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 엘레지

<이상규 수기 시리즈 2>

2008-01-02     동북아신문 기자

한때 연변엔 한 집 걸러 하나 꼴로 노래방의 수가 많았었다. 연변의 노래방은 과거에 우리나라 노래방과는 격이 다르게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단란주점과 매우 흡사한 성격을 띤 노래방이다. 

  한국 사회에서 공전의 대히트를 쳤던 업종을, 한국을 드나들던 조선족 사회의 사업가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성황을 이루던 한국의 노래방 바람이 연변 사회를 매섭게 강타한 것이다. 노래방 기기 몇 대와 그럴싸하게 실내장식만 하면 떼돈이 거저 굴러들어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투자 금액도 별반 들지 않고 운영하기 손쉬운 업종이라는 강점도 있었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란 소문이 돌자 너도나도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고, 마침내는 너도나도 없이 깡그리 망하는 사업이 되고 말았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꼭 엎었다 떼어놓은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을 연변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하루는 연변의 조선족 학생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는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허허’ 하고 쓴웃음만 내뱉고는 아무 말도 못한 적이 있었다.

 북경에 사는 한족이 사업차 연변에 다니러 왔다가 조선족 학생에게 물었다.

  “연변에는 웬 돈들이 많아 먹고 노는 가게가 이렇게 골목마다 즐비한가?”    이 말을 들은 조선족 학생은 자기 어머니도 한국으로 돈 벌러 가서 꽤 많은 돈을 부쳐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학생은 서슴없이 대답을 하게 되었다.

  “연변에 큰 기업체는 없지만 조선족들이 한국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보내기 때문에 잘들 살아서 먹고 노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 말을 듣고는 그 한족(漢族) 중국 사람이 대뜸 받아서 말하더란다.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종살이 한 화풀이를 술집과 노래방에서 푸나 보지요?”

  학생은 이 말을 듣고는 얼굴이 화끈거려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고 내게 말해 주었다.

 

  국내에 조선족 체류자가 가장 많았을 땐 대략 20만 명이 훨씬 넘었던 적도 있었다. 조선족 총 인구가 대략 2백만 명이니까, 한 가정을 5명으로 추산하면 중국 내 조선족 가구 수는 약 40만 호 정도가 되는 셈이다. 20만 명이 넘는 조선족이 국내에 체류를 하고 있다는 말은 즉 한 집 건너 한 집의 어른이 한국에 머물며 돈을 벌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하니 연변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 없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최근엔 중국 정부에서 조선족 자치주를 축소한다는 풍문까지 나돌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어린 학생들에게 ‘가족 중에 한 분이라도 한국에 가 있는 학생 손 들어봐요.’ 하고 물으면 많은 학생들 중 극히 일부만 빼고는 반 전체 학생이 손을 든다고 한다.

 

  전 연변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신 정판룡 선생이 작고하기 전 한 음식점에서 내게 들려줬던 말이 생각난다.

 

  “지금은 돈을 벌기 위해 조선족 가정마다 심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레 모든 가정이 제자리로 돌아올 겁니다.”

  지금의 연변 사회를 심한 말로 표현하면, 현재는 ‘해체(解體) 중’이라고 표현을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 같다.

  이렇게 벌 떼처럼 한국으로 몰려온 조선족은 그 동안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떻게 돈을 벌고 있었는가?

 

  한중 수교를 맺은 지 얼마 안 되어 한국 국적을 얻어 초창기에 입국해 취업했던 박경숙(가명)이란 연변 아주머니가, 그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당했던 수모와 고통의 사연은 이러했다. 물론 한 사람의 지나온 과거사가 조선족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조선족을 접하며 들었던 그들의 고충은 거의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가리봉동은 수출 산업 단지로 조성된 구로공단 옆에 위치한 동네다. 구로공단에 근무하던 근로자가 많이 살던 동네로, 공단이 공단의 구실을 못하고 서서히 해체되어 가자 공장에 근무하던 근로자들도 하나 둘 떠나가게 되었다. 공단의 근로자가 떠난 가리봉동의 열악한 주거지는 타 지역의 임대료에 비해 매우 저렴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조선족이 그 곳에 정착을 하게 된 동기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박경숙이라는 아주머니는 거금을 들여 주민증을 손에 움켜쥐고 생판 모르는 조국의 땅 김포공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어디로 가야할 지 앞길이 막막했다. 친척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에 수소문하여 먼저 정착한 분의 주소지를 적어왔던 게 전부다. 들떴던 흥분도 잠시, 공항 출구에서부터 초죽음이 된 아주머니는 꼬깃꼬깃 구겨진 메모 쪽지를 꺼내들고 공중전화를 걸었다. 무거운 짐 보따리를 들고 가리봉동 주소지를 물어물어 찾아가는 길은 저승 가는 길보다 더 힘들고 어려웠다. 여벌로 가져 온 노자도 얼마 되지 않으니 호사스럽게 택시를 탈 수 없는 처지다.

