인 표현에 온축된 의미의 심각성을 오히려 극명하게 부각시킨다. 한선희는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장래의 꿈이 피아니스트인 모범생으로서 시국의 상황에 그렇게 큰 반응을 보일 이유가 그리 충분하지 않은 인물이다. 원산 유지인 한진사의 손녀로서 집안의 내력이 좋아 사회적 신분이 든든하게 보장되어있고 미국에 유학도 갈만한 정도로 앞날이 낙관적이므로 맡은바 모범학생 소임을 다 하는 선에서 자신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꾸며나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한선희의 태도는 텍스트 내부 상황을 따져보아 등장인물 중 최상의 생존조건이고 최저로 시국에 관심을 보일 인물의 발화를 거쳐 체현된 것이라는 데서 발화의 내용 자체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특정한 식민시기의 일반적 조선인의 보편적 정서가 어느 정도 일제의 침략과 식민생활을 혐오하고 저항하도록 추동하였는가를 한선희의 발화에서 뚜렷하게 포착해낼 수 있다. 더욱이 그것이 “윤-봉-길”로 상징화된 “조선인 청년”에 의한, 폭력과 살인을 통한 극단적 방법으로 “일본군 장령 여럿을 살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후련하다”는 느낌을 주었다는데서 “일제”의 침략이 갖는 부당성을 강하게 고발하는 성격을 띤다.

  한선희의 발화에서 나타난 욕망의 전반 과정을 구조(5)로 나타내면 <한선희(주체) - 최저의 증오심리 여건과 자질(내적매개) - 최악의 식민 시국(외적매개) - 일본군 살상(대상)>으로 된다. 욕망의 주체 작가의 욕망과정은 구조(6) <작가=서선장(주체) - 윤봉길을 통한 최고의 정신적 체험(내적매개) - 최초의 실질적 일본군 살상방법 발견 및 확신(외적매개) - 일본군 살상(대상)>으로 도식화 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작가와 욕망의 주인공이 동일시되기에 구조(6)의 욕망주체를 선정 시, 작가와 주인공을 완벽하게 합치시켜 완전히 동일한 자격으로 병렬할 수 있다.

  인용문④에서 주인공을 서울에 데려다 중학교 공부를 시킨 먼 친척이 되는 숙자아주머니의 경우, 남편이 종로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차리고 있었기에 사회적으로 생활적으로 모두 충족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대신 부부사이에 자식이 없는데다가 남편의 외도가 지나쳐 그 번민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서선장을 데려다 한집에 기거하는 생활을 영위하던 중 윤봉길 폭탄투척 사건을 같이 듣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일본인에 의한 종로의 번화한 발전양상이 귀족적이고 안일한 그녀의 품위를 만족시키기에는 더없이 적절하기에 식민생활 자체에 큰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별로 없다는 사고패턴을 무의식적으로나마 지닌 일반 여인으로서 “여기가 지금은 이렇게 번화해두 한국 시절엔 질퍽질퍽한 고개였어. (중략)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불과 20년 동안에...... 이렇게 몰라보게...... 으뜸 가는 번화가를 만들어놓았지뭐냐.(2권, 19장, 285-286면)”고 간접긍정의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그녀의 반응 역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우선 “아니 가만...... 저거 뭐라나?”는 그녀의 발화에서 시국정세에 대해 누구보다도 예민한 측면이 특별히 잘 드러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이야기에 정신들이 팔려서 어디 개가 짖느냐 하고 귀 밖으로 흘려듣다갚 가장 먼저 뉴스의 내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장본인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생존과 발전으로의 본능적 움직임은 복잡하고 불안한 시국정세를 가장 빨리 포착할만한 탁월한 능력을 그녀에게 부여하였다. 그 어떤 사건이 가져올 파장 같은 것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엄밀한 행위방식을 결정할 수 있게끔 그녀는 잘 단련된 반응체계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장이는 저도 모르게 혼자서 팔을 뽐내었”고 그녀는 곧 “쟤 좀 봐, 금시 쌈이라두 하러 나갈 것 같네”하고 반응을 보인다. 숙자의 이러한 반응체계는 완벽하게 자신을 우선 최상의 위치에 놓는 입장에서 출발된 속성을 잘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발화는 사고의 여과과정이 필요 없이 저절로 그러하도록 나타나는 습관적인 양상이라고 하여도 크게 무리는 없다. 그렇다고 하여 숙자와 같은 유형의 인물이 소시민적인 반응과 자기방어기제를 최상의 생활양식과 미덕으로 지니는데 대한 반론을 쉽게 제기하기 또한 어려운 상황임을 주인공의 시각을 빌어 “의당 숙자 아주머니를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이성의 목소리는 귓전에 대고 속살거렸다. 그렇건만 어찌 된 일인지 선장이 마음속에서 함박꽃 같은 숙자 아주머니를 옆으로 밀어내고 첫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언제나 실눈에 빈대코를 한 어멈이었다(2권, 19장, 299-300면)”고 쉬운 전달방식을 택해 액면 그대로 전해준다.

