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에서 살던 물고기 바다에선 살 수 없다
회 령 댁
오메
간밤엔 바지런히도
싸락눈 내렸나베
조리도
문턱길 매끄러운 걸 보면
가고파도
지척이 천릿길
댁은 회령이랬지
오늘은
3월하고도 삼짇날
싸락눈 내린 길
매끄러워 못 가나베
요리도
봄바람은 살랑이는데
댁은 회령이랬지.
2006년 12월 20일 아내에게 선물 몇 개를 포장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금희와 점심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전해 주려는 선물이다. 금희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4년 전. 그 뒤 몇 번인가 전화 연락이 있어서 그녀의 근황을 대충 알고는 있었다. 탈북 하여 연변에서 함께 살았던 어머니와 연변에서 조선족과 결혼해 자식까지 낳아 살던 여동생이 멀고 먼 남쪽 나라를 거쳐 꿈에 그리던 한국 땅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주차장까지 마중 나온 금희의 안내로 그녀의 아파트를 살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탈북 생활을 하는 동안 연길에서 살던 아파트보다는 작았지만 분위기는 아늑했다. 살림살이도 중국에서 살 때의 집기보다는 고급스러웠다. 손님을 대접하는 그녀의 행동과 차림새 또한 매우 세련되어 보였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금희는 멋쩍은 듯 나지막한 음성으로 지난해에 결혼을 했다고 말한다. 결혼은 했는데 혼인 신고는 못 했다며, 불운한 처지의 자기 신변을 털어 놓는다. 나는 무어라 위로의 말도 못 하고 함께 입국한 아들의 소식을 물었다.
“올해 우리 아이는 중학교 1학년이 되었어요.” 하고 알려준다. 중국에 있을 때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어도, 탈북자의 처지로 인해 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서 그녀가 자식에게 한글 교육과 수학 교육을 시키는 모습을 나는 간혹 볼 수 있었다.
“참 세월은 빠르군. 꼬맹이 아들이 벌써 중학생이 되었다고?”
“한국에 입국해 선생님과 마지막으로 만나 뵌 지도 4년이나 되었는걸요.”
“벌써 그렇게 되었나? 오늘 내가 가져 온 이 선물, 동생네도 나눠 주었으면 해.”
하찮은 선물이지만 몇 번인가 중국에서 만났던 인연으로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전에 연변에서 이북으로 잡혀 갔던 동생 있지요? 그 동생도 또 부인과 같이 탈북을 해 지금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어요. 여동생 조선족 남편도 한국에 왔고요. 이 모든 게 선생님 덕분이지요.”
“뭐 내가 도와준 건 아무 것도 없잖아. 연변에 있을 때 돈 몇 푼 보태준 것뿐이지.”
참으로 대단히 운이 좋은 집안이다. 한 식구가 탈북을 해 한국으로 입국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다섯 가족이란 대식구가 한국으로 입국을 했다니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가면서 금희는 말을 이어간다.
“선생님, 저는 언제 이런 차를 타고 살아보지요? 살아생전엔 영영 틀린 것 같은데…….”
“나도 35년 전 결혼을 하고 살 곳이 없어 계사장 속에다 방을 만들어 살았단다. 그런 어려운 시절을 거친 지금의 내 모습이 이북에서 뭇사람들에게 저주받는 부르조아 무리로 변했구나.”
금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가진 자를 저주하면 그 사회는 발전을 할 수 없는 거야. 선의의 경쟁을 함으로써 사회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거란다. 지금 이 나라에도 너보다 더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니?”
“맞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잘 사는 편이지요. 우선 남에게 부채가 없고 또 작으나마 내 집이 있잖아요?”
“그래. 인간이 행복하게 산다는 건 지나치게 위만 바라보지 말고 아래도 내려다보며 현재 처해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사는 거란다.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갖지 않는다면 상대적 빈곤감에서 벗어날 수도 없으며 스스로 가슴 속에서 들끓는 증오심으로 하여 끝없는 불행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게 된단다.”
“연변에서 선생님이 제게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나요. ‘강에서 살던 물고기는 바다에선 살 수 없다’ 는 말씀 말이에요. 그 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그 뜻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요. 왜 선생님이 중국말 열심히 배워서 중국에서 살라고 하시던 말씀 있잖아요. 그 당시엔 그 깊은 뜻도 몰랐어요. 저는 여기라서 주위 사람들에게 일절 탈북자란 말도 입 밖에 내지 않고, 혹시 그런 낌새를 남들이 알아차리지나 않을까 걱정을 해요. 나는 연변에서 나온 조선족이라고 속이고 있거든요. 남들에게 조선족이라고 말해도 주위의 차가운 눈초리는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그게 훨씬 좋은 것 같아요.”
