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사 연재 11
제8절 청나라조선인 명인
청나라 초, 조선기민의 후예 중 한패의 출중한 명인들이 솟아났다. 이들을 간단히 적어본다.
이사충(李思忠) 유명한 무관이다. 1644년 팔기군을 거느리고 섬서로 쳐들어가 동관을 점영하였고 강남으로 잔군하여 양주를 함락하였다. 장강남북 10개 주, 현의 반청세력을 숙청한 그는 그후 지방의 최고군사장관인 섬서제독으로 임명되였다. 그의 둘째아들 이음조(李?祖)도 많은 공을 세워 청나라의 병부상서로 있었다. 이음조의 아들 이병(李炳)은 강희년간 병부시랑으로 있다가 그후에는 지방의 최고행정장관인 안휘성 순무(巡?)로 되었다. 이사충의 셋째아들 이현조(李?祖)는 강희년간에 광동 수사제독으로 있었다.
한걸은(?杰殷) 청나라 초기에 《1등경차도위(??都蔚)》로 있은 한니(?尼)의 아들로서 정홍기만주부도통(正?旗?洲副都?)으로 있었으며 강희년간에는 수도위수 최고장관인 호군통령(????)으로 있었다. 그의 동생 한나진(?乃秦)은 흑룡강부도통으로 있었다.
상명(常明) 청나라 초기, 정황기 제4참령 제2고려좌령인 김선달의 외손자 상명은 건륭년간에 령시위내대신(즉 궁전 내무대신)까지 하였고 태자태모의 벼슬을 추가 받았으며 사망후에는 건륭황제로부터 의근(懿勤)이라는 익호까지 하사받았다
김간(金?) 《요동문현정략》에는〈高?性不??于?洲八旗,如金?亦高?. 隆年?以文??主知,其女后被?入?,遂命???府??正?旗,后遂以金?????管大臣,???也。》라고 적혀 있다. 김간은 건륭년간에 내무부 대신으로 있으면서 사고(四?)전서의 부총재를 맡았다. 무영전(武英殿) 취진판(聚珍版) 2891권을 간행할 때 조선의 동활자를 모방하여 고욤나무로 동활자를 만들어 인쇄를 하였기에 건륭황제는 취진판이란 이름을 선사하였다. 1792년에는 리부상서로 되었다. 그의 여동생은 건륭황제의 귀비로 되었다.
이세탁(李世倬) 《중국화가명인대사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籍,字?章,?谷?,?湖?督如?之子也。少?父?游江南,?王石谷,得其指授山水法,???退山游,又?其?生之?。其人物,官晋士?,得?道子水?道??而?之,遂悟其法。而花?,蔬果,各??意,盖得?舅氏高且?之指墨,而易以?,故能各名一家.》 청나라 건륭년간의 화가로서 양호총독 여용의 아들이며 왕석곡, 마퇴의 진수를 전수 받아 산수화, 화조화, 과실화 등에 뛰여난 재주가 있었으며 단독적인 한 개 유파를 형성하였다.
안기(安岐) 청나라 건륭년간의 저명한 서화감상가이다. 자는 의주(?周)이고 호는 려촌(?村) 또는 송천노인(松泉老人)이다. 서예와 그림을 애호하며 감상에 능하고 수장이 극히 풍부하다. 《묵연회관(墨???)》을 펴냈다. 진, 당나라 이후의 그림가작의 지묵감정, 인장진위감별에 있어서의 권위적 서적으로 되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그림을 건륭 황제에게까지 바치였고 건륭황제는 백은 1000냥을 은사하였다. 안기가 죽은 뒤 그의 소장품은 대부분이 건륭내부(?府)로 옮겨졌다. 안기에게는 여러가지 도장이 많은데 그중 가장 애용하는 것이 《조선인안기지인》이였다. 또 그가 천진에 호적을 두었기에 천진인이라고도 불렀다.
최?(崔?) 《요동문헌정략》에는《家象州,工人物士女,?焦秉?法,?染??,?情婉?,?未能方?古人,而翩翩足?一?矣,?梅亦佳,今官州牧》라고 씌여 있다.