  숙자라는 인물에 대한 고찰은 곧 각 인물이 서로 여러 인물을 접근하고 판단하는 태도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음을 반증하고 있기에 주인공의 입장에서 동일시, 역동일시 범주에 넣지 못하는 다른 수많은 인물들을 평가할만한 복합적인 기준을 마련하도록 지속적으로 판단근거를 확보해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숙자아주머니 유형의 인물에 대한 고찰은 이 정도로 이미 충분하다. 그러나 여러 주요 등장인물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보다 복합적으로 평가하도록 고안된 구체적인 판단의 근거는 전반 텍스트의 주제적 층위를 고구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므로 절을 바꾸어 인물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면서 제기되었던 문제의 실체에 진일보 접근하고자 한다.

  여러 등장인물을 살펴보기 전에,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둘 필요는 있다. 문제의 초점을 명백히 함으로써 논의가 상정된 범주 내에서 흐트러지지 않고 진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욕망의 3원구조를 도입하여 주인공의 욕망과정에 중점을 두어 분석을 진행한 결과, 텍스트 주-스토리의 욕망구조를 요약내용 별로 밝혀낼 수 있었고, 텍스트 후반부에서 주인공의 지위가 한 단계 내려앉는 현상이 작가와 주인공 및 조선의용군에 대한 동일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아내었다. 즉 작가의 조선의용군에 대한 강한 동일시가 서사구조의 일반 법칙마저도 무시하게끔 강하게 작용하여 텍스트는 <발생-발단-발전-고조>의 4단계만 있고, <종료>가 없는 특수한 형태의 서사구조를 형성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둘째, 전반 텍스트의 핵사건과 결말부분을 찾아보아 작가 내지는 주인공의 욕망대상이 최상위 문제의식 차원에서 <국가 : 민족>의 양가적 대립관계 설정을 할 수 없음을 밝혔고,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이나 집단들 사이 이데올로기들의 충돌일 가능성을 점검해보았다. 그리고 주제를 도출하기 위한 최소 충족요건으로 주인공이 지향하는 바가 일제의 침략에 항쟁하여 민족기반의 정권수립임이 명백해졌다. 다만 민족적 기반과 타민족과의 연합, 정부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한 진일보로 된 고찰은 진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일제에 대한 항쟁이 식민시대 조선인들의 보편적 정서라는 것도 아울러 살펴보았다.

  셋째, 작가와 주인공의 심리적, 인지적, 이데올로기적 상동성이 분명하게 드러나 주인공의 욕망구조가 작가의 그것과 거의 일치함을 발견하였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주인공의 모습을 핵사건의 중간단계를 거쳐 결말부분에서 끝까지 일본군과 항쟁하는 대목을 통해 명백하게 보아내었다. 즉 주인공에게서 가장 부각되는 특징이 사고와 행동의 일치성임을 확인한 것으로 된다. 그리고 텍스트에서 욕망의 삼원구조의 작동 메커니즘은 <욕망주체 - 내적매개(직접체험) - 외적매개(간접체험) - 욕망대상>으로 도식화되며, 르네 지라르의 기본 개념 중 욕망구조를 작동시키기 위한 기본 구성 요소만 빌려왔을 뿐임을 밝혀둔다. 본 텍스트에서 욕망구조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가 지라르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름을 텍스트를 통해 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