“그래? 그런 말을 했던가?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나는 이 같은 대답을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어느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영 떠오르질 않는다. 내가 연변에 다니면서 느낀 점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살다가 이념이 다르고 사회 구조가 다른 자본주의 사회에서, 식생활이 해결된다고 해도 자본주의의 사회 정서와 동화될 수 없는 이질적인 정서로 인하여 분출되는 소외감과 열등의식 때문에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떨쳐버리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같은 말을 하게 되었으리라.
“연변에 있을 때 고향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지. 그 때 금희는 이렇게 말했을 거야. 그 놈의 사회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고…. 그러나 어머님은 식사를 하면서 고생은 했지만 그래도 고향이 생각난다고 말씀하셨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 인간이나 짐승이나 모든 생명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서서히 적응하여 저항적 의식이 점차 무디어져 가기 때문이지. 즉 정신적으로 사육되어져 일사불란한 사고와 행동만이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야.”
“지금도 어머님은 간간이 고향 생각이 나신대요. 그 지긋지긋한 곳인데 왜 지금도 그러실까 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적응을 못 할 때 그 옛날을 더 생각하게 되는 거야. 이북에서는 배는 고팠지만 그래도 의지할 수 있는 친척이 있고 아픔을 달래줄 수 있는 이웃이 있었지만, 지금은 홀로라는 절박한 심정이 어머님의 의식을 억누르고 있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현 시점에서 배고팠던 과거는 까마득하게 잊고 극복하기 어려운 현재의 감성적 처지가 심각하게 자신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옛날을 그리워하게 된 거야. 여기서 좀 더 편안하게 살려면 하루 빨리 이 곳 정서를 이해하고 또 이 곳 정서에 맞도록 자신의 정서를 바꿔 가야 해. 그 길만이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이야.”
아무리 내가 설명을 한다 해도 금희는 아직도 이해를 못 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짧은 시일 내에 이 곳 생활에 익숙해질 수는 없지만, 자신의 행복이나 불행은 스스로의 마음가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탈북녀인 금희를 처음 알게 된 건 8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조선족을 돕기 위해 연변에 다닌 지 4년이 되어서다.
연변에 정착하여 살던 한국인 정기윤(가명) 씨로부터 꼭 도와줘야 할 사람을 소개할 터이니 신원에 대해선 일절 물어보지 말라는 부탁을 받고 만나게 된 게 금희였다. 소개를 했던 정기윤 씨에 대해선 대충 신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쾌히 승낙을 했다.
만나던 첫 날 내가 금희에게 신원에 대해 물어보기도 전에 금희는 스스로 나는 특무 임무를 받고 나온 사람인데 무섭지 않느냐고, 오히려 내게 겁을 주는 여유까지 부렸다.
당시 우리 집 경제 사정은 매우 어려워서 조선족 후원 사업 자체에도 많은 애로점이 있을 때였다. 또한 경제적인 문제 뿐 아니라 중국 국법을 어기며 탈북자를 돕는다는 건 나와 관계가 있는 조선족에게도 매우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기에 함부로 제삼자에게 이 같은 사실을 발설할 수도 없었고, 또한 집 식구들에게도 면목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거처 문제와 경제적인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탈북자를, 인간애에 입각해서 단 한 명만이라도 비밀리에 도와주기로 마음을 굳혔다. 처음 금희를 만나던 날 나는 조선족을 돕기 위해 연변에 온 사람이지만, 먹고 살기 위해 탈북한 북한 주민의 애처로운 현실을 목격하고 모르는 체 지나친다는 건 인륜의 도리를 벗어나는 것 같아 당신을 도와주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우리 집도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장신을 도와주자면 지금 내가 피우고 있는 이 담배를 끊을 수밖에 없고, 내가 담배를 끊어 금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나는 흔쾌히 담배를 끊겠다고 말했다.
그게 동기가 되어 담배를 끊게 되었고, 담뱃값을 모으고 또 용돈을 줄여 보태서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게 되었다.
금희가 자식과 어머니를 모시고 아주 험악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걸 보고 신분 안전을 위해서라도 좀 더 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할 것을 권했다.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적으나마 목돈을 마련해 보증금을 걸고 다달이 내는 사글세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환경이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생활이 점차 안정되면서, 위성 안테나를 비밀리에 설치하고 한국 텔레비전도 시청하게 되었다. 그때 어느 날인가 한국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금희에게 ‘강에서 살던 물고기는 바다에선 살 수 없는 법이야.’ 라고 지나가는 소리로 말했던 것 같다.
8년이나 잊고 지냈던 그 말을 금희로부터 전해 듣고, 나는 빠르게 변해가는 우리 사회의 실정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