김세속(金世?1852-1921) 조선 이주사람이다. 1875년 거인(?人)으로 되고 박식다학으로 소문난 그는 1896년에 총관내무대신 겸 공부시랑(工部侍?)으로 되었고 그후에는 종1품 벼슬인 협판대학사(??大?士)로 있다가 군기대신(?机大臣)으로도 있었다. 1909년 선통황제가 즉위하자 그는 퇴직하고 자정원 (?政院)총재의 신분으로 《덕종실록》의 편찬에 종사하였다. 죽은 뒤 태사(太?)로 봉되였다.
제4장 1910-1931년 조선이주민
제1절 원인과 동기
1. 사회배경
1910년 《한일합병》을 계기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였고 일제가 한국에 대한 식민지 정책은 본계도에 올랐다. 첫 번째의 총독 데라우찌는 곧 헌병경찰제도를 마련하는 동시에 조선민족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두 개 사단의 육군과 두 개 해군分遣?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각 군 소재지 에 수비대를 배치하고 현병경찰관에게는 ??에 이르기까지 87조항에 달하는 《즉결권(???)》과 강제집행권을 주어 조선인을 탄압, 살해했다.
헌병경찰제도는 1272개의 헌병대와 경찰서를 가지고 조선인의 의지를 묶어놓았으며 일반 국민에게는 그들의 필요에 따라 태형(苔刑) 등 전근대적인 형벌을 가하는 공포 속에서 식민지체제를 굳혀나갔다.
또 조선의 역사서, 충의전, 무용(武勇)전 등 20만 권의 책을 불살랐으며 조선민족의 렬등감을 고취하면서 조선민족문화의 말살과 민족혼을 매장하려 하였다. 조선인학교에 대해 대폭적으로 삭감하는 동시에 일본어의 보급과 일본인의 성격양성을 강제적으로 추진하였다. 조선인으로서의 지적인 발육의 길을 막았던 것이다. 이밖에 민족의 권익을 대변하는 어론기관과 집회를 폐쇄, 해산시켰다. 《황성신문(皇城新?)》,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大?每日申?)》가 폐간당했다. 또 모두가 익숙히 아는 안악사건 (安岳事件)과 신민회사건(105인사건)도 일어났다.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조선민족이 생존할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최대한으로 박탈하였다. 그 중요한 수단의 하나가 토지조사사업이다. 1910년에 본격적으로 착수된 이 조사는 1918년에 완료되였다. 이 근대적인 방법에 의한 가장 혹독한 토지약탈에서 총독부는 조선국토의 40%를 차지하였다. 몰락한 농민들은 화전민이 되거나 멀리 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조사에 사용된 경비는 무려 300만 원이나 되었다. 당시 총독부가 1년 예산중 교육비가 30만 원, 의료비가 40만 원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사진 1-04-01 영고탑 부근 조선이주민 부락
민족경제의 파탄은 수산업과 공업부문 등에도 나타났다. 모든 면에서 일본인이 우선권과 독점권을 갖고 있었다. 무단정치시대가 지속되였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직후 신임총독 사이또는 이른바 《문화정캠를 표방하였으나 기본방침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실질적으로는 더욱 강화되였다. 3.1운동 이전 에는 헌병과 경찰이 1만 4358명이였으나 이른바 《문화정캠가 실시된 이후에는 2만 771명 (1922년)으로서 약 절반이 늘어났다. 이 시기 조선인의 일본화정책, 조선인과 일본인간의 결혼장례, 조선인에 대한 고등교육저지(阻止) 등이 실행되였다.
동시기 중국에서의 일본인의 침략도 발걸음을 멈출새 없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의 탄생을 보아 2000여 년 봉건군주제도를 결속지었으나 중국은 여전히 대, 소 봉건군벌의 혼전하에 있었으며 반봉건, 반식민지의 성격은 추호도 변화가 없었다.
철도의 개통으로 일제는 간도상품원료시장의 독점을 가속화했으며 대량의 렴가상품을 쓸어왔다. 천, 면화, 방직물, 해산물,석유 등 많은 소비품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였으며 일본의 금융자본은 점차 금융시장을 점하였다. 일본은 《동양척식주식회사》, 《동아권업유한주식회사》를 통하여 토지를 미친듯이 강점하였다. 1926-1931년 6년 사이 《동척》은 간도에 826만 원을 투자하여 토지상조, 농업자금대부금발행 등 명목으로 고리대를 풀어 12만 무의 토지를 빼앗았다. 1929년부터 《동아권업》도 간도일대에 마귀의 손길을 뻗쳤는데 1931년에 이미 7209헥타르 토지를 수매하였다.