 한국에 오기 위해 빚진 돈을 갚자면 뼈 빠지게 1년을 벌어서 몽땅 저축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 동안에 몸이라도 아파서 드러눕는 날이면 만사가 허사가 된다. 그러니 몸이 아프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낯선 아주머니의 집에 도착한 건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안면은 없지만 한 다리 건너 알음알음 이름을 대니 서로는 금세 친해졌고, 고국 소식을 들려줄 때마다 먼저 정착한 아주머니의 눈에선 눈물이 고인다. 그 동안 쌓였던 고독과 외로움과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하여, 서로는 부둥켜안고 흐르는 눈물로 한 맺혔던 가슴의 응어리를 말끔히 씻어내게 되었다.

 

 그 곳에서 며칠을 묵으며 앞날을 설계했다. 설계라고 해 보았자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다. 먼저 정착한 아주머니로부터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귀동냥해 들었다. 연변 아주머니들이 갈 수 있는 일터란 식당, 여관, 또는 파출부 정도라며 운이 좋아야 가정의 식모자리라도 얻는 게 전부라고 알려 준다.

 며칠 뒤 직업소개소를 찾아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추천받아 간 첫 일자리가 모텔 청소원 자리였다. 홀대받고 천대받으며 여기저기로 팔려 다니다시피 떠돌기를 또 몇 년이 되었다.


 1995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박경숙이라는 아주머니의 집안은 어떠했는가. 궁핍한 살림살이에서 어떻게 하면 가난에서 탈피할까 고심을 하다가 북한을 넘나들며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중국 내의 조선족들이 장사를 해 돈을 번다는 건 그 누구도 꿈도 못 꿀 때의 일이다.

 1978년 경 맨 처음 장사에 손을 댄 것이 세이코 손목시계다. 북한에서 세이코 손목시계를 살 수 있었던 건, 결혼을 하거나 북한 국적을 취득해 북한에서 살던 조총련 교포들이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 마지막에 가선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까지 팔아서 먹고 살 식량을 장만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외제 시계를 매우 선호하는 중국 국민의 심리를 알아차린 아주 기발한 사업 착상이었다. 즉 북한에 살고 있는 조총련 교포들의 세이코 손목시계를 사서 중국에 파는 장사였다. 그 당시만 해도 중국은 제3세계와의 민간인 무역이 금지되어 있던 때라 꽤 짭짤한 소득을 올리게 되었다. 북한의 세이코 손목시계가 바닥이 나자 내친 김에 청진까지 넘나들며 명태 장사도 해 보았지만, 별반 재미를 보지 못해 이 사업도 정리하고 말았다.

 

 1992년 가정불화로 이혼을 하게 되었고, 졸지에 가장이 된 박 여사는 두 딸의 교육을 책임지며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를 부양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남동생이 있었지만 희귀병을 앓고 있었던 관계로 경제적으로 어머니를 모실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땅 회령에도 의사인 작은 아버지와 고등학교 선생인 작은 어머니가 살고 계신 관계로 간간이 찾아뵙고 도움을 드려야 했으며, 찾아뵙지 못할 때에는 연변으로 불러내어 도움을 주기도 했다.

 

 두 딸자식과 연로하신 어머니와 병든 남동생 등, 식솔들을 생각해 굳은 마음을 먹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으니 하루하루를 별 탈 없이 지탱하려면 고된 노역도 참으며 쉴 날도 없이 돈벌이를 해야만 한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옮겨 다니며 주인으로부터 받는 천대와 학대는 아예 생각 밖의 남의 일인 양 딴전을 피우며 전심전력 일에만 몰두를 했다.

 

 몇 년간에 걸쳐 식당, 모텔, 가정부, 병원의 호스피스를 거치면서 겪었던 인생사는 한 권의 장편소설을 쓰고도 남을 정도의 오욕의 세월이었다며 눈시울을 적신다. 이처럼 많은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용인 신갈에 있는 모텔에서 있었던 끔찍한 사건을 이야기하며, 그 때 내가 오물이나 실컷 들이키고 죽었더라면 그 동안 있었던 비참했던 추억도 함께 지워져 차라리 행복했는지도 모른다며 치를 떤다.

 직업소개소를 통해 얻은 일자리는 신갈에 있는 모 모텔이었단다. 불법 입국자의 신분이었던 한족인 젊은 여인도 같은 시기에 함께 첫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 여인은 한족의 신분인데도 우리말을 곧잘 했다고 한다.

