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서 <송 미자 수필>
건축예술의 두각을 보여주는 할빈의 중앙거리로 나는 나를 찾아서 떠난다. 미술학원 졸업생들의 저녁후의 업외 작업에 몸을 맡긴다. 호기심도 자극하였지만 언제나 미술의 아름다운 세계에서 나를 찾아보고 싶었다.
정작 화가앞에 앉으니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들애였다. 아들애에게 미술의 신비한 령지를 엄마의 얼굴에 비친 내심심처의 고백으로 선물하고 싶어지면서 그보다도 더 큰 것은 계몽을 주고싶다. 나의 생각대로 될수없는 것이 뻔하면서도 또 자신의 억지로 된 뜻에 따라 아이를 키우지 말라고 타일러준 선배선생님의 훈육도 머리에 새겨져 있지만 엄마로서의 자식에 대한 빗나갈지도 모르는 기대라도 좋다.
화가는 저녁 아홉시가 넘은 산데리야 불빛아래에서 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 초점방향을 제시하고 간단없이 눈길을 나의 얼굴과 화지에 바꾸면서 나의 얼굴만이 아닌 나의 내심심처를 화지에 조심스레 옮겨놓는듯 하였다. 나는 나의 기질이 담긴 말쑥한 미소와 야심이 넘치는 열망을 얼굴표정에 담고 싶다. 또한 화가가 나의 얼굴에 흑점 한점 없는 행복의 미소와 그 어떤 행복하면서도 동경을 안고 사는 기질의 내심세계도 그대로 그려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 말하고 싶다. 나의 내심심처를 그려달라고.
다빈치의 불후의 명작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담아 보느라 애를 쓰다가 인차 행운의 미소로 탈을 바꾼다. 모나리자와 나는 풍속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고 세계가 다른 운명인데 내가 어찌 모나리자를 본딸수 있으랴? 모더니즘의 기질과 리상이 동반된 이십일세기의 동방의 중년녀인인 나를 찾으러 떠난 길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다빈치가 4년이라는 짧지도 않은 시간에 불후의 명작을 열심히 그린 듯이 짧은 한시간에라도 열심히 나를 그려주기를 갈망한다.
5분, 6분, 분초가 흐름에 따라 나는 진정 못하는 소학생이 되었다. 몸은 비록 조용히 앉아있지만 마음은 화가의 눈길과 같이 간단없이 바뀌운다. 그 폭도는 더 넓게, 그 주기는 더 짧게, 얼굴을 스쳐지난다.
유혹과 호기심, 마치도 미지의 세계를 사립문틈으로 엿보는 사춘기의 소녀로 된듯싶다. 동경과 희망, 푸른청춘을 작열시키는 이십대의 처녀가 된듯싶다. 기질과 스타일, 삼십대중기의 청년과 중년의 분계선에서 현실을 정시할줄아는 자질있는 녀자가 된 듯 싶다. 사랑과 랑만, 높은 푸른 가을 하늘아래 풍만한 열매를 안고 사랑을 주고 랑만을 펼치는 성숙된 불혹의 녀자가 된 듯 싶다. 지천명의 미소로 별을 부르고 백발의 자애가 해솜같은 구름을 몰아온다. 녀자로 된 행복이 물결치는 순간이여!
화가는 속사에 그치겠느냐 아니면 색조를 가하겠느냐고 물어온다. 색조를 가하면 더 섬세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니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였다. 나는 쾌이 응낙했다.
한시간 남짓이 되어 화상이 나왔다. 간단없이 바뀌우는 나의 감정세계를 화가는 눈길과 잎귀, 코, 이마, 얼굴륜곽에 펼쳐놓았다. 나의 내심세계를 다 담은 듯 하였다.
사랑을 안고 랑만을 펼치는 사심없는 미소에 얼룩 한점 없다. 얇게 치켜진 입귀에 모아진 미소다. 동경를 안고 희망에 불타보는 정열이 빛을 뿌린다. 반짝이는 눈동자에 빛나는 넋이다. 드팀없는 삶의 지조를 보여주는 고집스러운 야심이 간단없이 발사한다. 이마와 머리에 모아진 꿋꿋한 절개다. 넓은 흉금으로 세상을 용납하려는 부드러움이 넘실거린다. 들창코 삼각에 펼쳐진 더없는 자애다. 세상을 독차지한듯한 허영심으로 행운을 볼러본다. 얼굴륜곽에 펼쳐진 환한 행복이다. 그리고 축 늘어진 귀방울에 욕심이 돋아나고 버들잎같은 눈섭이 동방녀인의 현숙을 모아준듯싶다. 이러고보니 내가 성모마리아로 된듯도 싶고 관세음보살이 아닌가도 싶다.
아니, 사진보다 다른 미술세계에서 진정한 나를 찾으려 애를 쓴다. 샨데리아 불빛의 굴절속에 속속들이 반사되는 음광을 빌어 또 다른 세계에서 나는 나를 찾는다. 끝없는 미지의 세계에로 나를 찾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