《동아권업》은 남만에서도 토지를 수매하였다. 그들은 각종 수단으로 군벌, 관료, 지주의 대량의 토지를 《상조》하였으며 일본토지경영자에게 자금을 주어 그들이 토지를 구매하게 하였다. 또 《중일합작》의 명의로 중국정부를 기편하면서 토지를 구입해 들였디. 1926년 《동아권업》은 만주에서 토지 12만 3000여 헥타르를 구매 또는 《상조》 하였다. 동시에 일본의 大? 등 자본그룹도 토지를 강점하고 농장을 경영했다. 1927년 10월 통계에 따르면 일제는 동북에서 토지 16만여 헥타르를 빼앗았다. (《?蒙?日本帝?主?》 ???)
철도의 부설은 조선이주민의 만주이주에 큰 편리를 주었다. 1911년 봉천당국은 봉천수리국을 각 지방에 앉혔으며 《수전농사장례장정》을 반포하였다. 1912년 중동철도, 남만철도, 안봉선의 개통, 압록강철교의 가설 등으로 인해 조선이주민의 정착지는 봉천, 관동주로 남하하게 되었고 다른 갈래로는 흑룡강과 우수리강 유역에 분포되였다가 진일보로 수원, 요하 쪽으로 확산되였다. 1922년후에는 북쪽으로는 할빈, 치치할까지,동쪽은 중소변경, 해림, 일면파에 이르렀으며 서쪽도 열하, 장자구방면까지 닿았다.
2. 이주원인
20세기전후 대폭 장성세를 보이고 있는 조선이주민의 만주진출은 그 역사적으로 내려오던 맥박도 있겠지만 당시 조선국내와 국제의 복잡한 환경과 직접적연계가 있다. 조선인의 만주이주는 종래로 경제원인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왔으며 이밖에 정치원인, 사회원인, 지리적 원인 등도 홀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1). 경제적원인
(1) 만주지방이 조선에 비해 생활이 안정되고 살아가기가 쉬웠다. 어느 정도로는 부유하였던 것이다. 만주는 인구가 적고 토지가 비옥하며 생활이 쉬이 보장될 수 있어 조선의 빈곤한 농민들의 만주이주가 이루어졌다.
(2) 조선에서 인구과잉현상이 나타났다. 조선의 인구정성율은 18.62‰로서 고장성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인구밀도 (평방리)는 1350명으로서 길림성의 56명, 간도의 340명 보다 많은 폭도의 높음을 보여준다. 경작지가 줄어들고 땅값이 올라 실업자가 늘어나 해외인구수출의 가능성을 마련하였다.
(3) 중국지주가 조선인을 환영하였다. 조선농민은 담배와 수전 농사에 능하였으며 당시 만주에서의 수전재배성공은 거대한 수익을 따냈다. 수전의 대대적인 개발과 더불어 중국지주는 토지와 자본을 조선이주민에게 대부 주었으며 조선인은 소작인이 신분으로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상호의 이익과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로 이루어진 이 특수한 관계로 조선인은 맨주먹으로 만주이주를 계속하였다.
(4) 간도협약에 의해 귀화조선인의 토지소유권이 승인받았다. 비록 이는 반면적인 자극이나 당시 조선내에서 토지를 잃은 농민에게는 한갈래의 흡인력이 있는 선택이였다.
(5) 조선에 흉년이 빈번하였다. 농민들의 경제력이 내력가 농업개량이 불가능 하였으며 산림이 황페되고 수원이 말라 한재가 따랐고 풍해, 기후불순 등은 재난을 한층 더 심하게 하였다.
(6) 조선농민의 생활이 더욱 곤난해졌다. 토지는 농민들의 생명이였다. 《한일합병》후 자본주의경제의 급격적발전으로 조선의 경제상황은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의 자본이 대량의 토지를 강점, 수매하여 소작료가 점차 늘어났다. 자작인이 소작인으로 되고 소작인이 실업자로 변하였다.(참고표 1-04-1) 생활의 안착지를 찾아 조선남부의 거주민은 대체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북부의 거주민은 만주로 이주하였다.
(7) 조선에 있어서 경작지가 줄어들고 땅값이 올랐으며 땅을 팔아 어느 정도의 자금을 손에 쥔 조선인은 땅값이 저렴한 만주땅을 마음에 두었다.