 

 근무한 지 3일째 되던 날 남자 직원이 여자들이 청소하는 일에 쓸데없는 참견을 하기에, 우리 할 일이나 알아서 열심히 하자고 한족 아가씨에게 귀띔을 해 주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 말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젊은 남자 직원이 달려들어 머리채를 움켜쥐고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처박았다.

 “이 XX년아.”

 그리고 그는 욕을 퍼붓고는 마구 구타하기 시작했다.

 연약한 여자의 힘으로 변기에서 고개를 들려 애쓰지만 마음 뿐, 우악스런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한참을 변기 물을 먹고 전신을 두들겨 맞기를 얼마나 했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도 순간 정신을 가다듬어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그 자리를 탈출해 파출소로 뛰어가 신고를 하게 되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함께 차에 태워, 파출소에 가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피해자 조서를 받고 난 박 여사에게 모텔에 가서 주민증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주민증을 보여주자 합의를 하라고 윽박지르더란다. 만약에 합의를 하지 않을 시에는 두 사람 모두 구속시키겠다며, 피해자인 자신도 가해자 취급을 하더라며 울분을 감추지 못한다. 왜 피해자인 내가 잡혀가야 하느냐고 큰 소리로 항의를 하게 되었고, 잡혀갈 죄를 지었다면 잡아넣으라고 소리를 질러 파출소에서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박 여사는 파출소에서 일방적으로 당한 억울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어 그 길로 병원으로 달려가 진단서를 끊게 되었다. 병원 의사의 진단 소견은, 가슴 부위의 타박상이 특별히 심한 전신 타박상과 발목의 뼈에 금이 갔기 때문에 깁스를 해야 한다며, 3주의 치료를 요한다는 진단서를 발급해 주었다. 이 3주의 진단서도 억울하다고 박 여사가 하소연한다.

 

 박 여사에게 왜 이 같은 폭행이 일어날 수 있었느냐고 물어보았다. 아마 중국 한족 아가씨가 말을 보태 가해자에게 고자질을 하는 바람에 기분이 상하게 되었고, 자신이 연변에서 온 불법 취업자라고 멋대로 판단하고 폭행을 가해도 고발을 못할 것이라는 오판으로 그 같은 일을 저지르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외국인 취업자에 대한 학대가 오죽이나 심했으면 베트남에서 발행되는 한국 취업 교재에 ‘왜 때려요. 우리도 사람이잖아요.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란 문구의 글도 있다 하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글을 읽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면 이는 인면수심(人面獸心)임에 틀림없다. 이런 의식을 버리지 않고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며 내 민족이라고 소리 내어 통일을 외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못해 아예 꼴불견이다.

  파출소에서 받은 조사가 너무 편파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박 여사는 용인 경찰서에 진정을 내게 되었고, 가재는 게 편이라고 그래도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이번엔 경기 지방 경찰청 민원실에 진정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진정한 내용이 다시 경찰서로 내려가자 그 때서야 피해자에게 입힌 정신적 피해에 대해 정중히 사과를 드린다는 내용의 전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하여 가해자는 3백만원의 벌금형을 받게 되었고, 또 이 형사사건을 근거로 해 민사 소송을 제기하여 피해자에게 4백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원고 승소 판결도 받게 되었다. 민사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받고 집달리를 대동하고 가해자 집을 찾아 갔으나, 바로 며칠 전에 합의 이혼을 한 상태라 단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하고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2개월 간 일도 못 하고, 그 사건으로 인해 제반 경비로 대략 2백만 원 정도를 또 탕진하게 되었다.

 

 이런 심적인 고통과 경제적인 손실로 하여 박 여사는 연변에 있는 식솔들을 돌봐줄 수 없게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투병생활을 하던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병원비도 제대로 못 대준 남동생마저 저 세상으로 떠나는 3중고를 겪게 되었다.

 이렇게 꿈에 그리던 모국에서 학대와 차별로 인해 풍비박산 나게 된 집안에 대한 책임은 과연 누가 져야 할 것인가. 귀화한 내 동포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불법체류자들의 고통은 과연 얼마나 클까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쇼윈도 속의 벌들의 비행


  암흑의 땅 속에서 진화한 애벌레가

  탈진한 몸뚱이로

  선 꿈을 쫓아 나는 힘겨운 비행


  붉은 네온 불빛 아래

  마네킹의 미소와

  채색한 꽃잎의 유혹


  화려한 쇼윈도 속

  독 향기를 들이키고

  수없이 죽어간 벌 떼


  바닥에 떨어져 쌓인 벌들의 잔해를

  말끔히 쓸어내며

  비참한 동포들의 오늘을 생각케 하네.