(8) 만주농업이 흥한다는 풍설(??)이 조선에서 돌았다. 당시 중국인지주는 벼 농사의 단맛을 보고 조선농민을 환영하는 지방이 있었다. 사실상 이상의 선전에는 상당한 근거가 없는것도 아니고 이주소개자의 과장된 선전도 풍설이 퍼지는데 일정한 역할을 논 것 같았다. 봉천방면, 동부몽고지방, 동지철도동부연선 지방의 이주자 중 이 부류의 원인으로 이주한 자가 많았다.
(9) 만주 각지역에 농장이 개설됨에 따라 조선농민의 수요량이 크게 늘어났다. 1914년 철령현에 圃?稻田회사가 설립되고 1921년에는 봉천지방에 동아권업회사농장이 나왔고 1923년에 신민부 서공태보에도 농장을 개설했으며 같은 해에 통료 부근에도 농장을 앉히였다. 이들 농장에서는 수전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였기에 조선농민이 크게 몰려들었다.
(10) 철도의 개통으로 인해 만주이주교통이 편리하게 되었다.
안봉철도는 로일전쟁 때 긴급히 부설한 경편 철도인데 전후 일본은 표준궤도로 고치였다. 일본이 안봉선을 표준궤도로 도친데는 대로 방어의 박절한 수요에서였다. 당시 러시아는 갑자기 시비리아철도복선계획과 흑룡강철도개선계획을 발표하였다.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은 부득불 조선, 만주, 일본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철도선을 연결해야 했다. 개건공사는 1909년 8월에 준공되였다. 1911년에는 또 압록강철교공정을 완성하였다. 배를 타고 내왕했거나 결빙기에 도강하여 월경하는 이주민은 철도의 편리를 타서 남만에서 다른 지방으로 쉬히 이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 남부의 거주자들은 계속하여 만주의 이주를 시도하였으며 두만강지역에 있어서는 1923년 천도(天?)철도 개통, 1927년 국경철교의 준공으로 하여 도문철도의 연결을 완성하였고 사조(四?), 조앙(??)철도(사평-치치할)의 개통에 의해 조남 및 북만의 진출이 매우 쉽게 되었다.
2). 정치적 원인
정치적 원인으로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은 그닥 많이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 부류의 이주자는 대체로 《한일합병》전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 이조시대의 실정(失政), 폭정(暴政) 특히 이조말기 페정(弊政)에 의한 민심의 배반이였다.
(2) 《한일합병》을 전후로 조선인이 일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다.
(3) 중국관민이 조선이주민에 대해 어느 정도는 동정을 표시하였다. 중국인의 자신의 직접적 리익에서 출발하여 조선이주민에게 관대한 정책을 풀었다. 이는 중국인의 재정수입 또는 변강개발, 외래세력을 확산방지 등 목적에도 그 근원이 있지만 아무튼 나라를 잃고 일제의 통치를 증오하는 조선이주민에게 있어서는 희망이 가는 손길이 되었다.
3). 사회적 원인
사회에서 떠도는 만주에 대한 예언을 맹목적으로 믿고 이주했거나 사회 환경의 극변되는 영향으로 이주한 자가 있으나 이는 적은 부류의 이주민으로 생각된다.
4). 지리적 원인
조선은 만주와 강 하나를 사이 두고 있어 내왕이 비교적 편리하며 만주는 인구가 적고 비옥한 벌판이 미개간지로 되었기에 조선개척민의 만주이주는 매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조선인이주사 연재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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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화의 역사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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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동기와 경로 조선이주민의 동기에 대하여 여러 책들에서 조사와 분석을 가하였다. 동척에서 발행한 《간도사정》은 1916년 381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자료를 실었는데 실제 수입증가를 위한 이가 절반을 넘어 첫 자리를 차지하고 배일사상, 생활난, 설교, 상업경향을 동기로 한 체류자가 약 5분의 1을 차지하여 버금으로 간다. 그다음 순위별로는 친척 이 성공을 이룬 뒤 그들을 도와 공동경영을 목적으로 이주한 자, 러시아에서 실업당한 자, 사업실패 후 재 궐기를 위한 자, 러시아방면의 징병을 피해 온 자 등이다. 이상 묘사는 식민통치의 국책회사에서 조사한 자료인 만큼 식민정치의 미화의식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조선총독부사무관 ?原 英太? 씨는 서간도의 만몽지역 조선이주민의 동기를 아래의 몇 가지로 개괄하였다. 만주 토지를 중국인이 거래하는 시세의 2-3배의 가격으로 수매하는 조선인을 중국인이 환영하고 또 한국내의 땅값에 비해 저렴하다는 점, 1911년 이후에는 쌀값이 오르고 수전 농사가 매우 유리하게 되어 만주 수전에 눈 박게 되었다는 점 등이다. 이밖에 이훈구씨는 《만주와 조선인》에서 201명 조선개간민에 대한 이주동기 조사 자료를 적었다. 대체로 살펴보면 집에 돈이 없음으로 이주, 본국에서 경제난으로 인하여 이주, 의식의 곤난으로 인한 이주 등이다. 만주에서 농업을 하기 위하여, 돈을 모으기 위하여 ,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친지를 따라서, 려행의 결과로 등도 이주민의 동기로 되었다. 조선이주민의 경로를 보면 안동지방 안동을 경유하는 안봉 선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 하류를 따라 웅악성 (熊岳城)에 닿았거나 대양하 하류의 대고산 부근에 도달하였다. 봉천지방 안봉 선을 따라 봉천에서 무순방향으로 훈하 유역에 분포되였다. 흥경 지방 무순을 거쳐 흥경에 입주하였고 강을 건너 통화에 이르렀다. 혼하 상류로 되는 거유하(巨流河) 연안지방에는 중국인은 거의 없이 전부 조선인이 수전 농사에 종사하였다. 동산지방 남만 선을 따라 이주하여 개원, 철령 지방의 각 하류 연안을 따라 거주 하였는데 이 일대는 남만의 보물고였다. 길림지방 남만 선을 따라 장춘에서 다시 길장 선으로 길림에 도착하였고 다시 사면으로 퍼져 통화, 해룡 등 북쪽으로 널려졌다. 동몽지방 사조 선을 따라 몽고에 입주하였으며 백음태래(白音太?) 남부에서 조선인을 모집하여 수전 농사를 지었다. 제2절 이주상황 1. 개론 만주조선이주민의 인구통계는 계통적 자료는 없고 산재한 것들은 내원의 다름에 따라 수치상 차이가 크다. 자료의 준확성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함부로 단언할 일이 아니고 또 이 점은 오늘 날 우리가 만주조선이주민의 연구에서 꼭 해명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당시 조선이주민의 실제 수는 통계자료의 숫자보다 더욱 많을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1910-1931년의 만주조선이주민의 천입을 대체로 두 개 단계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첫 단계는 1910-1924년, 이 시기 조선이주민에 대해 제한하는 태도와 정책을 주도로 하고 있다. 1915년 일제가 원세개 북양군벌정부와의 《21조》 협정(만몽협정)의 체결이 근본적인 근거로 되었다. 일제는 조선인을 진일보 자기들의 통치하에 넣었으며 각 지와 지방당국은 조선인에 대한 통제를 심화하였고 조선인의 투쟁이 일제의 불만을 자아낼 가 두려워서 무장탄압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조선이주민의 천입은 이 시기 두 번 고조기를 맞이하였다. 첫 고조기는 《한일합병》후이다. 많은 조선의 농민, 반일분자들이 만주에로 몰려왔다. (부록 표 1-04-2) 1912년 만주조선인수는 23만 8000명에 달하였고 1913년에는 25만을 넘기였다. 두 번째 고조는 3.1운동 후이다. 1919년의 3.1운동은 조선의 대규모적인 전국적 반일애국운동으로써 그 후 많은 애국지사, 독립군, 반일군중들이 동북에 유입하였다. 1919년 동북의 조선인수는 전해보다 약 7만 명이 늘어나는 높은 장성폭을 나타내고 있다. 그 후 1,2년도 계속 약 3만이란 평소 보다 높은 장성을 보이였다. 1925년 이후부터 1931년 사이를 배척시기라고 볼 수 있다. 1925년 1월 11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三矢?松)과 봉천 경무처장 (于珍)은 《三矢협정》을 체결 하였으며 동년 7월 8일 봉천관헌은 《조선인제한법강제실행법》을 반포하였다. 이것이 만주조선인을 박해하는 정치적 근거로 되었다. 이로하여 남만 등지의 조선인은 또 수난을 겪어야 했으며 숱한 사람들이 눈물을 머금고 개간을 토지를 등지고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三矢)협정》체결직전 만주조선인의 수량은 장성폭이 푹 떨어져 근근 4천 명도 안되는 장성을 보았으며 이듬해 즉 《三矢협정》체결되던 해는 아예 장성을 중지하는 상태였다. (전해보다 116명 증가) 20년대 전반에 거쳐 조선인의 만주이주는 10년대의 토대에서 계속 온정 된 장성의 국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1931년 만주조선인수는 63만 982명으로 표시되고 있다. 재만 조선인의 주요한 집단생활지대의 인구 수량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재만조선인의 빈궁상과 해결책) 조선총독부 및 영사관 관할하의 간도지방(연길, 화룡, 왕청, 훈춘 및 기타 지역을 포함)의 조선이주민은 40만, 국민부(조선인 독립단)관할하의 남만 중부지방(흥경, 횡인, 통화, 유하 및 기타 지역을 포함)의 조선이주민은 8만 3000명, 원 참의부와 정의부 관할하는 국경지방(집안, 관전, 림강, 장백 및 기타 지역)의 조선이주민은 7만 3000명, 관동청 및 만철의 관할 하에 있는 만철 연선 (관동주, 부속지, 상부지 및 인접지대 기타 지역)의 조선이주민은 6만 3000명, 한족(?族)노동당 및 한교(??)동향회의 관할 하에 있는 길림부근지방 (길림, 돈화, 액목, 화전, 반석, 몽강 및 기타 지역)의 조선이주민은 4만 3000명, 공산당 및 신민부의 관할 하에 있는 동청철도연선(녕안, 동녕, 액릉 및 기타 지역)의 조선이주민은 3만 5000명으로 집계 되였다. 만주의 조선이주민은 그 절반 이상이 길림성에 집결 되였으며 그 추세는 날로 심하여 지고 있었다. 1916년 길림성 조선이주민은 총인구의 55%를 점하나 1931년에 이르러서는 그 비례가 72%로 늘어났다. 각 현 별 인구를 보면 심양, 안동, 흥경, 통화, 환인, 집안, 장백, 연길, 훈춘, 왕청, 화룡현의 조선이주민수가 1만 명을 초과하며 남만지역에서 흥경현의 조선인이 2만 명을 넘어 최대 숫치를 이룬다. 연길, 화룡의 조선이주민수는 10만을 넘으며 그중 연길은 22만 명이란 높은 숫자를 나타내고 있다. 1910-1921년 만주조선이주민이 원적지별 인구를 보면 북간도지방은 함경북도 이주민이 전체 인구의 70%를 점한다. 그 다음으로는 함경남도, 평안남도이주민이 많은데 약 5-6%를 차지한다. 서간도지방은 평안북도 이주민이 가장 많아 그 비례가 37%로 오르고 경상북도, 함경북도 이주민이 버금으로 각 10-20%를 점한다. 북, 서간도 지방 외에 있어서 함경북도이주민이 주류로써 44%를 차지하고 있다. 전 만주지역을 놓고 볼 때 함경 남, 북도이주민이 약 절반을 점한다. 그 다음으로는 평안 남, 북도 이주민인데 약 26%를 차지한다. 1910-1921년 만주에서 조선으로 귀환한 자는 약 5만 9000명, 1920년에 귀환자가 1만 명을 넘어 최고치를 이루었다. 재만 조선인의 인구 수량에 대해 여러 가지 설법이 있다. 1926년도 조사에 의거하면 일본영사관 자료는 54만, 동양협회 자료는 73만, 만철의 자료는 78만, 이밖에 1927년 대동민보사 (大?民?社)의 조사 자료는 137만으로 나타나 그 차이가 지나치게 현저하다. 1930년 1월호 《신천지》에 船?씨는 논문을 실어 아래의 견해를 내놓았다. 나의 견해에 따르면 만주 및 시비리아의 조선인은 200만에 달하며 만주에 120-130 만을 헤아리는 조선인이 있다. 일본의 관할범위에서 벗어져나간 편벽한 산지의 조선인 이 인구조사 때 등록되지 않았는데 그 수량은 50-80만에 달하고 있다. 또 교통 불편, 마적의 교란 등으로 인해 조사가 불완전했었다. 동양협회 또는 만철의 조사에 따라 1926년 재만 조선인인구를 약 80만으로 정하고 4년간 자연장성수량을 합하면 90만으로 예견된다. 미조사 된 약 60만을 고려하면 재만 조선인은 1930년경 약 150만 명일 것이다. ] 수전 농사 및 한전의 경작지 면적으로 추정된 길림성조선인은 16만 3000명, 봉천성은 20만 7000명, 흑룡강성은 3867명으로서 동3성 조선인은 37만 4000명이다. (1926년 만철조사) 영사관의 조사에 의해 추정된 수치는 길림성 조선인은 41만 2000명, 봉천성은 16만 6000명, 흑룡강 성은 3000명으로서 동3성 조선인은 58만 1000명이다. 출장원의 조사에 의해 추정된 인구 (1927년)는 길림성 조선인은 54만 2000명, 봉천성은 18만 2000명, 흑룡강성은 1만 2000명으로서 동3성 조선인인구는 77만 5000명이다. 2. 지방별 이주민 1). 간도지방 간도라 하면 대뜸 우리 조선인이 생각히우고 만주라 하면 간도가 처음으로 그 대명사로 꼽힐 것이다. 간도의 연혁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이미 서술한바 있으며 지금 우리가 외우는 간도는 그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남쪽은 두만강을 사이 두고 조선 함경북도와 마주하고 있으며 남 북쪽 두만강 이외의 3면은 모두 산악으로 이루어진 자연병풍에 싸여 있다. 연길, 훈춘, 화룡, 왕청 등 4개현을 포함하며 면적은 약 2만 1000 km²이고 토양이 비옥하여 농사에 적합하며 특히 관개가 편리하기에 벼농사가 잘되고 있었다. 사진 1-04-2 일본 영사관 국자가(연길)분관 1911년, 간도 4개현의 조선이주민은 12만 6000명으로 기록 되였고 1931년에는 40만 6000명으로 늘어나 20년 사이에 28만 명의 장성을 보았다. 최초의 인구보다 2배 이상 더 불어난 것이였다. 그중 1922-1924년 3년 사이에 만주의 기타 지방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일본정부의 조선인 배척, 구축 등 원인으로 인해 조선인 인구의 장성이 드디어 령장성을 나타낸 듯 싶었다. 연길에 조선인이 가장 많이 모이였는데 1917년 9월말 통계에 따르면 그 수가 10만 5927명으로서 간도(4개현) 총인구의 45%이상을 점한다. 화룡현은 6만 8063명으로서 30%를 점하고 있다. 10년 후인 1926년에는 연길(16만 9227명)과 화룡(11만 1605명)의 조선인이 점하는 비례가 78%로서 상당히 온정한 추세를 보이였다. 이런 추세는 30년대 초까지 지속 되었다. 연길현은 조선이주민이 간도개척에서 첫발자국을 디딘 곳이다. 동쪽은 왕청현 일부와 두만강을 사이 두고 조선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쪽은 할바령을 계선으로 돈화현 및 화전현의 일부와 마주하며 남쪽은 화룡과 접했고 북쪽은 녕안현과 접하였다. 면적은 5.297 km²(1940년 10월)이고 경내 대부분은 산구이며 평균 해발높이는 450m, 연평균기온은 5℃ 좌우, 강우량은 500여mm, 무상기는 120-140일이다. 주요한 하류로는 도문강, 부르하통하, 해란강이 있으며 강하양안은 벼농사가 잘 된다. 용정에서 서남쪽으로 4km쯤 떨어진 곳에 비암산이 있다. 50여 년전에 비암산 코승이, 깍아지른 벼랑 끝에 두 아름도 넘는 소나무가 있었는데 일송정이라 불렀다. 비암산의 일송정은 독립운동과 항일선구자들의 상징으로 알려졌으며 조선이주민들은 일송정을 길상물로 여겼다. 여인들은 생남하기 위하여 일송정의 바위를 기자석으로 이용했고 농부들은 왕가물이 들면 기우제를 지낼 때에도 일송정바위를 명암으로 이용했으며 독립운동가와 항일선구자들은 비밀집회장소로 이용했다. 용정의 조선인들이 일송정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용주사에서 일송정을 바라보면 그 모양이 마치 바위 우에 호랑이가 버티고 앉아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라 한다. 일제는 일송정을 불길물로 여기고 실탄연습의 과녁으로 삼고 매일과 같이 보총과 박격포를 쏘았다. 또 한밤중에 병사를 파견하여 일송정줄기의 껍질을 도려내고 구명을 뚫고 후추씨를 넣고는 도려낸 껍질을 붙이고 대못을 박아 흔적을 없앴다. 1938년 일송정은 말라 죽고 말았다. 1990년 각계인사들은 작은 소나무를 일송정 원 자리에 심고 《일송정》이란 정자를 신건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조선인의 용정이주에서 명동촌은 유명했다. 조선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삼합진과 지신진의 경계선인 오랑캐령을 넘어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원래는 《동가지방》 또는 《부걸라자(富?砬子)》라 불리웠는데 조선인이 이주하면서 비둘기바위를 길상물로 지정하면서부터 《명동》으로 개칭 되였다. 명동이란 《조선을 밝게 하자》의 의미이다. 1899년 김약연을 중심으로 한 전주김씨 31명, 김하규를 중심으로 한 김해김씨 63명, 문병규를 중심으로 한 문씨 40명, 남종구를 중심으로 한 남씨 7명과 그 먼저 명동에 들어와서 중국인지주 동씨와 토지구매, 이사 등을 교섭하던 김항덕 등 142명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여 1899년 2월 18일 조선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 자동촌을 거쳐 명동으로 이주하였다. 1900년 종성대안으로 이주하였던 윤하현(윤동주의 조부) 일가 18명이 명동으로 이주하여왔다. 이들은 인재육성에 모를 박고 집단적으로 토지를 사들여 제일 좋은 토지의 10분의 1를 학교 밭으로 떼놓고 서당을 꾸리였다. 김약연은 장재촌에 규암제서당을, 김하규는 대사돈에 소암제를, 남위원은 중영촌에 한함서재를 꾸리고 공부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1899년 142명의 집단이주가 있은 뒤 이들을 핵심으로 《새 조선인》마을이 뿌리내렸다. 명동촌은 1910년대와 20년대 초에 간도조선인의 반일운동의 중심기지로 작용하였으며 민족독립운동에 불멸의 업적을 남기였다. 1913년에 연길현을 설치하기 시작하여서부터 여러 차례의 행정구역변화가 있었다. 진(?)들로는 용정이, 도문가, 조양천, 로투구, 명월구가 있다. 용정가는 상업이 비교적 발달한 지역으로서 해란강 하류 충적(??)평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육도하가 용정가의 서남쪽에서 해란강에 흘러들므로 육도구라는 옛 칭도 있다. 1907년 일제는 여기에 조선통감부 임시파출소를 비법적으로 설치하였고 후에는 간도일본총영사관으로 고쳤다. 청나라도 이곳에 상부국을 설치하였다. 도문가는 도문강 북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야하, 부르하통하가 도문강에 유입하는 회합구에 있다. 철도와 공로 다리가 조선으로 통하며 길림동부의 중요한 항구이다. 7월달 평균기온은 19.3℃, 무상기는 128일이다. 1932년 전에는 100여 호 인가뿐이고 한족들은 이곳을 《하전자(下甸子)》, 조선인은 《회막동(灰幕洞)》이라 불렀다. 조양천은 부르하통하와 조양하가 회합하는 곳이다. 원래는 천도(天?)선의 자그마한 역전이던 것이 경도(京?)선이 개통된 후 천도 선을 국유로 하는 바람에 점차 진으로 발전 되었다. 로투구는 부르하통하 강반에 위치, 사면은 산에 싸여있다. 탄광 개발로 하여 진으로 발전되였다. 석탄매장량은 2백만 톤, 돈화, 용정, 도문 등 지역에 공급 되였다. 1933년 4월에는 만철과 위만정부의 공동출자로 로투구탄광회사가 세워졌다. 명월구는 할바령동쪽, 부르하통 강반에 위치해 있다. 부근은 목재산지로서 명월구는 인츰 목재집산지로 되었다. 1932년에 목재 6만 석, 1933년에는 10만 석을 생산하였지만 1934년에는 모종 원인으로 목재채벌을 중지하였다. 용정촌 상부지역에 비교적 많은 조선인이 집중 되여 있으나 총체적으로 볼 땐 90%이상의 조선인은 상부지 외 지역에 널려 살았다. 즉 대부분 연길현의 조선이주민은 농업을 비롯한 비상업활동에 종사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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